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55화 (356/448)

15권-05화

뜻밖의 진실을 듣게 된 바람에 충격은 컸지만, 그 덕분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명확해졌다.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오르트 메이슨 사령관은 제국 함대와 싸우는 시늉이나 하면서 소극적으로 대처할 생각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공화국과 제국 간의 싸움. 연합에 소속된 바니아스 함대가 굳이 남의 전쟁에 끼어 큰 손해를 감수해가며 피를 흘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전쟁에 인베이더 놈들이 관련되어 있다면 이야기는 크게 달라진다. 이젠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현재 제국 함대와 공화국의 함대가 서로 대치중인 이곳은 아르센티아 주역.

이곳은 공화국의 중요 요처 중 하나였다. 이곳을 제국에게 빼앗기게 되면 이곳과 지리적으로 이어져 있는 수백 개의 성계가 직접적으로 제국군의 침공에 노출되게 된다.

그렇기에 공화국에서도 필사적으로 아르센티아 주역을 사수할 수밖에 없었다.

수만을 훌쩍 넘는 거대한 전함들의 포진에 드넓은 우주공간이 빼곡히 가득 찬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만큼 양 측이 동원한 함대의 전력이 막대하다는 증거였다.

이들이 보유한 화력이 아르센티아 주역 같은 공백지가 아니라 항성계에서 일제히 전개된다면 아마도 수백 개의 행성이 한순간에 소멸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공화국 함대 사이로 진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정도로 엄청난 수의 전함들이 전투를 위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무려 수백 년 만의 일이었다.

“정말 장관이군.”

“이만한 전력이 맞붙는 전쟁이 벌어지다니.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게 오늘이 될 줄이야.”

“문제는 상대가 우리와 같은 지성체라는 거지.”

“젠장, 제국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인베이더도 아니고 같은 지성체들끼리 싸워서 무슨 이득이 있다는 거야? 제국을 자처하더니 무슨 제국주의 바람이라도 분 건가?”

그들로서는 공화국을 침공한 제국의 행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인베이더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에서 이 무슨 확장주의식 침략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해를 할 수 있든 없든 제국은 이미 본격적으로 침공중인 상황. 이젠 이유를 불문하고 제국군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현 공화국 함대의 총사령관이 된 브라운 하이더는 무거운 표정으로 전면을 응시했다. 본래 준장의 진급이 얼마 남지 않았던 대령의 계급이었지만, 이번 숙청 사태로 군부의 상층부가 대거 갈려 나가면서 졸지에 두 단계나 상승해 소장까지 진급하게 되었다.

하지만 브라운 하이더는 그 사실을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대령에서 소장까지 벼락 진급한 것도 비상식적인데다, 이제 막 소장이 된 자신이 이런 대규모 함대의 총사령관 직위를 맡을 정도면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었으니까.

보통 대규모 함대의 총사령관을 맡는 최소한의 계급이 중장 이상임을 생각하면, 지금 군부에 남아 있는 고위 장성의 씨가 얼마나 말랐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때문에 브라운 하이더는 자신의 양 어깨에 실린 책임이 막중함을 느꼈다. 이 주역에서의 전투 결과가 공화국의 존망을 좌우할 수도 있었다.

“오는군.”

지금까지 잠자코 대기하던 제국의 함대들이 드디어 전진하기 시작했다. 거의 반나절 이상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모양이었다.

브라운 하이더는 명령을 내렸다.

“다들 제네레이터 출력 끌어올리고 주포 예열한다. 특히 선두 열에 있는 전함들은 배리어 출력에 신경 쓰도록.”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까지 대치 상태만 유지하던 제국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한 한수가 준비됐거나 어떤 작전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기에 브라운 하이더는 경각심을 새겼다. 자신은 딱히 뛰어난 군인은 아니었다. 전술이나 작전이 기발한 것도 아니었고, 딱히 영능이 강력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는 항시 방심하지 않았고, 어떤 상황이 닥쳐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기본에 충실하게 대응했다. 그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달랐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그조차도 지금 펼쳐진 광경 앞에선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뭐지 저건!?”

우우우웅!

좀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질량체가 제국 함대의 후면에서 거대한 실루엣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금 막 당도한 게 아니었다. 이미 당도해 있었던 것이 이제야 광범위 광학 스텔스를 풀고 감춰진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 저건!?”

“라인트라 대전에서 나타났었다는 그 소문의···?”

공화국 함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몰라볼 리가 없었다. 연합과 인베이더가 수십 년 만에 맞붙게 된 라인트라 대전은 우주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특히 그때 첫 등장한 인베이더의 신병기는 모두를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미친놈들! 인베이더와 붙어먹고 있다는 걸 아예 대놓고 드러내겠다는 거냐?”

변질된 세계수들의 기능을 이용해 행성 에너지를 아군에게 공유시켜주는 방대한 에너지 전송 항성, 에메랄드 헤븐.

그것이 제국 함대 사이로 오롯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에메랄드 헤븐의 출현과 동시에 급격히 치솟는 막대한 에너지 반응! 제국함대의 모든 출력 규모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브라운 하이더 사령관은 경색된 얼굴로 다급히 외쳤다.

“산개하라! 배리어 출력은 최대로!”

공화국 함대가 빠르게 분열하기 시작했다. 에메랄드 헤븐의 에너지 공유를 통해 출력이 상한치를 훌쩍 넘은 제국 함대의 회력은 상상을 초월할 터.

연합 함대에 적용된 리스티의 신기술인 출력공유시스템 아르마다와 라비린토스 필드라도 있었다면 오히려 밀집하는 게 더 유리했을 테지만, 그런 기술이 전무한 공화국 함대 입장에선 전부 밀집해 있을수록 피해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쿠아아아!

