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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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오버러와 같은 영능력자들이 주 전력으로 활약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과학과 마도공학은 점점 진보하고, 그에 비례해 각종 병기와 전함의 성능도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세상이었다.
그래서일까? 현재에 와선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고선 일개 영능력자의 힘으로 전함의 힘을 뛰어넘기 어려운 시대에 이르렀다. 물론 경우에 따라선 전함의 힘을 뛰어넘는 영능력자도 있긴 하겠지만, 그래봐야 함대라는 집단의 화력을 넘어서는 건 쉽지 않았다.
심지어 영능력자들 중에서도 사실상 최고 수준이라 알려진 그랜드 급들도 함대의 힘을 능가하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특히 준대형 급 전함의 막대한 출력에서 나오는 화력만큼은 그랜드 급을 크게 웃돌 정도였다.
하물며 그런 준대형 전함을 중심으로 다수의 전함이 뭉친 함대를 능가한다? 그건 아주 예외적이라 할 만큼 특별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같은 그랜드 급이라 하더라도 능력의 종류가 전함을 상대로 상성적 우위에 있거나, 영력의 양이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아서 함대와 싸울 때 보다 유리한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었다.
그렇기에 현재의 전술은 대체적으로 함대전을 통해 적의 전열을 무너뜨리거나 혹은 더 이상 주포를 투사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간 뒤, 영능력자들을 출격시켜 상대의 진형을 파괴하는 형태로 정립되었다.
그런데 시대를 역행하는 이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서로 주포를 주고받는 함대간의 화력전 상황에서 영능력자 하나가 맨몸으로 우주공간으로 뛰쳐나왔다고?
제국의 함대를 이끄는 바르투인 사령관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저 얼간이 녀석은 뭐냐? 혼자서 우주공간으로 나왔다고? 화력전을 펼치는 이때에?”
[행성 연합의 특무함대 바니아스입니다. 아마도 저 자는 그곳 소속의 오버러로 보이는군요.]
뒤이은 오퍼레이터의 보고에, 바르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연합에서 온 함대 하나가 참전했다더니 그게 바로 저것들이었군.”
바니아스 함대가 비슷한 규모의 함대에 비해 좀 더 특출한 화력과 전력을 보유했다고는 하지만, 딱히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대규모 전력이 맞붙는 대회전에서는 기껏해야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일 뿐이니까.
그래서 별 관심두지 않고 있었는데, 저런 멍청한 녀석이 우주공간으로 튀어나오니 당연히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놔두긴 거슬리니 쓸어버리도록 해. 어떤 멍청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라면 그냥 죽여주는 게 낫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주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놈이 우주공간에 맨몸으로 뛰쳐나왔다는 건 그만한 자신이 있다는 소리일 테니까. 게다가 이를 만류했어야 할 주변 녀석들이 이런 돌출행동을 막지 않은 걸로 보아, 상당한 실력자임은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대규모 전쟁에서는 무의미했다. 저 자가 설령 그랜드 급 영능력자라 해도 무모한건 매한가지였다.
지금 아르센티아 주역에서 오가는 양측의 화력이 얼마나 막강하던가. 어지간한 행성 몇 개쯤은 순식간에 녹여버릴 수 있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에너지 앞에선 제아무리 날고뛰는 대단한 영능력자라 해도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눈앞에 펼쳐진 믿기 어려운 광경 앞에 사르르 녹아내리고 말았다.
콰아아아!
바르투인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바니아스 함대 방향으로 주포를 겨눈 일부 전함들이 이윽고 강렬한 섬광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에메랄드 헤븐의 에너지를 공유 받는 이들의 화력은 상상을 초월해서 마치 바니아스 함대가 빛 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헌데 그 순간, 거대한 적색 기운이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장대한 빔과 중력파 포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천룡무상검법(天龍無上劍法) 제 4식. 적룡출하(赤龍出荷)
비의. 적류회선강(積流回旋罡)
화아악!
