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19화
‘제기랄!’
경악에 젖은 게리드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인지할 수조차도 없는 정체불명의 거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드는 게 포착되어서였다.
그건 물리적인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의 움직임.
그랜드 급에 다다른 게리드는 저 거검이 사상기의 일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으로선 절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는 것도.
몸이라도 멀쩡했다면 뭔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영력이 봉쇄된 지금은 원시적인 화약반발식 총탄에도 죽을 수 있는 무력한 상황이었다.
리겔과 레민티아가 어떻게든 대응을 해줬으면 했지만, 마이스터에 불과한 그들의 역량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리겔이 약간이나마 가능성이 있었지만, 다량의 디멘션 쿼츠를 사용하느라 생긴 부담까지 떠안은 터라 몸 상태가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마 지금 상황이라면 저걸 막아낼 확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하리라.
‘아니, 안 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마음이 절박해진 게리드는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까지 각오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목숨이었다.
쿠구구구!
영맥이 굳어지면서 더 이상 발생할 수 없는 격렬한 흐름이 신체를 휘돌고, 뒤이어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격통이 밀려왔다. 허나 이것은 시작일 뿐. 격통은 영력의 흐름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 그에게 전신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맛보게 하였다.
그렇지만 게리드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이를 악물며 감내했다.
애당초 자신의 생명력 자체를 촉매로 삼아 굳어진 영맥을 활성화 하는 수법이었다. 이 정도의 고통이 따르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영력이 활성화되자마자 그는 즉각 대응에 들어갔다.
제한적인 시간정체마법과 공간고정, 그리고 지금당장 사용 가능한 온갖 구속마법을 총동원하여 거검의 속도를 최대한 감속시키는 데에 주력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거검의 속도가 늦춰지긴 했지만 그렇게 해서 번 시간은 고작해야 0.1초 정도.
그렇지만 0.1초의 시간조차 게리드에게는 천금과도 같았다. 의식을 가속화하고 있던 그는 그 짧은 시간동안 하나의 고위 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프로텍션 프롬 에너지(Protection from Energy)>
찰나의 순간을 뛰어넘어 발동한 휘황찬란한 역장이 게리드와 그 주변을 둘러쌌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에너지로부터 보호해주는 8클래스 방어마법. 유태진의 거검이 설령 물리적인 개념을 초월한 사상기의 일종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거검이 역장에 닿는 순간, 마지막 희망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쩌저적!
거검을 막아낸 건 그야말로 아주 잠시잠깐 뿐이었다. 곧 무언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역장이 무너졌고,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게 된 거검은 게리드의 가슴을 그대로 관통하고 말았다.
“커억! 크으으··· 어떻게 이런 일이···.”
죽지만 않는다면 최소한 수백 년 이상을 살 수 있는 그가 무려 생명의 절반을 불태워가면서 구현한 방어마법이었다. 그런데도 웜 홀 안으로 진입하는 불과 몇 초의 시간을 버티지 못해서 이렇게 죽는다고?
그나마 그가 구사한 역장이 얻어낸 유일한 성과라면 거검의 속도와 위력이 약간이나마 줄어드는 바람에 리겔과 레민티아가 무사히 웜 홀 안으로 진입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거검에 관통당한 상태로 휘청거리던 게리드의 육신이 열린 웜홀 안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건 그가 의도했다기보다는, 치명상으로 인해 더 이상 몸을 가눌 수가 없어 안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이것으로 더 이상은 게리드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아니, 의기검형은 분명이 놈의 주심을 관통했다. 살아날 길은 만에 하나라도 없어.’
유태진은 게리드의 죽음을 확신했다. 아니 당장 즉사하진 않았더라도, 자신의 의념이 고스란히 담긴 의기검형은 놈을 확실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방금 전 그 현상은 뭐지?’
리겔이 디멘션 쿼츠로 웜 홀을 열었을 때, 자신의 의념은 이 주역의 공간을 철저히 장악해 봉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리겔의 웜홀은 잠시 수축되는가 싶더니 다시 활짝 개방되어버렸다. 이건 리겔의 역량으론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다.
“설마 신좌가 직접 개입하기라도 한 건가?”
역기충혈대법과 만유합원신기까지 동원한 유태진의 역량은 거의 반신 급에 근접해 있었다. 그런 그의 심검지도를 무시할 만한 힘은 신의 권능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직접 개입하지 않고 이렇게 간접적인 방식으로 손을 쓴 걸 보면 그쪽도 여력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군.’
신들은 강력한 권능과 힘을 가졌지만, 함부로 물질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여러 제약이 존재했으며, 인과로 얽힌 간섭력을 갖지 못한다면 자신의 사도와 소통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아마 그들이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었다면, 게리드가 자신의 공격에 치명상을 입는 일도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능을 행사한 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깝긴 하군. 전부 사로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말이야.’
그는 아쉬움을 삼키며 상념을 털어냈다. 리겔들을 사로잡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온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리겔이 제물을 인도받는 것을 저지한 것은 물론, 자원행성까지 완전히 제압했으니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뒤져보면 쓸 만한 정보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 전에 저것들부터 정리해야겠어.”
