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21화
그래서일까? 유태진과 직접 홀로그램 화상으로 통신을 주고받게 된 베이노아 수상은 먼저 감사부터 표했다.
[소식은 들었네. 유태진 사령관. 당신 덕분에 자원행성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다고 하더군. 뭐라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어. 당신 덕분에 우리 공화국은 간신히 부패의 늪에서 조금이나마 헤어 나올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었으니 말이야.]
베이노아 수상은 스타 브레이커 함대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상황이었다.
특히 유태진이 제압한 수호방위대의 면모와, 그들과 연동할 수 있는 강력한 방위체제인 데스 필드의 힘은 경악을 감추기 어려울 만큼 대단했다.
만일 스타 브레이커가 단독으로 작전을 진행했다면 그 결과가 필패로 끝났을 거란 사실을 그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별말씀을···. 오히려 저흰 수상께서 결단해 주신 덕분에 정치적 부담을 크게 덜었습니다.”
유태진은 겸양하면서 이번 작전의 공적을 자신보다는 베네트 국장과 베이노아 수상에게 돌렸다. 사실 베이노아 수상이 아니었더라면 연합의 함대가 공화국의 세력권에 개입한다는 것은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베이노아 수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지었다.
[솔직히 말해 우리가 더 아쉬운 상황이었지. 이번이 아니었다면 영영 기회가 없었을지도 몰라. 상회의 본단도 아니고 일개 지부조차 감당하기 힘들 정도라니. 이쪽의 준비가 너무 안일했어.]
무력을 확보하기 위해 나름 심혈을 기울여 정예함대를 육성하긴 했지만, 이번 일을 겪고 보니 그동안 준비해온 것들이 얼마나 턱없이 부족했는지를 절감했다.
할파스 상회 전체도 아니고 고작 일개 지부에 불과한 곳의 전력이 그토록 대단하다니.
물론 그 지점이 할파스 상회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원행성지부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격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 작전은 성공이었고, 무리하게 위험을 감수했던 만큼의 대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도 얻은 성과가 적지 않더군. 일단 목표했던 자들은 전부 사로잡았네. 정재계의 거물들이 불법 경매에 참석하다니. 그 자리에서 잡혔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현행범이 되었지.]
애당초 베이노아 수상이 관리국의 뜻에 동참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경매에 참석하는 정재계의 거물들을 불법의 현장에서 체포함은 물론, 그들의 신변을 구속함으로서 완벽하게 주도권을 쥘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할파스 상회의 자원행성지부 데이터베이스에는 온갖 장부가 기입되어 있었다. 그동안 경매에 참석했던 자들이 해온 거래는 물론 어떤 경매물을 낙찰 받았고 어떤 불법을 저질렀는지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니 이만한 증거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제 명분은 확실해졌다. 그들이 저지른 범행과 불법, 부정부패에 대한 증거만 충분하다면 제아무리 권세 높은 자라 하더라도 충분히 처벌할 이유가 된다.
“하지만 그 자들도 그렇게 쉽게 당해주진 않을 겁니다.”
이곳에서 사로잡은 자들이 정재계의 거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일군 세력이나 집단까지 어떻게 된 건 아니었다.
법적 대응을 위해 거대 로펌을 고용하는 것은 물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언론을 움직여 자신들의 죄를 호도하고, 다른 이슈를 만들어 사건을 덮고자 할 것이다.
[나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준비를 해왔지.]
베이노아 수상과 레이스컬은 이때를 위해 오랜 세월을 감내하며 은밀히 세력을 키워왔다.
공화국의 3대 오물이라 불리는 대표 기득권층, 정당 콜베라와 군부조직 테트라, 그리고 할파스 상회가 알지 못하도록 언론 정재계, 그리고 민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직을 깔아둔 것이다.
지금까진 수면 아래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지만, 이제 그들의 수뇌와 고위층들을 경매장에서 사로잡은 지금이야말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할 때라 할 수 있었다.
[···뿌리 채 뽑을 것이네. 지금까지 공화국을 좀먹고 더럽혀 왔던 것들을 없애고 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던 본래 기치를 되살릴 것이야.]
그리고 그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공화국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정재계의 거물들이 불법 경매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공화국 전역에 방송된 것이다.
그리고 그 불법 경매에서 어떤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도 적나라하게 밝혀졌다.
공화국은 본래 이 우주의 주류가 아닌 아인종들이 모여 세운 연방이었다. 차별과 박해를 피해 뭉치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추구했으며, 그것이 공화국의 토대를 이루는 기치가 되었다.
그런데 저것은 대체 뭔가?
같은 공화국의 국민을 노예로 만들어 거래하고, 그들을 박해하고 희롱하며, 심지어 도살되는 짐승처럼 맘대로 죽이고 있지 않은가?
특히 경매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거래되는 아인종들의 광경은 공화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물론 암암리에 그런 소문이 돌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이렇듯 명백한 증거와 영상으로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저게 정말이야?”
“말도 안 돼! 어떻게 공화국 내에서 저런 일이 벌어질 수 있어?”
“저 영상이나 증거들 조작된 거 맞지?”
이를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이번 영상 공개에 대해 베이노아 수상이 직접 나서서 이 모든 게 사실임을 공표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얼마 전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한 영상을 보신 적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영상의 진위여부에 대해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음도
제가 이 자리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밝힌다면··· 이 영상은 한 치의 조작도 없는 분명한 사실이라는 겁니다.]
