15권-09화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어! 이 녀석이 반신인 아문보다 더 강하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황제는 말 그대로 혼란에 빠졌다.
객관적으로 보면 자신이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룰 수 있는 힘의 규모는 물론, 모든 상성을 무시할 수 있는 역천의 권능까지··· 무엇 하나 뒤쳐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황제의 공격은 유태진 하나를 어찌하지 못했다. 빠르고 강력한 공세로 압도하고자 했지만, 놈은 번번이 그것들을 받아 흘리고 비틀어내면서 전부 무위로 만들어버렸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동작.
알카데인 황제도 저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 놈은 압도적인 차이를 메우기 위해 힘의 방향성을 틀어버리고, 흐름을 다른 곳으로 흘려보내거나 분산시키고 있다.’
물론 저런 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상대방의 힘을 이용하거나 흘리는 기법은 간단한 무술에도 종종 볼 수 있는 것들이니까.
허나 이건 아예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나노 단위보다도 더 미세한 어긋남이 생겨나면 당장이라도 목숨이 날아갈 것 같은··· 일종의 외줄타기나 다름없는 정교한 기교.
저걸 굳이 비유한다면 갓난아이가 숟가락 하나를 쥔 채, 붕괴하는 마천루 급 고층건물의 잔해를 흘려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콰아아아앙!
근처에 있던 큼지막한 소행성 하나가 단숨에 부서져 흩어졌다. 지구 주변을 도는 달보다 조금 작을 정도의 소행성이었는데도 단 일격에 부서진 것이다.
이런 막강한 힘이 실린 일격이었는데도, 유태진은 자신을 향한 공격을 검 한 자루로 빗겨 흘려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보다시피 소행성의 소멸이었다.
‘이것마저 흘려보낸다고? 아문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기교를?’
아문은 론데니움 제국의 역사나 다름없는 반신 급 강자였다. 그의 실제 나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심지어 소문에는 그가 제국이 세워질 당시부터 살아 존재했다는 말이 떠돌 만큼 긴 세월동안 수많은 경험과 실전을 치러왔다.
헌데 그런 아문조차 기교만으로는 유태진을 따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발치에도 못 미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건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작 30년도 못산 필멸자 따위에게 이런 게 가능할 리가···.’
알카데인 황제에게 유태진은 마치 미지의 생물 같았다. 지금까지의 상식을 모조리 부정하는 듯한 저 솜씨는 반칙과도 같지 않던가.
게다가 유태진의 말도 안 되는 솜씨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심지어 그가 획득한 역천의 권능조차 서슴없이 받아쳐냈다.
역천은 이름 그대로 모든 흐름과 섭리를 거스르는 권능. 상대방이 어떤 수단을 들고 나온다 해도 그에 상극인 힘으로 받아칠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아문이 가진 시간의 권능도 파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유태진이 가진 사상기의 정체가 대체 뭐란 말인가? 제대로 된 권능도 아니고 고작 섭리에 한 발짝 걸쳤을 뿐인 사상기 따위가 역천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게 아닌가!
슈아악!
첫 시작은 빛보다도 빠른 쾌검. 유태진이 뻗어낸 분광십팔수검의 한수가 공간을 갈라온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알카데인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느꼈었다. 제아무리 빠르다 해도 결국 이런 건 물리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으니까.
시간을 초월하고 물리적 섭리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초월자에게 있어 빠름이란 건 크게 중요한 개념이 아니다.
인과를 초월할 정도의 빠름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로는 자신을 위협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때 예상을 초월한 결과가 나타났다. 날아들던 극쾌의 검격이 더욱 가속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끝없이 빨라진다고!?’
가속을 거듭하는 쾌검이 어느새 시간의 영역마저 넘보기 시작했다. 이젠 황제라 해도 경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경각심이 든 그는 즉각 역천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아문조차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그가 가진 최대의 한수.
가속을 넘어 시간 가속의 영역에 든 쾌검을 상대로 황제의 검 끝이 시간을 느리게 흐르도록 만들어나간다. 마치 모든 것을 동결시키듯, 우주공간의 흐름을 둔화하고 있었다.
이것이 역천! 상대가 만들어 내는 흐름 자체를 거스르고 뒤트는 권능이었지만, 유태진은 이를 마주하고도 전혀 당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차갑게 웃는 게 아닌가.
그리고 곧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빠르게 흐르는가 하면 정체되기도 했고, 혹은 시간 자체가 뒤로 감기듯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시간가속의 영역으로 다가가던 극쾌의 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 이젠 쾌검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았다. 빠름과 느림, 단순함과 현란함, 그리고 가벼움과 무거움··· 무(武)로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무리가 그 안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런 미친!”
자신의 모든 공세가 그 앞에 무너져 내렸다. 분명 객관적으로 보면 신격이든, 다룰 수 있는 영력의 규모든 유태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여신 윌키아의 권능을 다룰 때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랜드 급에 불과한 필멸자에게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수준이거늘 이런 식으로 곤욕을 치른다고?
“이놈!”
그가 펼친 모든 공세가 유태진의 한 자루 검 앞에 산산이 해체되었다. 이 일대 우주의 기운을 모아들여 펼친 공격은 물론 역천조차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지? 정말로 인간인가?’
