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43화 (344/448)

14권-18화

허나 그 순간, 유태진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자의적으로 멈춘 건 아니었다. 어떤 외부의 간섭에 의해 뻗던 손이 저절로 멈춰선 것이다.

그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간 유태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뜻밖에도 레민티아가 식은땀을 흘리며 서 있었다.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어?”

그녀가 그의 움직임을 멈춰 세운 것은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 뿐. 온 몸을 쥐어짤 정도로 전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고작이었다.

반면 유태진은 자신을 멈춰 세운 그녀의 능력이 무엇인지 깨닫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꽤 익숙한 방식의 영능이어서였다.

“꽤 강력한 정신간섭이군. 그래, 저 행성 지하에 있는 그건 바로 네 능력을 이용해 만든 거였나.”

유태진의 짐작대로 자원행성의 지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정신제어시설은 바로 레민티아의 능력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것을 분석 연구하여 술식 형태로 재구성한 뒤, 그녀의 영자패턴과 공명하는 형태로 지부는 물론 행성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유태진의 움직임을 잠시나마 멈춘 것은 어디까지나 운이 좋아서일 뿐. 마이스터 수준의 역량으로 그를 제대로 멈춰 세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불가능하다고 해서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리겔과 게리드가 당한 뒤에는 바로 자신이 그 다음 차례가 될 테니까.

“아, 진짜! 난 죽고 싶지 않은데!”

그녀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필사적인 마음으로 이능을 전개했다. 아마 자신까지 위험할 수 있는 지금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리겔과 게리드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나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제대로 먹히는 건 없었지만, 덕분에 리겔이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벌어줄 수 있었다.

[무너지는 어둠!]

겨우 경직에서 풀려난 리겔이 혼신의 힘을 다해 능력을 해방시켰다. 그것은 일정 범위의 공간을 붕괴시키는 독자적인 기술 중 하나였다.

콰르르릉!

공간이 붕괴되면서 발생하는 막대한 힘이 유태진에게 공격적인 형태로 집중되었지만, 그는 의념을 일으켜 이를 완전히 억눌러버렸다.

그러자 레민티아가 믿기 어려운 나머지 당혹성을 금치 못했다.

“공간붕괴의 힘을 그냥 맨몸으로 견뎌!?”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태진의 위험성을 인지한 소속불명의 함대까지 이쪽을 향해 주포를 집중시켰지만, 그것들조차 그의 주변에 닿자마자 소실되듯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향해 퍼부어지는 공격을 알 수 없는 힘으로 지워내며 나선 유태진이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저항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너희들의 공격은 내게 먹히질 않으니까. 괜한 힘만 뺄 뿐이지.”

다른 이들은 눈치를 못 채고 있었지만, 유태진이 본 드래곤을 상대로 전개한 바 있는 천룡무상의 힘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상태.

그들이 저항해봐야 본 드래곤에 못 미치는 수준인 이상 유태진에게 실질적인 데미지를 준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 이후에도 강력한 주포와 공격이 몇 번이나 작열했지만, 그의 옷자락 하나 상하게 하지 못하고 스러지고 나자 리겔도 더 이상의 공격이 무의미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 인정하지. 당신은 강해. 어쩌면 그랜드 급마저 크게 웃돌지도 모르겠군.]

“그래서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내게 순순히 사로잡히고 싶어진 건 아닐 테고.”

유태진은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리겔을 응시했다. 그 눈빛이 섬뜩하기 그지없었지만, 각오를 다진 리겔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아니, 간단히 잡혀줄 순 없지. 당신이 강하다고 해도, 신이 아닌 한 그게 절대적인 건 아니야!]

“과연 그럴까? 저것들로 내 발목을 잡고 시간을 벌 생각인가 본데? 그게 과연 얼마나 갈까.”

그렇게 말하면서 유태진의 오른손에 든 검이 한 차례 공간을 훑었다. 그러자 집중 공격을 해오던 언데드 군단의 일각이 재해에 휩쓸린 것 마냥 허물어졌다.

실로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렇지만 압도적인 힘을 선보인 유태진의 표정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여러 가지로 성가시군.’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리겔들을 사로잡고 싶었지만, 수속불명함대의 주포와 언데드 군단의 공격이 무차별로 쏟아지면서 그를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게 발목을 잡고 있었다.

물론 작정하고 손을 쓴다면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허나 그랬다간 자칫 사로잡기로 마음먹은 게리드와 리겔까지 함께 휘말려 죽어버릴지도 몰라서 최대한 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대로 놔둘 순 없는 일. 유태진의 검 끝이 이윽고 그들을 겨누었다.

“오··· 온다!”

레민티아가 기겁하면서 최대한 영력을 끌어올렸다. 그녀도 유태진에게 자신의 정신계 능력이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손 놓고 당해줄 수도 없지 않은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마이스터답게 영능을 사용한 직접 전투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녀의 양손 위로 타오르는 듯한 기세로 피어오르는 막대한 영력! 그것은 거의 강기에 준하는 밀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리겔도 그에 뒤질세라 즉시 비장의 한수를 꺼내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분명 능력을 농축해 만든 디멘션 쿼츠였다.

그리고 그것을 즉각 발동시켰다.

[찰나의 경계!]

디멘션 쿼츠 안에 담겨 있던 술식이 해방되면서 이 일대에 변화가 생겨났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태진을 중심으로 한 일정 범위의 공간이 돌연 멀어지는 듯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현상의 정체를 깨달은 유태진이 짜증스럽다는 듯 내뱉었다.

“공간격리냐? 날 여기에 가둬두고 도망쳐 보시겠다?”