베이노아 수상은 모든 사실을 직설적으로 밝혔다. 그동안 3대 세력이 얼마나 전횡을 저질러 왔으며, 이번 경매를 비롯해 음지에서 얼마나 부정부패를 저질렀는지도 낱낱이 밝힌 것이다.
“뭐야? 그런 거였어!?”
“이런 때려죽일 놈들!”
“역시 3대 오물이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는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생각보다 더 심각한데?”
“이대로 가만있을 순 없어!”
분노한 국민들이 그 즉시 거리로 뛰쳐나왔다. 지금까지 그들은 자본의 논리에 길들여진 채 기득권층의 억압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저런 추악한 진실을 보고도 참는다면 앞으로 자신들의 자식들은 물론 그 후손까지 노예와 다름없는 비참한 삶을 이어가야 할 게 분명했다. 아니 최악의 경우, 저 영상 속의 노예들이 바로 자신들의 모습이 될 수도 있었다.
“부정부패의 온상인 할파스 상회를 무너뜨리자!”
“여긴 할파스 공화국이 아니다. 놈들을 처벌해라!”
“할파스의 앞잡이 짓을 해온 콜베라와 테트라의 직위를 해제하라! 해제하라!”
“놈들을 재판장에 세우자!”
유전무죄로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 돈 있고 권세 높은 자들에게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특히 3대 세력이 공화국에 뿌리 뻗은 세월이 무려 수백 년에 이른 만큼 피해자들의 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동안은 각 개인의 문제였던 만큼,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속 앓이만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공론화된 이상 공화국의 국민 모두의 일이 되었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였던 분노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쩌다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어? 그리고 저런 방송을 나가게 놔두다니, 무슨 생각이야? 당장 저걸 멈춰! 중단시키라고!”
“안됩니다. 통제가 먹히질 않습니다.”
“뭐야? 그동안 우리 돈을 잘 받아먹어왔던 놈들이 이제 와서 배신이야?”
지금까지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믿던 기득권층으로서는 난리도 이런 난리도 없었다. 어떻게든 사건을 덮고자 했지만, 이미 그러기엔 너무나도 늦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그들을 따른다고 생각했던 각 계층의 중요 인사들이 무더기로 배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레이스컬이 오래 전부터 심어둔 자들로서, 이때를 노리고 지금까지 숨죽여 왔던 것이다.
덕분에 방송, 통신, 언론, 그리고 각 산업분야 등 모든 게 그야말로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공화국 전체가 정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언론조작에 실패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하고 있는 그들이 언제 폭도로 변해 덤벼들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위기감을 느낀 기득권층 세력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 사태를 어떻게든 극복할 방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대로 놔둘 순 없어!”
“자칫하면 정말로 우린 숙청될 거야.”
“무슨 방법이 없나?”
누군가가 던진 물음에, 한 사내가 나서서 입을 열었다.
“방법은 한 가지 뿐이지.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뭐야?”
“설마 쿠데타를!?”
무력진압이란 그 말에 다들 전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력 진압은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공화국의 수상만이 내릴 수 있는 결정권 중 하나였다. 헌데도 무력진압을 언급했다면 그건 즉 내란을 의미했다. 그동안 공화국 내에서 온갖 권력을 휘둘러온 그들이지만, 쿠데타만큼은 섣불리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먼저 의견을 제시했던 사내는 노골적으로 내뱉었다.
“당신들도 잘 알잖소? 더 이상 국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방도가 없다는 걸. 이미 쌓일 만큼 쌓였지. 그들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우리들이 목을 내놓는 것뿐인데··· 그럴 수 있으시겠소?”
“으음···.”
분노한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자신들의 목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작자들이었다면, 애당초 권력을 누리기 위해 온갖 추악한 악행을 저질러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침음성을 들은 사내는 어떤 결론이 나올지 예상할 수 있었다.
타인보다 자신들이 먼저고, 가족이 먼저인 자들이다. 지금까지 이기적으로 누려온 자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희생할 리가 없었다.
아니 이건 희생조차 아니다. 그들이 저질러온 죄의 대가를 치를 뿐인데도, 그들은 그동안 누렸던 호화찬란했던 과거를 포기하지 못했다.
“···좋소. 난 찬성하지.”
“나도. 기껏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이렇게 죽어줄 순 없어.”
“비천한 것들이 기어오른다면 이 기회에 확실히 본을 보여줄 필요가 있소.”
결국 만장일치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중 쿠데타에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거사일은 내일로 합시다.”
“내일?”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닌가?”
사내가 제시한 날짜에 모두가 우려를 나타냈다. 이제 막 결정을 내린 참인데, 거사일이 너무 촉박한 것 아닌가?
이에 사내가 덧붙여 설득했다.
“신중을 기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최대한 서둘러야 하오. 특히 이런 위험천만한 쿠데타는 더더욱 그렇지. 괜히 오래 시간을 끌면 누설될 가능성만 높아지니까. 차라리 번개처럼 들이치는 게 보다 성공률이 높을 거요.”
그 말에 다들 납득한 표정이 되었다. 너무 서두르는 것 같긴 하지만, 때론 신중함보다는 신속함이 더 중요한 일도 있는 법이었다.
특히 이 사내는 군사 분야에 있어선 최고 전문가다. 대부분의 수뇌부들이 경매에 참석했다가 잡혀간 지금, 군부에서 이 사내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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