우주 공간을 수놓는 무수한 빛의 화선들이 공화국 함대를 일제히 덮쳐들어왔다. 총사령관의 명에 따라 급히 산개를 실시하고 있었지만, 제국 함대의 공격 타이밍이 그보다 한발 더 빨랐다.

콰아앙! 콰우우!

막대한 화력이 쓸고 지나간 자리 위로 박살난 전함들의 잔해가 떠올랐다. 그것들은 산개하던 도중 제국 함대의 화선 상에 걸려든 공화국 전함들의 것이었다.

초전부터 생각지도 못한 피해를 입게 된 브라운 하이더가 두 눈이 충혈 된 채 외쳤다.

“지금부터 모든 함대는 산개진형을 유지한 상태로 회피기동을 반복하며 전투에 임한다. 에메랄드 헤븐의 보조를 받는 놈들의 화력은 실로 막강하다. 그러니 최대한 화선 상에 들어가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해라!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제대로 된 대책이라 할 수 없었다. 일단 지금처럼 산개한 상태로 싸운다면 적의 무지막지한 주포 공격으로부터의 피해는 최소화 할 수 있겠지만, 전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는 만큼 오히려 각개격파의 수순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까.

그렇지만 방법이 없었다. 에메랄드 헤븐의 보조를 받는 제국 함대의 화력을 감당할 뾰족한 수가 없는 이상, 지금으로선 이것이 최선이었다.

한편 공화국 함대에 가세한 바니아스 함대는 가까스로 화선을 벗어난 상태였다.

라인트라 대전에서 활약했던 유태진이 에메랄드 헤븐의 출현을 눈치 채자마자 오르트 메이슨 사령관을 설득해 함대를 사선 바깥으로 빼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또 에메랄드 헤븐을 보게 될 줄이야.”

유태진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전면을 응시했다. 언젠가 또 상대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제국과의 싸움에서 에메랄드 헤븐과 또 마주하게 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이거··· 생각보다 더 위험천만한 상황이 됐군요.”

비록 다른 전선에서 싸운 터라 라인트라 대전에는 참전하지 못했던 오르트 메이슨이었지만, 그도 에메랄드 헤븐의 위험성에 대해선 비교적 잘 아는 편이었다.

행성 에너지를 공유한다는 개념은 함대의 전력을 거의 두 배 이상 끌어올리는 것과 다름없는데다, 이것이 단지 전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메랄드 헤븐에 영자패턴을 등록만 한다면 영능력자들도 힘의 공유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점들을 죄다 따져봤을 때, 제국 함대의 실질적인 전력은 거의 3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본국에서 지금 상황을 알고 지원 병력을 파견해줬으면 좋겠지만, 때를 맞추긴 어려울 것 같군요.”

오르트 메이슨 사령관의 무거운 그 말에, 유태진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예,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베네트 국장도 이런 상황은 예견 못했을 겁니다. 지금부터 부랴부랴 서둘러 지원병력을 준비한다 해도 제 때에 맞추는 건 쉽지 않겠지요. 그 전에 아르센티아 주역의 전선이 붕괴될 겁니다.”

과연 공화국 함대가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애당초 에메랄드 헤븐이 출현한 이상 공화국이 승리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딱 하나 뿐이다. 공화국의 후방 부대들이 제국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최대한 버티면서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메랄드 헤븐에 대한 아무런 대책조차 되어 있지 않은 공화국 함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유태진이 볼 때, 아마 3일을 버티면 잘 버텼다고 해야 할 듯싶었다. 그만큼 에메랄드 헤븐 하나로 인한 전력 차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가만히 앉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인베이더를 견제하기로 맺은 동맹 중 론데니움 제국은 이미 인베이더와 손을 잡고 배신한 상황. 공화국까지 무너지고 나면 아르탈 행성 연합 단독으로 그들 둘을 감당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어쩔 생각입니까, 유태진 사령관.”

유태진이 느닷없이 무장을 점검하고 채비를 갖추자, 오르트 메이슨 사령관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이래 뵈도 전 그랜드 급의 오버러입니다. 상황이 급박하니 나가서 하는 데까지 해 봐야지요.”

“그거야 나도 알지만··· 저런 상황에서 우주공간으로 나가겠다는 겁니까?”

오르트 메이슨 사령관이 어이없다는 듯 반응할 만도 했다. 지금 아르센티아 주역 일대는 제국 함대가 무지막지하게 뿜어대고 있는 주포의 광선으로 가득 찬 상황이었다.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고작 개인용 무장만 갖춘 채 우주공간으로 나가겠다고 하니, 그의 눈에는 너무 무모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도 유태진이 강하다는 것은 잘 안다. 얼마 전 그토록 강력하던 게리드의 본 드래곤을 단숨에 소멸시키던 광경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규모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수백 개의 성계가 날아갈 수 있는 화력이 오가는 이때, 제아무리 그랜드 급이라 해도 일개 개인의 힘으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든 제 한 몸 건사할 자신은 있습니다. 그러니 메이슨 사령관께서는 최대한 ”

“저저···!?”

그가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유태진은 방금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오르트 메이스사령관으로부터 등을 돌려 메인 브릿지를 나선 유태진은 곧장 해치로 향했다.

‘나라도 저만한 전력을 혼자 감당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치고 빠지는 식으로 싸우면 공화국 함대가 위기로 몰리는 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미 유태진의 경지는 그랜드 급을 넘어 전생 마지막에 도달했던 반신의 경지에 한층 더 가까워져 있었다. 지금이라면 싸우는 방식에 따라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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