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23화
“끄으으···!”
“고작 이 정도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시다니. 부사령관님도 생각보다 엄살이 심하시군요.”
다무스 중령은 살기 한 점 드러내지 않고 실실 웃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살기등등한 모습보다 섬뜩할 정도였다.
루프라 소장이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차라리··· 죽여라! 날 더 농락하지 말고. 네 녀석이 첩자든 적이든 간에··· 20년 동안 날 상관으로 모셨다면··· 그게 최소한의 도리 아닌가?”
“농락하지 말라고? 거기다가 최소한의 도리?”
그때까지 웃는 가면을 쓰고 있던 다무스 중령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얼마나 무시무시하던지 지금까지 20년 동안 다무스 중령과 함께 해왔던 루프라 소장조차 이런 얼굴을 보는 건 오늘 이 순간이 처음일 정도였다.
“네놈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되나? 아직도 모르나보군.”
다무스 중령은 여전히 살기 한 점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 살벌해 보였다. 표정만으로도 누군가를 살해할 수 있다면 바로 지금의 다무스 중령일 것이다.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30년 전에 있었던 그 일을 말이야.”
“30년 전?”
30년 전이라는 말에 다 죽어가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 루프라 소장.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다무스 중령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어젖혔다. 그것은 비분에 찬 웃음이었다.
“하하하! 역시 그렇군.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내가 누군지 아직도 못 알아보다니. 역시 고통당한 사람은 영원히 잊지 못해도, 고통을 준 사람은 너무 하찮은 일이라서 일일이 기억 못한다는 건가.”
돌연 웃음을 뚝 그친 다무스 중령이 으르렁대듯 살벌하게 말했다.
“잘 들어라, 루프라. 내 이름은 다무스가 아니야. 나는 엘렉스 크라이디움. 네놈이 인베이더 토벌 때 강제로 물자를 징발해간 것도 모자라 결국 미끼로 삼기까지 했던 마을의 주민이었지.”
“뭐라!? 컥, 커억···.”
깜작 놀란 루프라 소장이 울컥 피를 토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뜻이었다.
“이제야 알았나보지? 그때 네놈은 마을의 이장이 물자징발에 반발한다고 본보기로 무참히 살해했었지. 그때 네놈의 손에 살해당안 이장의 아들이 바로 나다.”
창백한 안색이 된 루프라 소장은 그제야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기억을 겨우 떠올리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그때는 루프라 소장, 아니 루프라 소령의 부대가 인베이더의 함정에 빠져 사정이 꽤나 열악하던 시기였다.
전함은 피격에 의한 기능부진으로 산맥의 중턱에 주저앉았고, 물자는 전부 바닥이나 먹을 물조차 부족했다. 그리고 언제 인베이더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었다.
바로 부족한 것을 어딘가에서 충당하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그들이 전쟁터로 삼은 행성에는 원주민들 상당수가 살아남은 상태였다. 문명은 꽤 발달된 편이지만, 행성이 워낙 크다 보니 발길이 닿지 않았던 미개척지들이 많아, 그런 곳들을 개척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척마을이 상당수 넓게 분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퍼져있는 개척마을은 인베이더들도 미처 일일이 다 제거할 수 없었던지, 루프라 소령의 부대 주변에도 몇몇 마을들이 더러 발견되었다.
그래서 마을을 찾아가 강제로 물자를 징발했다. 나름 영능력자로 구성된 마을의 자경단이 반발했지만 제대로 된 훈련으로 단련된 군인들을 감당할 순 없었다.
그 과정 중에 본보기로 몇을 죽이기도 했지만, 인베이더와 전쟁하다 보면 의례 있는 일이라서 딱히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에 있었다. 일단 강제징발로 물자부족 문제는 조금 해결되긴 했는데, 하필 어디서 냄새를 맡은 건지 갑자기 인베이더의 무리가 대거 몰려들게 된 것이다.
물론 싸우지 못할 건 없었다. 함정에 빠져 상당수 병력을 잃고 이곳에 낙오된 처지라 해도 그들의 전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지금 몰려든 놈들이 전부인지, 아니면 이것들은 선발대에 불과하고 그 뒤에 강력한 전력을 갖춘 본대가 따로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젠장, 전함만 멀쩡했어도···.”
전함의 광범위 센서라면 놈들의 병력이동쯤은 대번에 파악해서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고작 저런 조무래기 무리 따위에도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려야 하다니.
이런 현실이 너무나도 개탄스러웠지만, 지금은 용력을 믿고 나설 때가 아니었다. 적어도 아군의 지원병력이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는 어떻게든 몸을 사려야 했다.
그래서 강제징발 했던 마을을 놈들에게 미끼로 던져 넣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도망치는 척 물러서면서 인베이더들을 마을로 유인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 뒤에는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키느라 바쁜 인베이더들을 놔둔 채 흔적을 지우고 후퇴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보지도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기다렸던 지원병력이 도착했고, 그들과 힘을 합쳐 인베이더들을 일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공으로 진급했고, 20년이 지난 지금은 소장의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그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왔다고?
“정말··· 기가··· 막히는구나. 네가 그때 죽은 이장의··· 아들이라고?”
솔직히 말해 20년 전에 죽었던 이장이 누구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징발하는 과정 중에 본보기로 몇을 죽였다는 정도였다.
“이제 알겠지? 네놈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이제야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된 거다.”
