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51화 (352/448)

15권-01화

우라그리 행성요새를 점령한 론데니움 제국의 함대는 파죽지세로 공화국의 영역을 점령해 나갔다. 제아무리 공화국의 군부가 오랜 평화로 나태해졌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쉽게 침입을 허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규모 숙청에 이은 개혁과, 할파스 상회가 유출한 귀환 코드로 국경지대 최전방의 방어선인 우라그리 행성요새가 허무하게 점령당하는 사태가 겹치면서 그 후방지역들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이토록 무력하게 점령당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전해지면서 베이노아 정부도 비상이 걸렸다. 부패한 자들을 쳐낸 건 좋은데 그 공백이 설마 이런 결과를 낳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게다가 우라그리 행성요새를 저항 한번 못해보고 함락하게 만든 귀환 코드라는 존재가 뒤늦게 밝혀지면서 그 충격은 더욱 커졌다.

“황당하군. 그런 기밀코드가 존재했는데도, 아는 자가 군부에 아무도 없었다고?”

“예, 그나마 아는 자들은 테트라에 소속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 대부분은 죽거나 교도소로 가 있으니 대처할 자가 없었던 거지요.”

“기가 막힐 일이로군. 그리고 그 기밀코드는 어떻게 제국군이 알고 있는 거지? 군부에서도 최고위급만 아는 정보가 어떻게?”

“팔아먹었다더군요.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습니다. 테트라에서 할파스 상회에 넘긴 기밀 중에 귀환 코드에 대한 것이 섞여 있었는데, 이번에 할파스 상회에서 그걸 제국에 팔아먹은 모양입니다.”

“그 돈밖에 모르는 악덕상인 놈들이···.”

보좌관의 보고에 베이노아 수상은 침음을 삼켰다.

‘애당초 이럴 작정이었나?’

공화국 내에 존재하던 할파스 상회의 각 지부들이 쿠데타가 발생하기 직전에 소리소문 없이 철수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놈들은 확신하고 있었던 거다. 쿠데타가 불발로 끝나게 될 것이란 사실을. 그래서 놈들의 쿠데타 모의에도 동참하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오래 전부터 제국과 내통해 온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응징해야 마땅할 할파스 상회는 이미 공화국에서 깨끗이 철수한 상황이고, 제국의 함대는 계속 진격 중이다.

어디 숨었는지 알 길이 없는 할파스 상회보다는 제국군을 저지하는 게 우선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공화국의 전력을 최대한 집중시킨다. 어떻게든 제국함대의 진격을 저지해야 해.”

“···총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최근 테트라가 숙청된 이후 그 빈자리를 차지하게 된 신군부의 인물들이 베이노아 수상 앞에 굳은 결의를 담아 대답했다.

하지만 베이노아 수상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연합에도 지원을 요청하는 게 좋겠소.”

“으음···.”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연합은 공화국의 동맹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베이더를 공동의 적으로 상정해 둔 동맹이었다. 같은 동맹의 한 축이었던 제국의 침공에 대해서도 과연 도움을 줄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베이노아 수상은 뜻밖에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도와줄 걸세. 이번 제국의 침공에 인베이더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음을 확인했으니까.”

* * *

자원행성의 장악이 끝난 뒤 할파스 상회 지부에 남겨진 온갖 장부와 데이터들을 분석한 유태진은 여러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군. 리겔이 속한 세력은 할파스 상회와 오래 전부터 거래를 해왔나?”

장부 내역에는 리겔과 할파스 상회가 노예를 꾸준히 거래해온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리겔이 태어나기 까마득히 오래 전부터 거래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즉 이런 일이 요 몇 년 사이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연합도 그렇지만 공화국 내에도 이들과 손잡은 자들이 있었군.’

리겔이 현재 몸담고 있는, 인베이더에게 적극 협력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정체불명의 세력.

