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45화 (346/448)

14권-20화

그래서 그 무엇보다 더 갈망하고 염원하게 되었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이 제한된 구속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지기로!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대업을 추진해 왔었던 것이다.

게리드도 그런 황제의 마음을 헤아린 건지 자신의 뜻을 밝혔다.

“폐하. 전 괜찮습니다. 설령 지금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저의 완전한 죽음은 아니니 말입니다.”

“···결국 결심했나?”

그 의미를 알아들은 황제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무거워졌다.

“예. 어차피 언젠가는 이렇게 됐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때가 될 때까지는 그래도 인간으로 남아있고자 하는 미련 때문에 시기를 조금 미뤄뒀을 뿐이지요.”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영생을 추구하는 고위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들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적인 종착지, 리치화 마법(자이 리 큐엠-마도불사魔道不死).

자기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분리한 뒤, 생명과 영혼만을 특수 매개체에 담고 언데드가 된 육신을 조종함으로서 죽음 이후에도 현세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불사화 마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영혼과 정신이 견딜 수만 있다면 영원한 삶을 사는 것도 이론적으론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그만한 장점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단점도 있는 법.

일단 리치가 된 마법사는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수많은 즐거움을 포기해야 했다.

남들처럼 잘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으며, 성애를 나누지도 못한다. 또한 냄새도 맡을 수 없으며, 촉감이 없어 타인의 온기를 나누지도 못하는 것이 바로 리치화의 폐해였다.

그렇기에 리치가 된 마법사는 오랜 세월을 보낼수록 정신이 황폐해져 간다. 영혼은 예전과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것들만 결락되다 보니 정신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인간적인 공감대나 도덕성을 상실하고 냉혹하게 효율만 찾거나, 혹은 미쳐버려 사악하게 변한 리치들이 종종 출몰해 세상을 어지럽힌 것도 바로 그런 이유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크나큰 단점을 극복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오버 그랜드. 즉 초월의 입문이라는 반신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이런 문제점들은 깨끗이 사라진다.

그때는 진정한 불사, 즉 언데드이면서 생전과 다름없는 완전한 육신을 가진 상태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궁극의 경지를 두고 동종의 영능학을 수학하는 자들은 이렇게 이름 붙였다.

데미 리치.

언데드로서의 장점과 인간으로서의 정점 모두를 고루 갖춘 진정한 영생불사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 경지는 너무나 높고 요원해서 여기에 도달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랜드 급까지 도달한 재능 있는 자들조차 그 문턱을 넘은 경우는 만에 하나에 불과할 정도였다.

만일 게리드가 후에 데미 리치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는 리치가 된 그 순간부터 이미 비참한 파멸이 예정된 거나 다름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헌데도 게리드는 황제를 위해 그런 희생을 감수하기로 각오하였다. 물론 당장 죽게 생겼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애당초 그가 죽음에 이르는 치명상을 입게 된 것 자체가 황제의 명을 이행하다 벌어진 일이 아니던가.

본래 수명대로 살았다면 앞으로도 백수십년 이상 건재했을 게리드의 이번 선택이 황제에게는 너무도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불사화는?”

“제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은 순간부터 이미 진행 중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만약을 위해 항시 대비하고 있었지요.”

그랬다. 이미 게리드의 육신은 조금씩 부스러지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그의 영혼과 남은 생명력은 평소 소지하고 있던 매개체 안에 봉인되고, 육체는 언데드가 되어 뼈만 남게 될 것이다.

한편 이를 목도하게 된 레민티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게리드들과 함께 웜 홀 안으로 몸을 던지긴 했지만, 설마 제국의 알카데인 황제의 알현실로 이어졌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인베이더와 손을 잡은 자들이 상당한 거물들인 건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설마 제국의 황제라니! 미쳤어!’

그녀는 명실상부한 악덕상인이었다. 이익만 확실히 보장된다면 인베이더와 손을 잡는 일도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론데니움 제국이라니! 이것만큼은 그녀도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이게 정녕 사실이라면 현 우주의 세력판도에 크나큰 격변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밀을 알게 된 자신을 과연 살려두려 할까?

그때 알카데인 황제의 고요한 시선이 그녀를 향해 옮겨졌다.

“그렇군. 할파스 상회의 여인이라고 했나?”

“예? 예··· 그렇습니다. 폐하.”

조용히 묻는 그 말에 레민티아가 움찔 놀라며 반응했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짐이 관여된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죽음을 면치 못해야 하겠지만···”

“······.”

자신의 죽음이 입에 오른 그 순간 머릿속이 말 그대로 하얗게 변했지만, 뒤이은 황제의 말이 그녀를 구사일생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짐의 대업에 협조해준 공을 생각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 그대는 앞으로 리겔 밑에서 일을 하도록.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자세한 건 리겔이 알려줄 거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동안 쌓았던 모든 걸 잃어버리고 겨우 리겔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게 된 것 자체가 불만이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더 많은 것을 바라다간 간신히 건진 목숨마저 위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황제의 시선이 리겔에게로 향했다.