“뭐냐, 저건!?”
상상도 못했던 광경 앞에 바르투인 사령관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회전하는 적색 소용돌이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빔이고 중력파든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준대형 전함이 고출력으로 방포한 중력파보다 더 강력한 인력으로 끌어당기면서 모조리 흡수하고 있었다.
“오퍼레이터! 지금 저 이상한 적색 소용돌이는 뭐지? 연합의 신병기인가?”
[본 함의 라이브러리 데이터를 조회해 본 결과, 이에 해당하는 병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현재 센서에 감지된 바에 의하면 저건 분명한 영능 반응. 막대한 영자력의 흐름이 바니아스 함대에서 출격한 오버러 개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뭐야? 저게 일개 개인이 다루는 영능이었다고?”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방금 쏟아낸 화력이 대체 어느 정도이던가. 함대 전체에 비한다면 극히 일부라 하더라도, 에메랄드 헤븐에 의해 넘칠 정도로 에너지를 공유 받은 만큼 함대 한둘쯤은 너끈히 쓸어버리고도 남음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그걸 일개 개인이 영능으로 받아냈다고?
“대체 놈의 정체가 뭐야? 어서 알아내!”
[예, 라이브러리 데이터 조회! 찾았습니다. 대조해본 결과 천외오천 급 강자 이진운(유태진으로 개명한지 오래 되지 않아서 타 세력에서는 여전히 이진운으로 기록되어 있음.)으로 판명! 라인트라 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 관리국 소속의 그랜드 급 강자입니다.]
“천외오천 급이라고? 젠장!”
천외오천은 기존의 지구 출신 그랜드 급 강자들을 묶어서 부르는 표현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강함이 일반적인 그랜드 급을 훌쩍 뛰어넘기에 분류한 명칭이기도 했다.
헌데 그들과 정말로 동급이라면 아무리 에메랄드 헤븐의 보조가 있다 하더라도 1개 함대 수준으로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혹시나 했던 일이 결국 현실이 되었다. 제국 함대가 쏘아냈던 포격을 집어삼킨 적색 소용돌이가 품었던 에너지를 한껏 응축한 뒤 역으로 방출해버린 것이다.
쿠아아아!
무시무시한 에너지의 분류가 바니아스 함대를 공격했던 전함들을 피할 새조차 없이 덮쳤다. 고출력 빔 포는 물론 중력파 포까지 일제히 되돌아오는 순간, 제대로 방어할 겨를조차 없었다.
오퍼레이터가 경악에 젖어 외쳤다.
[레··· 렉턴, 라이다스 함대 전멸! 피해 극심합니다.]
“미친 방어만 하는 게 아니라 공격받은 걸 다시 되돌려준다는 거냐?”
두 함대의 전멸 소식에 바르투인 사령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천외오천 급이라고 할 때부터 불길했지만, 이건 상상을 뛰어넘었다.
현재 이곳에 집결한 제국 함대 전체 전력에 비한다면, 두 개 함대의 전멸은 그리 큰 피해라 보기어렵지만 이진운이 보여준 무위가 심상치 않았다.
제아무리 상위의 그랜드 급 강자라 해도 함대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내 되돌려줄 만한 자는 극히 드물었다. 인베이더들이야 죄다 섭리를 벗어난 인외의 존재들인 만큼 보유한 영력의 규모나 출력이 일반적인 그랜드 급보다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저 이진운이란 자는 대체 무슨 수로 저런 말도 안 되는 힘을 발휘한단 말인가.
허나 지금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바니아스 함대를 방어해준 유태진은 본격적으로 공세에 나서고 있었다.
“놈을 막아! 함대 셋을 붙여! 아니 다섯! 마크하라고! 철저히 봉쇄해!”