제아무리 유태진이라 해도 디멘션 쿼츠까지 쓴 수법을 쉽게 박살낼 순 없었다. 디멘션 쿼츠는 리겔이나 리클 형제가 자신의 능력을 극한까지 농축해 만들어내는 것.

본인의 역량을 초월한 현상마저 일으킬 수 있는 만큼, 일단 발동되고 나면 그랜드 급이라 해도 섣불리 파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그랜드 급 오버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콰득! 콰드드득!

유태진이 우주공간 위로 일보를 내딛는 순간 그를 격리한 공간 전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틀리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공간격리라 하더라도, 그 이상의 힘이 가해지면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레민티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진저리 쳤다.

“진짜 터무니없는 괴물이네.”

[시간이 없군!]

리겔은 다급히 움직였다. 다른 것들을 챙길 시간이 없었다. 데리고 온 함대는 물론, 이곳에 오게 된 본 목적인 제물도 서슴없이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과 게리드의 목숨이었다.

우우웅!

품에서 꺼낸 또 다른 디멘션 쿼츠가 공간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아까 전에도 워프를 하기 위해 사용했다가 동생의 것이라 짐작되는 술수로 막히긴 했지만, 이번엔 무려 다섯 개나 된다.

제아무리 워프를 원천 차단하는 수법이라 하더라도, 디멘션 쿼츠 다섯 개를 동시에 발동시킨 것까지 막진 못할 것이다.

끄그그긋!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에 작은 변동중력원이 형성되면서, 웜 홀의 입구가 서서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제 몇 초만 지나면 이곳을 탈출할 유일한 구멍이 완성될 것이다.

리겔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게리드를 자신의 등 뒤에 들쳐 업었다. 그리곤 자신들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웜 홀이 커지길 기다리던 그때, 유태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들의 등 뒤로 와 닿았다.

“어딜 도망치려고?”

우우웅!

아직 공간격리를 다 벗어나지 못한 유태진이지만, 심검의 이치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마음먹는다면 언제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작용할 수 있었다.

레민티아와 리겔이 돌연 수축하기 시작한 웜 홀의 모습에 신음을 터뜨렸다.

“아! 웜 홀이···?”

[변동중력원이 약화되고 있어? 어떻게!?]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공간격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워프를 위해 형성된 웜 홀에 이런 식으로 간섭한다고?

물론 그가 사상기라는 놀라운 힘으로 본 드래곤을 일격에 소멸시키긴 했지만, 이건 그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대체 어떻게 공간을 제어하는 힘에 간섭해서 변동중력원의 형성을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힘의 크기나 규모의 수준을 떠나, 힘의 종류와 성질의 문제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유태진이 사상기라 말한 천룡무상은 그들이 아는 사상기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그것은 중원무림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공절학들과도 그 궤를 달리 했다. 대부분의 심검지도의 무학들은 특정한 형태의 방향성을 갖고 완성되지만, 천룡무상은 그런 게 없었다.

승천하는 용은 풍운조화를 일으키고, 삼라만상을 움직인다. 그것을 토대로 완성된 천룡무상은 시전자의 뜻에 따라 그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가능했다.

본 드래곤을 소멸시킬 때는 용살의 개념을 담아냈었지만, 지금은 여기에 공간봉쇄라는 개념을 담아냄으로서 리겔의 유일한 도주수단을 원천 차단해버린 것이다.

“젠장, 영력만 운용할 수 있었어도···.”

게리드는 아직도 유태진의 강함을 인정하지 못했다. 아니 인정은 하고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강한 줄 알았다면 영능을 봉인당하는 수에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후회하고 있었다.

이번엔 레민티아가 채근하듯 물었다.

“당신, 다른 방도 없어? 방금 그 보석 같은 걸로 힘을 증폭한 것 같은데, 그걸 몇 개 더 쓰면 어때?”

[이 이상은 불가능하다. 디멘션 쿼츠로 출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한계가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견디지 못한다고 봐야겠지.]

“아아··· 그럼 정말로 끝장인 거야?”

워프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웜 홀을 강제적으로 여는 건 리겔에게 많은 부담을 안겨준다. 그런 상황에서 다섯 개나 되는 디멘션 쿼츠 출력을 사용해 여는 것도 상당히 무리한 짓이었다.

그러니 그 이상의 디멘션 쿼츠를 사용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마 제대로 발동되기도 전에 리겔의 몸이 먼저 터져나갈 게 분명했다.

리겔들이 점점 작아지는 웜 홀의 모습에 절망하던 그때였다. 갑자기 이 일대에 기이한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끄긋! 끄그그극!

작은 점 수준까지 수축하며 작아졌던 웜 홀이 돌연 빠르게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젠 작은 아이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성인이 통과할만한 크기까지 커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레민티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이게 갑자기 왜 커지는 거야?”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지금은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야!]

리겔의 외침에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몸을 던질 준비를 했다. 지금은 의문보다는 몸을

빼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놔둘 순 없지!”

고오오오!

공간격리를 이제 막 벗어나던 유태진의 의념이 거대한 검의 형상이 되었다.

그것은 의기검형(意氣劍形). 심검을 구체적인 형태로 형상화한 수법이었다. 무형의 심검에 비한다면 그 형태나 변화가 자유롭진 않지만, 이렇게 형상화할 경우 더 빠르고 강해진다.

어지간하면 산채로 사로잡기 위해 손속에 사정을 뒀지만, 놓치기 직전까지 그들의 목숨을 고려할 순 없었다. 설령 죽게 된다 하더라도 이대로 놓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쿠구구구!

거대한 검형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공간을 가로질러 나갔다. 그 목표는 웜 홀 안으로 몸을 던지고 있는 리겔들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