이 장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 뿌리는 꽤 오래된 듯싶었다. 게다가 공화국이나 연합 내에도 꽤 깊이 뿌리를 내린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기가 막혔다.

“노예들을 꾸준히 공급해준 건 물론 최근에는 인베이더에게 침공당한 행성에서 납치된 엘프 아종들을 중간에서 인계하주는 거래까지 하고 있었나?”

하지만 이 많은 노예와 엘프 아종들로 대체 뭘 어찌했냐는 것이다.

‘분명 그때 제물이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그동안 얻은 몇 가지 단서들이 조합되자 대충 감이 잡혔다. 아이틀란 행성에서 비밀 시설을 발견했을 땐 단순히 인체실험 정도로 여겼지만, 그보다 더 복잡한 내막이 숨겨진 듯 보였다.

‘놈들도 그냥 한 말은 아닐 게야. 그렇다면 정말로 그 많은 생명을 제물로?’

중원무림에서도 사교단체 놈들을 보면 사람을 인신공양이나 어떤 대법에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 우주에는 마법이나 각종 영능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정말로 살아있는 지성체를 제물로 삼아 뭔가를 시도하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런데 인베이더에 협력하는 이 자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인베이더의 휘하 세력이거나 수하라고 보기엔 뭔가 행동방식이 이상했다. 리겔이야 세상에 대한 복수심과 원망 때문에 인베이더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다른 자들은 대체 무슨 이득이 있어서 인베이더 밑에서 일한단 말인가.

놈들에게 지성체는 전부 죽여 없애야 할 것들이고, 결국 그 대상에는 그들 자신들도 포함될 것이 뻔했다.

‘리겔의 상태를 보면 딱히 세뇌되어서 따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 ’

그렇다면 인베이더에게 협력하는 자들은 지성체의 멸망이라는 목적에 감화되어 적극 따른다기보다는, 자신들만이 이득을 위해 협력하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헌데 그때, 깊게 숨겨져 있던 자료들 중에서 엄중하게 봉인된 것이 유태진의 눈에 띄었다. 뭔가 중요한 것이 들어 있을 거라 직감한 그는 며칠간 씨름한 끝에 무려 수십 겹의 암호화 프로텍트로 보호되고 있는 데이터 파일을 풀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두 눈으로 확인한 유태진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이모탈 프로젝트?”

그것은 어떤 기밀 프로젝트의 개요였다. 원리나 방법 같은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 개요만으로도 이것이 무엇을 위한 프로젝트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이모탈 프로젝트는 일개 필멸자를 단숨에 초월자로 만들기 위한 비밀계획이었다.

허나 필멸자를 스스로의 노력이나 깨달음 없이 초월자로 거듭나게 만든다는 건 가히 비상식적인 일. 그만큼 여러 가지 외도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수많은 지성체들을 제물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우주의 수많은 성계들을 이용해 거대한 의례법진을 구축하여 의식을 치르는 것이었다.

“···미쳤군. 정말로 미친 것들이었어.”

유태진은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아 붙였다. 대체 누가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한 건진 모르겠지만, 이를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을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최소한 수십 년 이상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아마도 족히 수십억 단위는 희생되었을 게 분명했다. 심지어 이 프로젝트는 끝난 것도 아니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스스로 노력도 하지 않고 다른 자들을 제물로 희생시켜 초월에 닿으려 하다니.’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경멸스러운 자였다. 그런 더러운 방식으로 완성에 닿는다고 해서 과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게 정녕 사실이라면··· 적어도 인베이더들의 소행은 아니야. 신좌들이 존재하는 인베이더들이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할 이유가 없지.’

물론 인베이더와 손잡고 여러 가지 일들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건 인베이더와 뜻이 맞는 부분에 대해서만 협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인베이더 측의 입장에서는 3대 세력 내부에서 분란이 발생하는 일이니 오히려 잘됐다고 이들에게 손을 보탠 것일 가능성이 컸다.

