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24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할파스 무레미안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참으로 심모원려한 자로군, 수상은. 오직 이 날을 위해 무려 백수십 년 가까이 인내해 왔다니 말이야.”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비서실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그렇습니다. 그토록 오래 참아온 인내력도 놀랍지만 이렇게 망설이지 않고 과감하게 들이친 것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돕니다. 아마 저희도 미리 알아채지 못했다면 피해가 꽤 컸을 겁니다.”
“그래도 손실이 적지 않아. 자원행성지부에서 본 손실에, 사업체들을 정리하면서 입은 손실까지 포함하면 내 속이 다 쓰릴 지경이야.”
“하지만 이번 손실은 곧 보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애당초 베이나스 수상과 레이스컬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힘을 키우고 있음은 인지하고 있었다. 워낙 깊게 감춰놔서 할파스 상회로서도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공화국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준비해 두었고, 그 중 하나가 실제로 벌어지면서 대비책을 발동시켰다. 그것이 각 지부와 사업체들의 은밀한 철수였다.
물론 그 때문에 본 손실이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공화국 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할파스 상회였다. 그들이 쌓은 부는 이 정도 손실로는 별반 티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한 대책도 이미 마련해둔 상황이었다. 아니, 이건 할파스 상회가 자체적으로 마련한 대책이라기보다는, 오래 전부터 세워진 누군가의 계획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딱히 시기를 정해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사태의 돌아가는 흐름이 계획의 목적과 잘 맞물릴 것 같았다.
“그럼 제국에 연락을 해두게. 이제 겨우 때가 되었어.”
“뭐라 전할까요?”
비서실장의 물음에 할파스 무레미안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문은 열어 두었다고 하면 알 거야.”
“알겠습니다.”
짧은 대답을 끝으로 비서실장은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할파스 무레미안은 다시 홀로그램 스크린의 뉴스영상을 응시하면서 슬며시 조소를 지어보였다.
“지금은 다들 혁명의 단꿈에 취해 있겠지만, 조만간 악몽을 보게 되겠지. 그때도 과연 너희들이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 * *
위장잠입부대 스펙터의 활약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쿠데타의 핵심 주역들을 암살하면서도 실패한 건수는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레이스컬은 그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다.
“작전은 성공적입니다! 명단에 오른 쿠데타 주역들을 100% 제거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기별이 당도했습니다.”
“흐음, 그야 당연한 결과지.”
기뻐하는 자들과 달리 베이노아 수상은 담담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위장잠입부대는 그들이 수십 년 동안 몰래 함대를 육성하는 데에 쏟은 투자와 노력만큼이나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었다.
정석적인 방법으로는 할파스 상회를 비롯한 3대 세력을 정리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조직된 위장잠입부대 스펙터.
하지만 그런 목적을 가진 조직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제아무리 신념과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자라 하더라도 무려 수십 년 이상 위장 신분으로 자기 자신을 감추며 살아간다는 게 어디 쉬울 수 있겠는가.
사람이 품는 신념과 정의감이라는 건 결국 소모적인 것이다. 물론 그것이 평생을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는 한정되기 마련이었다. 젊었을 적에 혈기로 기득권층을 비난하며 정의를 부르짖었던 자가, 후에 권력을 잡으면서 타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래서 베이노아 수상은 발상을 전환하였다.
공화국에 대한 신념과 정의감으로 무장한 자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목표 대상과 씻을 수 없는 원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을 스펙터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결과는 예상했던 이상으로 탁월했다. 원수에 대한 복수심은 제아무리 고된 훈련 속에서도 견딜 수 있게 해주었으며, 그 이상의 어려움도 감내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스펙터 대원들은 상대가 누구든 살해할 수 있는 실력을 갖게 될 수 있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선 대상이 정면대결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대단한 영능력자일 때도 있었지만, 그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절대 살기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사무친 원한 때문에 분노를 드러나는 상황에서도 살기 한 점 묻어나오지 않을 정도니, 그들이 훈련을 통해 얼마나 철저히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스펙터 대원들은 현장에 투입되었다. 빈틈없는 위장신분은 물론 원수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전신을 성형하기까지 한 그들은 완벽한 새사람이 되었다.
그 이후 수십 년을 매일같이 원수의 얼굴을 마주보며 살아왔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이가 갈릴 만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들은 들끓는 원한을 웃는 얼굴로 참아냈다. 언젠가 찾아올 때를 기다리면서 수십 년이란 세월을 위장 신분으로 버틴 것이다. 그들이 평범하게 정의감을 앞세운 자였다면, 처음의 신념을 잊고 적들에게 감화되어 진작 타락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도래했다. 그들은 수십 년 간 쌓아온 울분과 원한을 단숨에 폭발시켰다.
그들이 그 긴 세월동안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게 무엇이었던가. 바로 원수를 확실하게 죽일 방법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연구 끝에 만들어진 살해 방법은 그들을 실패 없이 살해할 수 있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것이 바로 이번 숙청을 100% 성공할 수 있게 해준 비결이었다.
물론 이런 음험하고 과격한 숙청 방식은 평소였다면 정치적인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이었다.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피치 못하게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명분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게다가 공화국의 악명 높은 3대 오물들이 그동안 저지른 실책과 부정부패가 한두 가지였던가? 오죽하면 공화국 시민이라면 어느 누구든 그들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보지 않은 자가 없다는 말까지 다 나오겠는가.
때문에 그들이 숙청되었다는 말이 나왔어도 그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자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간혹 나오는 비판들도 그들을 성급히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서 심판대에 올렸어야 했다는 정도였다.
게다가 시민들이 숙청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그동안 3대 오물들이 독차지하고 있던 사업이나 이권 부분들을 민간 부문 쪽으로 과감히 할양한 것이다.
