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53화 (354/448)

15권-03화

아문은 이를 악물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황제와는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히 초월적이라 할 만한 기세를 두룬 황제가 서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문, 네가 짐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 옳은 길을 가셨다면 제 충성을 다 바쳤겠지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도리를 저버리셨습니다.”

“그래, 옳은 길은 아니지. 하지만 짐에겐 이길 밖에 없었다.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고, 몸은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져 이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뼈마디가 쑤시지. 죽음이 머지않음을 몸서리치게 느끼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라니···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주의 섭리입니다. 달도 차면 기울고, 한번 태어나면 언젠가 죽기 마련인 법. 어찌 정해진 섭리를 거스르려 하십니까?”

아문은 진심으로 호소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황제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는 살짝 일그러진 얼굴로 노기를 드러냈다.

그건 상대를 향한 질시와 증오였다.

“그래, 아문, 그대는 이런 짐의 심정을 잘 모를 테지. 아암, 그럴 수밖에 없을 게야. 반신에 다다른 이상 앞으로 영원한 삶이 보장되어 있으니 말이야.”

“폐하!”

“하지만 짐은 다르다! 제국의 황족으로 태어나 황제가 되었고 온갖 부귀영화와 더불어 신의 권능까지 손에 넣었지.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황제에게 주어지는 신의 권능? 제아무리 대단해도 노화 하나 막아주지 못하는 신의 권능 따윈 아무런 쓸모도 없지. 심지어 짐의 자의로 사용할 수도 없는, 여신 윌키아에게 기생하듯 빌려다 쓰는 힘이 아니더냐.”

쿠르르릉!

황제의 기세가 한층 더 광폭해졌다. 이젠 이 일대 주변이 날아가지 않을까 우려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필요 없다. 이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짐의 손으로 진정한 신위를 움켜쥘 것이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검으로 막대한 흐름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히 영력의 규모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저 섭리까지 간섭하는 초월의 영역에 걸친 힘이었다.

‘사상기!? 아니, 일반적인 수준의 사상기가 아니야. 폐하를 중심으로 인과의 흐름이 어긋나고 있어.’

선후가 뒤바뀌고, 과정과 결과라는 정해진 순리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 일대에 작용하고 있는 대기의 흐름이나 자연적인 현상에만 영향을 미치고 있는 터라 딱히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았지만, 반신의 격에 도달한 아문에게는 너무나도 똑똑히 느껴졌다.

“아문, 그대가 짐을 따를 생각이 없다면 이 자리에서 끝을 맺도록 해 주지. 제국이 아니라 짐에게 충성했다면 좋았을 것을···.”

아쉬워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 어투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담겨있지 않았다. 애당초 황제는 아문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에 맞서 아문도 자신의 전력을 끌어올렸다. 대체 무슨 금단의 의식을 치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알카데인 황제는 제대로 된 초월자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수준이 과연 어떠할지는 아직 미지수인 만큼, 방심은 절대 금물이었다.

“자, 그럼 오랜 고신(古臣)이여. 사라지게나!”

황제의 검이 크게 휘둘러지는 순간, 시공간이 이지러지면서 그 안에 든 모든 것이 소멸되었다.

예전 라인트라 주역에서 에메랄드 헤븐을 쪼갰을 때와 비교한다면 많이 부족한 편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신 윌키아의 신위를 빌려 썼기 때문이었다.

허나 지금은 알카데인 황제 스스로 이만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큭! 이건!?’

간신히 몸을 빼서 공격 범위를 이탈한 아문의 눈매가 기이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대체 황제가 무슨 힘을 다루는 건지 파악이 되질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물만 보면 공간에 간섭하는 종류의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이 몇 번 경험해본 적 있는 공간계통의 사상기들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쿵!

내딛는 일보와 함께 아문의 신형이 한 줄기 섬광처럼 뻗어나갔다. 이미 광속을 넘어선 그의 움직임은 눈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 즉시 반응했다. 제한적이긴 해도 인(因)과 과(果)에 간섭할 수 있게 된 그에게 있어 더 이상 물리적인 속도의 개념은 그를 곤란하게 만들 수 없었다.

쾅! 콰아아앙!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그 충격으로 온 사방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그나마 황궁이 부서지는 정도로 그친 것은 두 사람이 여파로 인한 피해를 최대한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중검의 일격을 받아낸 황제의 모습에 아문의 안색이 급변했다.

‘온 힘을 쥐어짠 건 아니라지만, 나름 진심으로 휘두른 내 일검을!?’

황제는 딱히 영능을 갈고닦은 자가 아니었다. 역대 황제들처럼 여신 윌키아로부터 부여받은 권능을 다뤘을 뿐, 본인 스스로 뭔가를 익히진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은 대체 뭔가? 차라리 어떤 특정 영능이나 권능으로 검을 방어했다면 조금이라도 납득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황제는 분명 제대로 된 검술을 사용해 자신의 일검을 맞받아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과 달리, 그의 몸은 즉각 다음 수를 진행해 나갔다.

익스큐터 류.

사절뢰인광(絲折雷刃光).

한 자루 검에서 비롯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셀 수 없는 섬광의 궤적이 공간을 저며 나갔다.

그냥 쾌검에 의한 착시흔적이 아니었다. 아문은 일정 범위의 시간 자체를 점유함으로서, 황제가 결코 피할 수 없는 검기(劍技)의 뇌옥을 만들어낸 것이다.

불과 몇 초에 남짓한 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을 동시에 장악한 그의 검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기이한 뒤틀림의 조짐이 아문의 눈에 포착되었다.

