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권-04화
“음!?”
빛의 거검이 내리쳐지는 순간, 황제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저건 단순한 내려치기가 아니었다. 그저 막대한 힘을 집중시키면서 베는 거였다면, 마찬가지로 힘으로 맞서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허나 눈앞의 일검에 담긴 이치는 그런 차원을 아득히 넘어섰다.
과거-현재-미래에 존재해야 할 검격이 정확히 같은 지점을 동시에 베는 초시간 참격!
과거를 부감(俯瞰)하고, 현재를 직시하며, 다가올 미래를 명확히 내다볼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결단코 막아낼 수 없는 필살의 검기인 것이다.
하지만 절대의 일검이 황제를 베려던 그 순간, 예상을 벗어난 이변이 벌어졌다.
과거-현재-미래로 구분되던 시간의 경계가 흐트러진 것이다.
그 결과, 일절단천 굉검발도에 균열이 생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각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해야 할 검격이 시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평범한 참격으로 전락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 담긴 막강한 위력은 거대한 산맥이라도 허물 만큼 강력했지만, 단순히 강하기만 한 일격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지 않던가.
콰아아앙!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터져나가면서 대전은 물론 어지간한 거대 수도에 버금가는 규모인 황궁까지 일시에 붕괴되었다. 황제와 아문의 격돌은 재연재해마저 크게 웃돌고 있었다.
“큿!”
아문은 신음을 터뜨리며 튕겨지듯 몸을 날렸다. 설마 자신의 마지막 한수까지 이렇게 통하지 않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심지어 황제는 그걸 받아낸 걸로도 모자라 아문에게 상당한 데미지까지 입혀버렸다. 그 말은 영격에서 비롯된 기본적인 역량부터 황제가 크게 웃돌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시간의 균형을 무너뜨려서 혼돈 그 자체로 만들었어. 섭리를 거스른다는 게 바로 이런 거였나?’
황제가 얻은 역천이란 권능은 아문과 상성적으로 불리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섭리에 간섭해서 결과를 낳는 방식의 모든 힘은 이와 극상성에 해당한다 할 수 있었다.
‘이래선 승산이 없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아문은 곧고 우직한 성품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리석지도 않았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굳이 목숨 던져가면서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필요에 따라선 자신의 목숨마저 얼마든지 내걸 각오가 되어 있긴 하지만, 황제는 물론 그 옆에 게리드까지 있는 상황에서 죽자고 싸워봐야 아무 의미 없는 개죽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뭣!? 지금 짐 앞에서 도망치는 게냐?”
황제가 살짝 당황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 격돌로 생겨난 반동의 힘을 이용해 간격을 확보하는 거라 생각했지, 설마 그게 도주하는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문은 무패의 기사. 수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다고 알려진 만큼 그가 목숨이 위험하다고 도주한다는 건 전혀 상상도 못했었다.
“이놈!”
황제가 노기어린 기세로 아문의 도주를 저지하려 했지만, 상대도 똑같은 반신 급의 초월자다. 정면 대결에서는 권능과 힘의 상성적 우위로 승세를 가져갔다 하나, 작정하고 도주하는 아문을 붙잡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황제가 위험하면 나설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던 게리드도 아문의 도주라는 초유의 사태에는 미처 손쓸 겨를조차 없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아문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황제가 으르렁대듯 외쳤다.
“놈을 잡아라!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데미지를 입었다 하더라도 아문은 반신급 초월자. 그의 도주를 일정 시간이나마 저지하려면 적어도 그랜드 급은 되어야 하는데, 그런 실력자가 흔하게 널려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아문을 붙잡는 일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게리드는 주변에 함대를 풀어 주변의 우주공간까지 수색했지만 별다른 결과는 얻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반신 급 초월자는 우주와 같은 환경에서도 얼마든지 맨몸으로 활동할 수 있을뿐더러, 먹고 마시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므로 먼 거리의 우주를 이동하는 일조차 가능했다.
아직까지 찾지 못한 걸 보면 아문은 이미 제국의 수도행성인 론데니움크라스를 인근 주역에서 까마득히 멀어진 게 틀림없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아무래도 놓친 듯싶습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는 게리드의 모습에 황제는 노기를 삼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문 정도 되는 자가 작정하고 도망치면 잡을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나.”
애당초 아문을 군부에서 실각시키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그가 도망친 이상 더는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제는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지금 상태는 나쁘지 않군.”
황제는 자신의 전신을 가득 채운 무궁무진한 힘을 체감하면서 충만감에 빠져들었다. 윌키아 여신의 권능을 빌려 쓸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다른 종류의 충만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첫 의식으로 반신의 격을 획득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폐하.]
“그래, 이제 시한부 인생은 간신히 벗어난 셈이지.”
반신이 된 이상 수명의 한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정도로 만족하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남은 의식까지 치르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궁금하군.”
황제는 그 누구보다도 큰 욕망을 갖고 있었다. 단순히 제국의 지배자가 아니라 전 우주를 통일한 절대제국의 지배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더 강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했다. 고작 반신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초월적인 존재로!
‘그리고 그 끝에는 인베이더들이 짐의 마지막 대적이 되겠지.’
