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42화 (343/448)

14권-17화

-크우우우!

본 드래곤이 괴롭다는 듯 몸을 뒤틀며 요동쳤지만, 한번 시작된 붕괴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속화 되면서 빠르게 그 본래의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아니, 내 본 드래곤이!?”

게리드가 아연실색한 얼굴로 부르짖었다.

본 드래곤은 그가 보유한 언데드 군단 중 가히 최강이라 자부할 수 있는 비장의 한수였다. 특히 여러 보조마법과 네거티브 플레인의 무궁무진한 언 홀리 파워를 연동시킬 경우, 그 파괴력은 어지간한 그랜드 급 오버러를 크게 웃돌고도 남는다.

그런데 그런 본 드래곤이 부서져 내린다고? 자신이 믿고 신뢰하던 비장의 한수가 이렇게 허무하게?

불과 10여 초도 지나지 않아 본 드래곤은 그야말로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더 이상 그 거대한 형상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유태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검을 거둬들였다.

“결국 이정도군. 제아무리 드래곤과 같은 대단한 초월종도 영육이 멀쩡하지 않으면 이게 한계라는 거겠지.”

잠시간 그 텅 빈 자리를 참담한 표정으로 응시하던 게리드가 유태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렸다.

“···대체 네놈 뭐냐? 어떻게 내 본 드래곤을 일격에!”

“그걸 묻는 걸 보면 너도 그런 부류인 모양이군. 자신이 상정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하면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그런 헛똑똑이들처럼 말이야.”

조소어린 그 대꾸에 게리드의 얼굴이 얼어붙은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즉시 냉정을 되찾은 것이다.

그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잠시 흥분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방금 본 드래곤을 쓰러뜨린 한수는 이해할 수가 없군.”

“어지간히도 알고 싶은 모양이지? 정 그렇다면 말 못해줄 것도 없지.”

냉정을 되찾은 상황에서도 이유를 궁금해하는 그 말에 유태진은 픽 웃으며 말했다.

“심검이란 수법이다. 이곳 식으로 표현한다면 사상기라고 해야 하나?”

“으음··· 제아무리 사상기라 해도 그렇지 본 드래곤을 브레스와 함께 일격에 쓰러뜨리는 게 가능하다고?”

“물론 그것만 가지고는 쉽지 않았겠지. 그래서 난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담아냈다. 바로 용살(龍殺)의 개념이지.”

“용살을!?”

게리드는 더더욱 믿기 힘들다는 얼굴이 되었다. 물론 마법 중에는 용살의 저주처럼 어떤 특정 대상에게만 더 강력하게 적용되는 마법이 더러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어려웠다. 본 드래곤을 위축시킬 수는 있어도 일격에 완전히 가루로 만들 정도의 힘은 없었던 것이다.

‘그럼 저주가 아니라··· 정말로 개념의 형태로 용살을 적용시켰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단순히 어떤 특성의 저주를 부여하는 것과, 그에 해당하는 특정 개념을 부여하는 건 차원부터가 다르다.

그건 술식으로 현상을 만들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 상위인 인과섭리에 간섭할 수 있어야 가능한 영역이었다.

“···정말 믿기 힘든 소리군. 무공이란 건 그런 것까지 가능한 건가?”

자신이 지금 본 대로라면 유태진은 그랜드 급의 테두리에 놓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강자였다. 하지만 그랜드 급을 아득히 웃돌 만큼 강하면서도, 그에게서 반신 급의 존재들과 같은 초월적인 격이나 면모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본 드래곤이 일격에 쓰러진 것도 납득이 간다.

‘정보로 알던 것보다 더 위험천만한 자였구나.’

지금까지 유태진에 대한 정보는 수차례 접했지만, 이 정도로 위험인물이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운이 좋거나 혹은, 예상했던 것보다 실력이 좋아서 자신들의 계획을 우연찮게 망친 정도로 여겼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 평가를 달리해야 할 듯싶었다.

“자, 그럼 설명은 충분히 됐겠지? 이만 내 손에 붙잡히거나 죽어줬으면 하는데. 굳이 내 소망을 말하자면 순순히 항복했으면 바랄 게 없겠어. 나라도 너 정도의 강자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건 쉽지 않거든.”

유태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조롱인지, 아니면 정말로 항복 권유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건네왔다. 하지만 게리드는 이에 분노하는 대신 냉정하게 받아쳤다.

“항복 따윈 없다. 애당초 네놈에게 붙잡힐 생각도 없으니까.”

“그래?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 하지만 과연 내 손에서 살아서 도망칠 수 있을까? 희망사항은 자유라지만, 현실을 봐야지.”

“그래, 네놈이 더 강하다는 건 안다. 본 드래곤을 그렇게 쓰러뜨린 이상 언데드 군단을 총동원하더라도 승산은 적겠지. 하지만 작정하고 도망치기로 마음먹은 날 과연 잡을 수 있을까?”

그랬다. 게리드는 언제 어느 때든 자기 자신만큼은 몸을 빼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유태진이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고는 하나, 그의 몸은 하나뿐이다. 본 드래곤처럼 일격에 쓸려나가지 않도록 언데드 군단을 이 일대 주역에 넓게 펼친 뒤, 쉴 새 없는 파상공세로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면 도주할 시간 정도는 충분히 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제물이나 계획도 중요하긴 하지만,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할 순 없었다.