놈이 다루는 게 정말로 사상기라면 이럴 리가 없었다. 사상기란 자신의 심상 안에 내포된 고유의 사상을 현실로 끌어올림으로서 현상을 현계시키는 힘.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권능의 전 단계인 만큼 그보다 못해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유태진의 그것은 어떻게 역천마저 무시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헌데 그때, 알카데인 황제의 감각에 무언가가 느껴졌다. 좀 전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었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네놈, 신격이 있었구나!”
비로소 모든 게 이해되었다. 놈은 그랜드 급이지만 그랜드 급이 아니었다. 어떻게 저런 어긋남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육체는 그랜드 급이되, 그 영혼은 이미 반신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어째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놈이다 했거늘··· 이래서였나?’
그동안 리겔들을 비롯한 자신의 수하들이 어째서 매번 실패만 거듭했는지 그 이유가 명백해졌다. 놈은 그냥 실력 좋은 오버러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난 강함은 어디까지나 부가적일 뿐, 실제로는 이미 반신에 도달한 초월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육체가 영혼의 격과 맞지 않게 수준이 낮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신 급의 신격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
“감히 짐을 속이고 있었다니!”
“속이긴. 진작 눈치 못 챈 놈이 나쁘지.”
분노한 알카데인 황제를 자극이라도 하듯 유태진은 빙긋 웃으며 빈정거렸다.
하지만 황제는 그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냉정해졌다. 그는 침착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지금 그건 네놈이 가진 권능이냐?”
“권능? 아니, 이건 권능이 아니다. 무공이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하는 그 말에 황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응했다.
“무공이라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알카데인 황제도 무공이 뭔지 모르지는 않았다. 영능학의 일종으로서, 무예를 발전시켜서 체계화 한 고유한 형태 중 한 가지 아니던가. 하지만 사용하는 자들이 많지 않고 폐쇄적이라 비주류에 속한 터라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영능학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역천의 권능에 비견되는,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힘을 사용해놓고 그게 고작 무공일 뿐이라니!
무공이란 게 제아무리 대단한 영능학이라 하더라도, 권능은 인과섭리 그 자체를 움직인다. 감히 비교할만한 게 아니었다.
문제는 지금 유태진의 말 속에서 전혀 거짓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황제, 네가 아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나? 무공의 폭은 넓고 방대하다. 그리고 그 중에선 이런 것도 가능하게 해주지.”
우우웅!
유태진이 왼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펴기 시작한 왼손 안에는 좀 전까지 없었던 작은 칠흑빛 구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극한의 무게가 만들어낸 시공간의 특이점. 심지어 빛마저도 집어삼킨다는 공허의 무저갱이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황제가 깜작 놀라 외쳤다.
“이런 미친! 블랙홀을!?”
천중무한신공(天重無限神功)
천중칠절예(天重七絶藝) 제 7절. 천중인(天重印)
극의. 멸겁현운광(滅劫玄運光)
쿠오오오!
유태진의 손에서 피어오른 공허는 순식간에 규모를 키워나갔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진정한 소멸의 특이점이 되었다.
“크악!”
황제의 상체 일부분이 블랙홀에 휘말려 도려내졌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극한의 인력을 미처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덕분에 왼쪽 팔과 어깨어림을 날려버린 황제는 이젠 더 이상 여유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든 몸을 빼서 블랙홀의 영향권으로부터 탈출하긴 했지만, 그가 받은 데미지는 결코 적지 않았다. 물론 소멸된 어깨와 팔 따윈 언제든 다시 재생시킬 수 있지만, 이미 입은 데미지는 단숨에 회복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황제는 말 그대로 아연실색했다. 제아무리 반신의 격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지, 육체는 그랜드 급에 불과한 자가 어떻게 이런 막대한 힘을 휘두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헬 파이어.”
유태진의 작은 읊조림과 함께 그의 손끝을 따라 피어오른 푸른 업화가 거대한 형태로 빚어졌다.
그것은 결코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길. 클래스 학파의 8클래스 마법 헬 파이어가 고작 시동어만으로 발동된 것이다.
“이번엔 마법을!?”
화아악!
거센 열기가 덮쳐들었다. 아직 블랙홀에 당한 데미지가 미처 가시기도 전에 날아든 헬 파이어였다. 평상시였다면 우습게 반으로 베어버렸을 마법이지만, 지금은 여의치가 못했다.
“크윽!”
지옥의 불길이 황제의 원영신을 불태웠다. 물론 반신인 그가 그 정도로 어찌될 정도로 약하진 않았지만, 고통스러운 건 변함이 없었다.
황제는 재빨리 기운을 끌어 모았다. 반신이란 피륙으로 된 기존의 육체를 넘어, 영과 혼 자체가 물질화 되어 현세에 존재하게 된다. 그렇기에 삼라만상의 기운을 자신의 뜻대로 끌어 모을 수 있으며, 그것으로 거의 무한에 가까운 힘을 다룰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힘으로 불길을 꺼뜨리고 유태진에게 반격을 가하려던 그 순간, 생각지도 않던 공격이 황제의 전신을 때렸다.
“슈티르! 카이니즈!”
우주 한 복판에서 때 아닌 바람이 불어오고, 벼락이 내리쳤다. 그것은 전함의 장갑마저 산산이 찢어낼 수 있는 위력의 토네이도와 작은 위성 하나를 뒤덮고도 남을 벼락의 폭풍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