“리겔, 이번 실책은 덮어두도록 하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하지 마라. 이번 과는 공으로 갚아야 할 것이야.”

[정말 송구합니다, 폐하. 이번 실패를 토대로 삼아 반드시 공을 세우겠습니다.]

사실 이번 실패는 리겔의 잘못이라 할 수도 없었다. 엘하운드를 포획하려던 리플 행성의 인베이더들이 저지른 실책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조건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게리드마저 저런 꼴이 된 상황에서 괜히 그 심기를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그럼 가서 알려라. 곧 계획대로 진행하겠다고.”

[알겠습니다.]

황제의 명령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리겔은 어쩔 줄을 모르는 레민티아를 데리고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난 뒤에야 황제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리겔은 둘째 치고라도 레민티아에게까지 대업에 관한 계획을 언급할 순 없었던 것이다.

먼저 게리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너무 성급하신 결정이 아닌지요?”

“아니다. 더 이상 지체해서 얻을 이익이 없다. 오히려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본다. 남은 제물을 얻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그 정도는 대체할 수 있는 게 얼마든지 있으니 상관없겠지.”

“그렇군요.”

알카데인 황제의 혜안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아는 만큼, 게리드도 더 이상은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문제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으음.”

황제도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큼 곤혹스런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아문은 뛰어난 기사이긴 합니다만, 지금 같은 대업을 앞둔 상황에선 걸림돌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겠지.”

황제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아문 익스큐터. 그는 론데니움 제국이 보유하고 있는 최강의 기사였다.

그랜드 급마저 뛰어넘어 반신 위에 도달한 그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제국 내에서 오직 한 사람, 황제뿐이다.

하지만 알카데인 황제는 그를 신뢰하지 못했다. 아니 황제가 은밀히 추진해온 대업이 그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문 익스큐터의 충성심은 오직 황제를 위한 것이 아닌,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한 것이다. 만일 황제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옳지 못한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명령에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반기를 들 성격이었다.

그건 그가 타고난 반골이라서가 아니라, 정도를 벗어난 것을 용납하지 않는 올곧기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고지식한 녀석이지요. 허나 그렇기에 폐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쩔 수 없지. 제국을 지탱하는 제일의 기둥이긴 하지만, 대업을 위해서는 잘라낼 수밖에.”

지금까지는 아문에게만큼은 철저히 비밀로 해 왔지만, 제국이 본격적으로 움직인다면 더 이상 대업의 비밀이고 뭐고도 없었다.

그리고 아문의 성품대로라면 그는 그 사실을 아는 즉시 극렬하게 반발할 것이다.

알카데인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겁게 중얼거렸다.

“···그동안 미뤄두고 있던 숙제를 해야 할 때인가.”

내부에서 터질 분란의 가능성은 대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제거하는 것이 현명했다. 설령 그것이 제국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신하라 해도 예외는 없었다.

* * *

관리국 소속 특무함대인 바니아스 함대와, 레이스컬 휘하의 함대 스타 브레이커는 자원행성과 위성 아렌고타까지 완벽하게 장악해 버렸다.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리겔과 레민티아가 사라진 이상 할파스 상회의 사람들을 통제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속불명함을 제압하는 것도 더없이 순탄했다. 그랜드 급으로 추정되던 게리드와 언데드 군단까지 압도한 유태진의 무력에 바니아스 함대의 전력까지 더해진 이상 제압 못하는 거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소속불명의 전함을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단서라 할 만한 게 나오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하나같이 범죄자들을 데려다가 승무원으로 만들었군요. 심지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도록 금제로 목줄까지 채우고.”

“철저한 놈들이야. 결국 이놈들 소속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군.”

유태진의 말에 오르트 메이슨 사령관은 혀를 내둘렀다. 이런 함대를 운영하는 승무원조차 언제든 버림패로 쓸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범죄자들로 구성하다니.

그만큼 자신들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철저히 준비를 했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전함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했지만, 그마저도 완전히 말소되었다.

승무원 중 일부가 함대가 제압되는 순간 데이터베이스를 물리적으로 파괴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영능에 의한 복원조차 불가능하도록 철저히 소각시켰다.

데이터베이스 저장소를 소각한 자를 잡아다 문초했지만, 그 자도 어쩔 수 없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함대가 위기에 처하거나 포획될 상황에 놓일 경우 무조건 모든 데이터를 말소하도록 금제를 받았다는 이야기뿐이었다.

“그래도 얻은 게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

할파스 상회 자원행성지부에는 여러 데이터 장부가 보관되어 있었다. 데이터 소각에 철저했던 소속불명함과 달리, 이곳의 지부장 레민티아는 그런 부분에서 소홀했던 것이다.

아니, 그녀로서는 이곳이 다른 세력에 의해 점령당할 거라고는 아마 상상조차 못했던 게 분명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수호방위대의 전력에 자원행성 전체를 둘러싼 데스 필드까지··· 이 정도면 어지간한 전력으로는 점령은 꿈도 못 꾸지.’

아마 유태진이 수호방위대를 직접 제압하지 않았더라면 레이스컬이 육성한 정예함대 스타 브레이커도 감히 이곳을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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