‘시간이··· 뒤틀려!?’

끄그그긋!

미래는 과거가 됐고, 과거는 현재가 되었으며, 현재는 과거가 되었다. 그야말로 아문의 전개한 검기의 모든 것이 제멋대로 뒤틀리면서 완전히 붕괴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검이 그 뒤틀린 흐름을 비집고 들어오면서 매섭게 뻗어왔다. 그건 빠르지도 않았고, 무겁지도 않았지만 그 무엇보다 더 치명적으로 닿아오고 있었다.

콰아앙!

아문은 간신히 황제의 일격을 받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조금이라도 대응이 늦었으면 치명상을 입을 뻔했다.

‘이번에도 또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대체 폐하는 무슨 힘을 손에 넣은 거지?’

황제의 검을 방어하던 그 순간, 아문은 황제의 시간을 정체시키려 했지만 그것이 의도와 전혀 다른 형태로 돌아왔다. 정체되려던 흐름이 갑자기 뒤틀리더니 오히려 가속해 오는 것이 아닌가?

오랜 실전 경험 덕분에 어떻게든 간신히 막긴 했지만, 황제가 이런 저력을 보여준 다는 사실이 충격적인 건 변함없었다.

몇 걸음 물러선 아문은 침중한 얼굴로 입을 뗐다.

“···정말 놀랍군요. 어떤 능력인지 짐작도 안 됩니다. 제가 다루는 시간을 어긋나게 하다니.”

황제의 사상기가 시간 간섭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뭔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시간에 직접 간섭한다기보다는, 어떤 비정상적인 형태로 흐름을 꼬아버린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문으로선 이걸 뭐라 정의해야 할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의문에 대해 황제가 입을 열었다.

“놀랄 것 없네. 짐이 다루고 있는 이건 순리를 비틀어내는 역천(逆天)이라는 것이지!”

“역천?”

“아무래도 이 사상의 힘이라는 건 개인의 성향이나 생각에 따라 좌우되는 모양이야. 자네를 상대로 처음 써 봤는데 생각보다 꽤 쓸 만하더군.”

“······.”

저도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진 아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외도의 방법으로 초월자가 된 것도 모자라 저런 강력한 힘을 깨우치게 되다니.

그만큼 황제가 얻은 역천의 권능은 활용하기에 따라선 가히 무궁무진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아문을 압박해오고 있는 현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짐의 검술 솜씨에 조금 당황한 모양인데. 그동안 윌키아 여신의 힘을 다룬 지도 무려 100년을 훨씬 넘었네. 그 정도면 짐이 영능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더라도 깨우친 바가 아주 없을 리가 없지.”

휘익!

황제는 그렇게 말하면서 가볍게 검을 털듯 휘둘렀다. 동작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오랫동안 검을 수련해온 대가의 풍모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지금 짐의 수준은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아마도 마이스터 정도는 되겠군. 아직 그대를 따라가려면 멀었지만, 역천의 힘과 적절하게 섞어 쓰면 그럭저럭 검을 맞댈 만은 할 게야.”

우우웅!

황제가 쥔 검 끝으로부터 응집된 기운이 치솟는다. 그것은 영력을 응축시켜서 가히 물질화 단계까지 완성한 크리스털 오러(명옥강기)였다.

물론 검에 대한 황제의 깨달음은 마이스터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지만, 그가 이룬 반신의 격은 그마저도 한 차원 끌어올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지.”

그때부터 황제의 무지막지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독자적인 신성을 획득한 황제는 생각 이상으로 난적이었다. 문외한일 줄 알았던 검술도 마이스터 급으로 터득한 데다, 그동안 여신의 권능을 다루면서 체득된 경험들이 한수 한수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던 것이다.

아문은 내심 기가 막혔다.

‘믿을 수가 없구나. 그런 비인외도의 의식을 치른 것만으로 이런 격을 얻을 수 있다고?’

제대로 된 신들 간에도 급이 있는 것처럼, 같은 반신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격차는 존재한다. 놀랍게도 알카데인 황제의 격은 수백 년 이상 고련을 해온 아문보다 훨씬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아문이 이렇게 팽팽하게 맞설 수 있는 건, 황제가 아직 경험이 적고 이런 식의 전투에 능숙하지 못해서일 뿐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황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황제는 싸우면 싸울수록 자신의 힘을 활용하는 데에 점점 능숙해지고 있었다.

‘시간을 끌수록 오히려 내가 불리해진다. 단숨에 승부수를 내야 해!’

결연한 각오를 다진 아문의 기세가 일변하기 시작했다. 그를 중심으로 이 일대의 방대한 영력의 흐름이 급속도로 집중되고 있었다.

고오오오!

아문의 의도를 알아챈 황제가 피식 웃었다.

“이번 한 수에 승부를 보겠다는 건가? 뭐, 그것도 나쁘지 않군.”

말은 그렇게 했어도 황제는 아문을 경시하지 않았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제국의 절대자로 자리매김해온 아문이었다.

그가 오늘날까지 쌓아온 업의 무게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웠다.

헌데 지금 그것이 단 일로의 검격에 고스란히 담겨지고 있었다.

기이이이이!

충만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영력이 극한까지 응집되면서 빛의 거검으로 화한 아문의 일검이 기이한 이명과 함께 수직으로 내리그어졌다.

어찌나 장엄하고 강렬하던지, 그의 일검에 마치 세상이 둘로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익스큐터 류.

극의. 일절단천(一切斷天) 굉검발도(宏劍拔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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