우주를 완전히 통일하기 위해선 인베이더들도 배제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은 일정 부분 뜻이 맞아 손을 잡고 있긴 하지만, 놈들도 결국 적이 될 것이다. 애당초 인베이더의 목적이 지성체의 멸망에 있는 한, 영원히 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을 테니까.
“게리드, 원정군에게 서두르라고 전달해라. 전선을 확대하고 목표한 영역까지 빠르게 점령하라고. 필요한 지원은 얼마든지 해 주지.”
[알겠습니다.]
의식을 치르기 위해선 점령지가 필요했다. 그것도 아무 성계나 필요한 게 아니라 특정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성계들을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공화국을 침공하는 강수까지 두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짐이 직접 친정을 나갈 것이다. 그때까지 성과를 보이라고 해라.”
[예.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리드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황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머지않았다. 오랜 기다림이 결실을 맺을 때가···.”
그는 자신이 절대적인 존재로 거듭나는 그때를 상상하면서 다 부서진 황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옥좌에 몸을 기댔다.
* * *
남은 힘을 쥐어짜 론데니움크라스의 대기권을 벗어난 아문은 최대한 그곳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우주공간을 가로질렀다.
수도를 방위하기 위해 대기하던 전함들이 수색하기 위해 사방으로 전개하는 광경을 목격했지만, 그를 잡을 순 없었다.
어느 정도 멀어진 뒤에야 추격권을 벗어났음을 확신하게 된 아문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황제가 돌아선 이상 제국에 남아 있는 건 위험했다.
“이렇게 된 이상 공화국으로 도망칠 수밖에.”
현재 상황을 보면 연합이 자신을 받아줄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그보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그를 가로막았다.
그건 바로 이곳에서 연합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아문이 우주공간을 맨몸으로 비행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는 전함이 아니다. 워프 항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한 물리적인 수천수만 광년의 거리를 단순히 날아서 이동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나마 중간에 몇 번 경유지를 거치면서 어떻게든 함선을 구해 이동한다면 공화국 정도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휴우··· 완전 회복되려면 적어도 보름은 걸리겠군.”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달리 아문의 모습에서는 조금도 부상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신은 더 이상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엔 일반적인 사람과 다를 바 없어 보여도, 영과 혼이 온전한 사람의 형태를 갖춘 게 바로 반신인 것이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큰 부상을 입는다 해도 겉으로 드러나는 외상은 보이지 않는다. 설령 팔다리가 잘리고 심장이 부서진다 하더라도 복원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타격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 부상을 입을수록 눈에 드러나지 않는 데미지가 내부에 차곡차곡 누적될 뿐이었다.
지금 아문의 상태도 그러했다. 겉보기엔 멀쩡한 것 같아도, 그 영혼에 가해진 타격은 적지 않은 편이었다.
일반적인 부상이었다면 회복도 쉬웠겠지만, 이건 황제의 권능과 신격에 의해 입은 데미지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지 않는 이상 곧바로 회복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황제의 추격부대와 마주친다고 해서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럴수록 회복은 더욱 더뎌질 것이다.
“부딪치는 걸 최대한 피해야겠어.”
아문은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우주공간을 다시 비행하기 시작했다.
* * *
“미친놈들. 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한 거지?”
바니아스 함대의 함장인 오르트 메이슨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제국 함대들의 모습에 기가 막혀 혀를 내둘렀다.
제국이 공화국을 침공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관리국 본국에서는 바니아스 함대에게 특명을 하달했다. 공화국을 도와 제국의 침공을 저지하라는 명이었다. 그리고 천외오천에 버금간다는 강자 유태진도 바니아스 함대에 합류했다.
하지만 사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각 주역의 요처를 지키던 공화국의 요새나 병력들은 이미 제국 함대에 의해 점령되거나 박살난 상태.
공화국이 서둘러 파견한 함대들이 침공을 막기 위한 저지선을 구축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각 요처들을 점령당한 상황에선 여러모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국이 이번 침공에 동원한 병력의 규모가 심상치 않았다. 관리국에서 내린 추정대로라면 적어도 제국 전체가 보유한 병력의 1/3은 될 듯싶었다.
이게 얼마나 막대한 규모냐 하면··· 연합이 라인트라 대전에 파견한 함대 규모의 거의 3배치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현재 제국의 차지하고 있는 세력권이 얼마나 크고 거대한지를 생각해보면, 이건 가히 쥐어짤 수 있는 만큼 쥐어짠 병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건 즉 세력권을 방어할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력을 동원한 셈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요, 제국 놈들은···. 인베이더란 공공의 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런 대규모 침략전쟁이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오르트 메이슨의 그 말에, 유태진은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해 주었다.
“소식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제국의 침공에는 인베이더들도 관련되어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렇게 제국이 맘 놓고 침공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예? 제국이 인베이더와 말입니까? 그게 정말이오?”
“예, 사실입니다. 얼마 전 치렀던 자원행성 작전도 바로 그러한 첩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였지요. 그때는 단지 인베이더와 손잡은 어떤 세력이 있다는 추측성 근거에 불과했지만, 이번 사태로 그 세력이 제국임이 확실시 되었군요.”
“허 참.”
오르트 메이슨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자원행성을 기습적으로 쳐서 점령해야 한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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