바르투인 사령관의 다급한 명령에 근처에 있던 함대 여럿이 일제히 움직였다. 그들도 렉턴과 라이다스 함대가 전멸한 상황을 목격한 만큼, 유태진의 위험성을 확실히 인지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무작정 화력을 쏟아내는 공격 대신 유태진을 묶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해 배리어 출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상태로 저출력의 포격을 연사하는 방식으로 공격을 다시 되돌려주는 반격에 대비한 것이다.
게다가 혹시라도 한꺼번에 쓸려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다섯 함대가 뭉쳐 있지 않고 각기 다른 방위에서 공격해오고 있었다.
“제법 재미있는 전술을 쓰는군. 깔짝깔짝 주변을 맴돌면서 날 여기 묶어 두겠다는 건데··· 그게 과연 쉬울까?”
그들은 주포의 힘을 한꺼번에 되돌려준 것을 경계하느라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데, 그게 오히려 전력을 분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휘익!
유태진의 손에 쥐여져 있던 검이 느닷없이 공중으로 날았다. 바로 심어검의 경지에서 펼쳐지는 이기어검이었다.
한 자루에서 시작된 검은 순식간에 그 수를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늘어난 검은 어느새 그를 포위하듯 둘러싼 함대를 역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콰콰콰콰!
피할 새조차 없었다. 심어검은 심검의 또 다른 형태. 마음 가는 곳에 검이 존재하니, 전함들이 제아무리 빠르다 하더라도 이렇게 감각권이 닿는 거리 내에 있는 이상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쏟아져 내리는 무시무시한 검강의 세례 앞에 다섯 함대는 무차별 폭격을 받듯 견뎌야 했다.
[추··· 출력 저하! 배리어를 유지하는 제네레이터에 과부하가!
[피격! 배리어를 뚫고 들어온 고밀도 영자력 탄에 BT-102구역 파괴! 데미지 컨트롤! 해당 구역을 폐쇄하고 정비반을!]
다들 정신이 없었다. 유태진의 공격은 치명적일 정도까지 피해를 주진 않았지만, 상대는 일개 개인이었다. 어지간한 전선 하나는 감당할 수 있는 전력인 함대 다섯이 고작 영능력자 하나에게 몰려 이 꼴이 되다니···.
더 기가 막힌 건 유태진의 공격을 기점으로 공화국의 반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에메랄드 헤븐의 막대한 에너지 공유 때문에 출력 싸움에서 크게 밀렸던 공화국 함대는 유태진이 다수의 함대들을 혼자 감당하면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젠 유태진은 다섯 함대가 아니라 일곱 함대를 상대하게 되었다. 다섯으로도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바르투인 사령관이 곧바로 둘을 더 붙여서였다.
“활약은 이 정도가 적당하겠지.”
하지만 일곱 함대를 홀로 상대하고 있던 유태진도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이 싸움은 공화국의 싸움이고, 연합 소속인 자신이 굳이 죽자고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화국이 패해서 아르센티아 주역에서 밀려나지 않을 정도로만 도울 생각이었다.
‘게다가 힘을 전부 다 소모하기에는 여러 모로 찜찜하단 말이지.’
안 그래도 공화국을 본격적으로 집어삼키겠다고 쳐들어온 제국이었다. 그런 제국의 준비가 고작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 아르센티아 주역까지 밀고 들어온 제국 함대의 전력이 약하다는 건 아니지만, 뭔가 결정적인 것이 부족해 보였다.
‘놈들도 뭔가 감추고 있는 게 있겠지.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여력을 남겨 둬야겠어.’
만유합원신기로 외부의 막대한 기운을 실시간으로 받아들여 소모된 내력을 보충할 수 있는 그였지만, 이걸 다루는 정신적인 근간인 심력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심력 소모로 지치게 되면 자연히 회복되는 방법밖엔 없었다.
덕분에 두 세력간의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함대전에서도 단독으로 나와 활약할 수 있는 유태진이 상당수의 전함들을 감당하게 되면서, 에메랄드 헤븐에 의해 기울었던 전세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이란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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