물론 그냥 무턱대고 할양한 건 아니었다. 예전처럼 특정 대상들이 독차지하게 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도록 자격 있는 자들에게 골고루 공개적으로 분배해 주었다.
덕분에 할파스 상회가 사라지면서 그동안 얼어붙었던 시장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예전에는 관행처럼 자리했던 리베이트나 각종 부정부패가 사라지면서 오히려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잠시 실추되었던 경제가 다시 제자리를 회복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정리해야 할 것들이 더 남아 있지.”
기존의 3대 세력의 수뇌부들은 숙청으로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들이 키우거나 관료로 임명시킨 자들이 사회 각 계층에 여전히 존재했다.
베이노아 수상은 그들을 과감히 쳐내고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시켰다. 그리고 낙하산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도록 대중들 앞에서 철저히 검증까지 시켰다.
그러자 현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와 지지가 최고조로 치솟았다. 그런 공화국의 변화의 과정들을 지켜 본 사람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살다 보니 이런 세상이 다 오네.”
“공화국이 정말로 많이 변하긴 변하려나 봐.”
“역시 베이노아 수상님이야! 그동안은 3대 오물들 때문에 날개를 못 펴셨을 뿐이지. 이제야 큰 뜻을 펼치시는군.”
3대 세력만의 잔치나 다름없던 이권들이 대중에게 고루 분배되고, 그들이 독차지하고 있던 관료의 자리도 능력만 있으면 신분고하 막론하고 누구든 오를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자 사람들은 희망으로 가득 찼다.
누구나 노력만 하면 공평하게 벌고 출세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니, 의욕이 안 생기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불과 1달. 쿠데타와 숙청으로 크게 흔들렸던 공화국은 철저히 준비해 뒀던 베이노아 수상의 노력으로 빠르게 안정세를 되찾아갔다.
하지만 공화국의 부흥을 위한 그의 노력은 생각지도 못한 암초를 만나게 되었다. 아니 자칫 잘못하면 공화국 자체가 전복될 수도 있는 커다란 위기였다.
* * *
우라그리 성계.
이곳은 공화국과 제국의 영역을 나누는, 일종의 국경지대였다.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국경을 나눈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우주에도 각 세력마다 영역이 있고 뚜렷한 경계가 존재했다.
물론 제국과 공화국은 연합과 더불어 인베이더를 공통된 주적으로 삼는 동맹 관계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을 만큼 친근한 건 아니었다.
오랫동안 핍박받고 천대받았던 아인종들이 모여 세운 공화국은 신분제가 가장 뚜렷하게 존재하는 제국을 경계했고, 국경지대는 항상 병력이 배치되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우라그리 성계였다.
이 행성은 본래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국경지대를 방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 하나로 인해 군사요새행성으로 개조되었다.
하지만 전략적인 중요도에 비해 이곳은 거의 반쯤 방치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만에 하나 발생할지 모를 제국의 침범을 막기 위해 세워졌지만, 정작 제국은 무려 수백 년 동안 이곳을 넘어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르면서 군부는 점점 나태해졌고, 우라그리 성계에 대한 관심과 지원도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지금에 와선 진급에서 누락되거나 혹은 권력 싸움에서 패한 자들이 오는 유배지와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제국의 주역을 감시하는 자들도 나태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아··· 지루해라. 맨날 보는 광경이구만. 언제까지 여기 처박혀서 하릴없이 세월만 낭비해야 하는 거지? 아! 피가 끓는다, 끓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와 같은 일상이었다. 변화 없는 우주공간을 매일 감시하는 것도 곤욕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숨 섞인 불만을 내뱉는 관측병의 말에, 옆에 있던 관측병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오늘따라 뭘 새삼스럽게 그래? 여기 일상이 본래 그런데.”
이곳에 처음 배정받았을 때는 크게 낙담했지만, 이젠 시간이 흐르다보니 이런 지루함에도 적응된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새삼 불만을 표하는 동료가 이상하게까지 보였다. 그러자 불만을 내뱉던 관측병이 그 이유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너도 들었지? 윗대가리들이 전부 갈려나간 거.”
“듣기야 했지. 3대 오물이 쿠데타를 모의하다 죄다 숙청됐다고 하더만.”
“다른 곳에서는 난리야. 그 작자들이 없어지면서 공중에 뜬 이권을 정부에서 분배하느라 정신들이 없다더라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이곳 사정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잖아.”
공화국 전역으로 변화의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우라그리 행성요새하고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군부조직 테트라가 사라지면서 군부의 상층부가 대거 물갈이되긴 했지만,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지역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매일 해오던 일을 똑같이 반복하는 게 고작일 뿐이었다.
“이런 변두리로 좌천되지만 않았더라면 나한테도 절호의 기회가 됐을 텐데 말이야. 정작 나는 이런 곳에 갇혀서 맨날 보던 광경만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니. 어떻게 답답하고 억울하지 않겠어?”
한탄을 늘어놓는 그 말에 동료가 한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어이구, 말은 잘한다. 그런 좋은 기회가 너한테 갈 리가 없잖아. 네가 그렇게 능력 있는 녀석이었다면 애당초 이런 곳에 유배 오지도 않았겠지. 쓸데없는 소린 그만두고 모니터링이나 잘 해. 괜히 또 지적당하지 말고.”
“젠장!”
동료의 직설적인 표현에 욕지기를 내뱉은 관측병은 다시 시선을 홀로그램 스크린에 집중시켰다. 거기에는 이 일대 주역을 훑는 센서의 감시 상황과 화상이 표시되고 있었다.
헌데 그때였다. 언제나처럼 화면만 지루하게 지켜보던 중 갑자기 부저가 울리기 시작했다.
삑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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