루프라 소장은 격하게 숨을 헐떡이다가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마이스터 급의 실력자 치고는 너무나도 허망한 최후였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믿던 부관에게 배신당한데다, 오래전부터 다무스 중령에 의해 만성중독당한 상태.
독 자체는 그리 치명적이지 않았지만, 영능의 운용을 저해하는 성분이 있어서 다무스 중령의 암습을 받고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걸로 공화국 내의 쓰레기들은 전부 일소될 거다. 네놈도 사형대에 올렸으면 좋았을 것을.”
다무스 중령, 아니 엘렉스는 아쉬운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쿠데타의 주역인 이자를 굳이 사형대에 올리기 위해 살려두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와 가족들, 마을 사람들도 이젠 편히 잠들 수 있겠지.”
그는 20여년 전 억울하게 죽었던 그들을 그리워하면서 뒤처리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루프라 소장의 사망한 모습을 증거 영상으로 남긴 뒤, 그 시체를 준비된 자루에 담아 옮기기 시작했다.
이걸로 쿠데타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루프라 소장이 제거되었다.
하지만 그가 죽는다고 해서 쿠데타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루프라 소장이 현재 남아 있는 군부 인물들 중 가장 큰 권한을 지닌 거두이긴 했지만, 그가 죽는다 해도 그 자리를 대체할 인물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늘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레이스컬도 그런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준비했다.
다무스 중령과 같은 비장의 칼을.
그리고 그 칼은 단 한 자루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공화국 곳곳에서 수하가 상관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의를 위해 죽어라. 데이반 의원.”
“컥! 대체 왜!?”
“네가 할파스 상회의 편을 들어주면서 우리 아버지의 회사는 기술을 빼앗기면서 망해버렸지. 그리고 가족들은 죄다 목을 메었고. 하지만 난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얼굴을 뜯어고치고, 전신을 개조해가며 다른 사람이 되었어. 바로 이때를 위해서 말이야!”
“날 죽인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질 것 같으냐?”
죽어가는 와중에도 분한 얼굴로 이를 가는 데이반 의원. 하지만 그를 찌른 보좌관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적어도 너 같은 쓰레기를 치울 수는 있지. 그리고 죽는 게 너 하나뿐인 것 같으냐? 이거 하나는 알고 죽어라. 오늘 공화국은 대청소 날이다. 너같이 소각되는 쓰레기로 넘쳐날 거다.”
“뭐!?”
“말이 많았군. 그만 죽어.”
보좌관은 이미 찌른 칼을 더 깊이 내리눌렀다. 그러자 장기가 이리저리 찢겨나가면서 데이반 의원은 사망했다.
그리고 유명한 재벌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졌다. 자신을 오랫동안 믿고 경호해주던 자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오래도록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아니, 네가 어째서!?”
오랫동안 부패세력의 나팔수 노릇을 했던 언론사의 사장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럼 잘 가세요. 사장님. 만나서 더러웠고, 후생에서는 다시 만나지 맙시다.”
“끄으으.”
그렇게 쿠데타를 모의했던 자들과, 그 휘하 세력에 몸담은 자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살해당했다. 군부는 물론 정재계와 언론 등 할파스 상회와 연관이 있거나 혹은 군부조직 테트라, 그리고 정당 콜베라와 깊은 관계를 맺은 자들까지 전부 숙청된 것이다.
물론 베이나스 수상으로서도 이 같은 숙청은 상당히 무리한 결단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정적들을 무력으로 제거했다는 비난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이었다. 저들은 자신들이 나락으로 떨어질 것을 두려워 쿠데타를 모의하고 실행에 옮기려고까지 했다.
이런 명분이 없었다면 감히 이런 대규모 암살을 동반한 숙청을 단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 * *
한편 이런 대대적인 숙청을 방관하듯 지켜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바로 할파스 상회였다. 자원행성의 경매장이 제압된 이후, 상당한 손해를 보긴 했지만, 할파스 상회의 주력은 대부분 건재했다.
물론 레이스컬에서도 할파스 상회도 정리하기 위해 손을 쓰긴 했지만, 할파스 상회 본단에서는 그보다 더 빨리 지부들을 정리해 버렸다. 덕분에 지금 각 행성과 지부에 남아 있는 것들은 전부 껍데기들 뿐이었다.
그래서 쿠데타를 모의하던 자리에서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쿠데타라고? 멍청한 것들 베이노아 수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인 줄 알았나?”
할파스 상회의 회장 [할파스 무레미안]은 혀를 끌끌 차며 영상을 지켜보았다. 이미 쿠데타를 모의한 자들이 숙청당한 사실이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중이었다.
공화국의 국민들도 그들에게 동정을 보내지 않았다. 자신들의 부정부패가 드러나고, 권력에서 물러날 상황에 놓이자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려고 쿠데타까지 모의한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동정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특히 오랫동안 자리매김해왔던 군부조직 테트라와 정당 콜베라는 대놓고 공화국의 3대 오물로 불릴 만큼 유명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를 크게 환호하며 반겼다. 그동안 공화국을 좀먹던 세력을 일소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 것이다.
그들은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아닌가 하며 큰 기대감에 차올랐다. 정재계와 고위 관료들이 죽어나가면서 경제는 물론 행정까지 꽤나 큰 혼란이 빚어지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건전한 사회가 이룩될 거란 기대감이 더 컸던 것이다.
그리고 레이스컬은 이런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대비하고 있었다. 저들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여러 인재들을 육성해두었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들을 등용하기 위해 손을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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