‘이만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우주적인 규모로 저지를 수 있는 세력이라면 절대 만만한 곳은 아니겠지. 심지어 할파스 상회까지 알아서 기면서 적극 협조할 정도라면 적어도 3대 세력 급이라는 건데···.’

가장 먼저 연합을 제외했다. 그곳에는 빛과 생명의 여신 루네리아가 존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아는 관리국은 이런 프로젝트를 용납할 리가 없었다.

공화국도 생각해 봤지만, 공화국도 용의 대상은 아니었다. 공화국의 3대 오물 중 테트라와 콜베라는 이미 전부 쓸려나갔고, 그들의 역량으론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심지어 할파스 상회는 같은 편인 줄 알았던 그들마저 배신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 대상은 제국이지.”

3대 세력 중 가장 폐쇄적인 곳이자, 황제의 강력한 힘 아래 통치되고 있는 우주의 세력.

시대가 이런데도 제국의 기본 체제는 거의 봉건주의에 가까웠다. 물론 중세 시대마냥 농노가 존재하고 평민들이 비참한 생활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계급주의 사회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수많은 사상과 문명이 발전하기 시작한 우주세기에 봉건주의나 계급주의가 웬 말이냐고 하겠지만, 이것이 가능한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가 가진 막강한 힘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새벽의 여신 윌키아의 권능을 대행할 수 있는 제국의 황제는 가히 무소불위의 존재였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용의 가능성이 커지지.’

하지만 황제는 신의 권능을 대행할 수 있다 해도, 그가 진짜 신인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과 다름없이 수명이 다되면 늙어 죽게 되는 것은 물론, 다루는 권능에도 여러 제약이 존재했으니까.

신의 힘을 가졌지만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고, 심지어 언젠가는 평범한 인간처럼 늙어 죽어야 하는 제한된 수명을 가진 필멸자.

그런 자라면 이런 정신 나간 프로젝트를 생각해 볼 법도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추론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태진은 베이노아 수상으로부터 충격적인 급보를 전해 받을 수 있었다.

“제국이 말입니까?”

[그렇네. 제국이 현재 우라그리 행성요새를 점령한 뒤 파죽지세로 공화국의 영역을 점령해오고 있지. 완전히 허를 찔렸어.]

그리고 그들의 침략을 쉽게 허용하게 된 계기는 바로 할파스 배신행위로 비롯되었다는 사실마저 듣게 된 유태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정말 철두철미하군. 설마 했는데 정말로 용의자가 제국의 황제였나?’

그렇지 않고선 지금 이 시점에서 제국군이 공화국을 대대적으로 침공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침략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추진해온 그 이모탈 프로젝트가 완성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유태진은 그 자리에서 베이노아 수상에게 자신이 찾아낸 이모탈 프로젝트의 전모를 알렸다. 그러자 그가 크게 경악하며 외쳤다.

[그런 미친! 정말인가?]

“어디까지나 정황에 따른 추측이지만 아마 확실할 겁니다. 정황적으로 모든 게 들어맞고 있지 않습니까.”

유태진의 말 대로였다. 돌아가는 모든 상황과 그가 내놓은 추측이 정확히 맞물리고 있었다. 베이노아 수상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알카데인 황제도 제정신이 아니군.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지금까지 그런 악독한 짓을 암중에서 저질러 왔다니. 그럼 더더욱 막아내야겠군. 놈이 우리 공화국을 침범한 것도 그 의식이란 걸 치르기 위해 행성들을 점령하기 위한 것일 테니 말이야.]

“아마도 그렇겠지요. 이렇게 다수의 성계들을 매개로 삼을 만큼 터무니없는 규모의 의례법진은 지금껏 들어 본 바가 없지만, 황제가 이렇게 목을 매는 걸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그렇겠지. 적어도 수십 년, 어쩌면 그 이상의 세월을 인내하면서 이때를 기다려온 자야. 그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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