리겔과 레민티아는 웜 홀을 통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갔다고 하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소속불명의 함대와 할파스 지부의 아렌고타에 남겨진 전력은 아직 건재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게리드가 회수하지 못했던 언데드 군단의 일부도 여전히 남아서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는 상태였으니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보긴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 가 볼까?”
유태진의 뜻을 일으킨 순간, 그가 지닌 한 자루 검이 무수한 형태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곧 적들을 향해 폭우와 같은 기세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리겔들은 기나긴 시공간의 회랑을 거쳐 어느덧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바로 어딘가로 연결된 웜 홀의 출구였다.
맨몸으로 시도한 워프인 탓에 그들은 상당히 피폐해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 셋 중에 무사하지 못한 자가 있다면 유태진의 의기검형에 가슴을 꿰뚫린 게리드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연명일 뿐이다. 그가 죽는다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검게 죽어가는 그의 안색을 확인하면서 리겔은 이를 악물었다.
‘최악이군.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다니.’
목표였던 제물을 확보하지 못했고, 그나마 거래를 트던 할파스 상회의 자원행성 지부는 완전히 망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지원군으로 불러들였던 게리드까지 곧 죽게 생겼다.
작전 실패도 이런 실패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상부의 질책이 있을 게 분명했다.
어느덧 웜 홀의 출구에 당도한 세 사람은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보게 된 것은 거대한 건축물의 내부였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귀금속들이 예술품들과 함께 좌우에 가지런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그 정면에는 거대한 황좌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인물을 발견한 리겔이 크게 놀라 외쳤다.
[폐··· 폐하!?]
“그렇게 놀랄 것 없다. 짐이 웜 홀의 좌표를 이곳으로 연결시켰으니까.”
황좌에서 몸을 일으켜 그들 앞으로 홀연히 다가온 노년의 사내. 그는 론데니움 제국의 현 황제 알카데인 보나트 론데니움이었다.
설마 오자마자 황제와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던 리겔과 레민티아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리겔이야 이미 여러 차례 황제를 알현했던 만큼 그 행동 자체가 자연스러웠지만, 알카데인 황제를 처음 마주하게 된 레민티아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예를 표한 것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리겔의 행동을 따라하게 된 것이다.
그들을 한 차례 훑어본 황제의 시선이 이번엔 게리드를 향했다.
“꽤 심하게 당했군. 게리드.”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폐하. 정말이지 못 볼 꼴을 보이게 됐군요.”
게리드는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황제 앞에 예를 갖추며 말했다. 그의 가슴을 꿰뚫은 거검은 사라졌지만, 그 힘은 여전히 남아서 그를 죽음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것을 꿰뚫어보았다.
“됐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그 자의 역량은 게리드 그대를 한참 뛰어넘는 것이었으니까.”
“라인트라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어느새 그런 괴물이 된 건지 소신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우주에는 간혹 그런 자들이 튀어나오지. 상식을 초월하는 속도로 금세 강자로 발돋움하는 자들이.”
유태진의 강함이 뜻밖이긴 했지만, 황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 정도 변수는 언제나 있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게리드는 분한 얼굴로 하소연했다.
“그 자 때문에 이번 제물 확보는 실패했습니다. 이래서는 대업이···”
“됐다. 더 이상 제물에 신경 쓰지 마라. 제물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한 안전책일 뿐. 대업의 진행은 이미 확보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더 이상은 신경쓰지 마라.”
“송구합니다, 폐하.”
걱정하지 말라는 황제의 그 말에 게리드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입과 가슴에서는 피를 줄줄 흘리면서 죽어가고 있는데도, 자신의 목숨보다는 황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사실에 더 곤혹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황제는 그런 게리드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게리드 이제 그대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군.”
“예. 그 자의 사상기는 너무나도 치명적이었습니다. 제 영능을 금제한 것으로도 모자라, 제 영육의 인과를 완전히 끊어냈습니다. 이래선 저라도 죽음을 피할 수가 없더군요.”
그 말대로였다. 게리드의 영혼과 육체는 이미 연결점이 끊어진 상태다.
그나마 이렇게 억지로나마 황제 앞에서 마지막 보고를 올릴 수 있던 것은 그가 그랜드 급에 다다른 흑마법사이자 네크로맨서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목숨이 먼저 끊어졌을 것이다.
“이게 다 짐이 모자란 탓이다. 신의 권능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결국 내 것이 아닌 것을.”
황제는 주먹을 불끈 쥐며 한탄했다. 그에게는 초대 황제 때부터 지금까지 대를 이어 내려온 새벽의 여신 윌키아의 권능을 부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여신의 권능을 대여한 것일 뿐,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힘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제약도 많은데다, 섭리에 어긋나거나 혹은 불의한 일에는 감히 사용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론데니움 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그 누구보다 강력한 권능을 다루면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것은 현 황제인 알카데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신하인 게리드가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그를 되살려주지 못했다.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럴만한 힘과 권능이 있음에도 그를 살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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