-크르르!

-크아앙!

게리드의 언데드 군단이 이 주역 전체로 서서히 퍼져나가며 포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단숨에 쓸려나가지 않고 발목을 붙잡겠다는 의도가 고스란히 엿보이는 광경이었다.

“네 생각이 눈에 훤히 보이는군. 그래, 나라도 널 붙잡는 게 쉽진 않겠지. 저 소속불명함에 언데드 군단까지 가세하면 여러모로 성가신 건 사실이니까.”

유태진은 가볍게 혀를 차면서 그 사실을 인정했다. 게리드 정도의 강자가 일단 작정하고 도주를 선택하면 사로잡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입매를 가볍게 비틀어 올린 그가 그 뒤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하지만 말이다. 내가 왜 지금까지 네 말을 다 받아줘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생각하나, 응?”

“뭐?”

생각지도 못했던 그 말에 게리드가 일순 섬뜩함을 느꼈다.

그랬다. 본 드래곤의 소멸에 당황해 빈틈을 드러냈던 그 순간이 유태진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만일 그때 공격을 감행했더라면 자신을 사로잡진 못했을지언정, 최소한 깊은 중상이나 최대 치명상도 입히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헌데도 놈은 그냥 놔두었다. 오히려 자신의 의문에 일일이 대답까지 해주면서 여유를 부렸다.

그런데 그게 다 의도한 바였다고?

지금까지 수많은 수라장을 경험하면서 보다 예리해진 그의 직감이 경종을 울려댔다. 지금 이 순간이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게리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꺼내들었다. 위기의 순간에 사용하려던 각종 아티팩트와 비장의 술식들이 다양한 역장과 배리어를 구축하면서 그를 겹겹이 둘러싸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는 혹시 모를 저주나 개념에 대한 방어술식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뒤이어 들려온 유태진의 한마디는 더없이 서늘하게 와 닿았다.

“늦었어.”

“커억!”

그 순간, 게리드는 전신이 파열하는 듯한 격통에 휩싸였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이나 물리적으로 가해진 공격이 아니었다. 정체조차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어느 순간부터 그의 내부를 깊이 파고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여··· 영맥이!?”

애써 고통을 참아가며 자신의 내부를 관조해본 게리드가 돌연 경악을 터뜨렸다. 평생 갈고 닦아온 영맥을 타고 흘러야 할 영력이 마치 돌처럼 굳어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유태진이 입을 열었다.

“심인금제술(心印禁制術)이라는 것이다. 심검지도의 의념으로 네 심중에 금제를 거는 수법이지.”

“말도 안 된다! 나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걸 수 있는 금제라고? 사상기라 해도 이건 불가능해!”

게리드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이능 중에는 온갖 기상천외한 것들이 넘쳤지만, 그래도 이능은 결국 영력에 기반하고 있는 힘이었다. 헌데도 그랜드 급인 자신이 영력의 미세한 유동조차 느낄 수 없는 금제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네가 아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나? 우주는 넓고 온갖 기상천외한 것들이 즐비하지. 네가 당한 것도 바로 그런 것 중 하나고.”

“······.”

게리드는 이를 악물며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 했지만 체내의 영력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래선 마법이든 뭐든 영능을 사용한다는 건 자체가 불가능했다. 물론 외부의 기운을 끌어들일 경우 몇몇 저급한 수준의 마법은 어찌어찌 억지로 사용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래봐야 D랭크 오버러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할 터.

이래선 유태진의 손아귀에서 도주한다는 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얌전히 사로잡혀줬으면 좋겠다. 네게 들어야 할 말이 아주 많거든. 아까 말했던 그 대업이란 정체도 말이야.”

절망감에 몸부림치던 게리드는 유태진의 그 말에 퍼뜩 정신을 되찾았다.

[대업]. 그것만큼은 절대 발설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아니 자신이 설혹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누설한다는 건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네놈이 감히!”

분통을 터뜨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도 기세는 좋군. 하지만 포로가 된 뒤에는 그 뻣뻣한 태도도 달라질 거다.”

유태진이 천천히 다가갔다.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언데드 군단도 게리드가 통제능력을 상실하면서 이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그 순간, 어떤 실낱 같은 궤적이 유태진과 게리드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것은 공간을 찢어 만들어내는 공간단열의 현상이었다.

이것만큼은 유태진도 무시하지 못했다.

“결국 같은 편이다 이건가?”

유태진은 우주공간을 태연히 밟으며 뒤로 물러섰다. 공간단열이 무서운 수법이긴 하나, 제대로 적중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 틈을 타 가면인이 게리드의 앞을 가로막듯 나섰다.

[그가 사로잡히게 놔둘 순 없다.]

유태진은 그런 리겔의 모습을 씁쓸한 얼굴로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게 나올 거라 예상은 했었지. 지금까지 네 행보는 항상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생각이지? 네 동생 리클은 우리 편에 서서 너를 막기로 했다. 네가 더 이상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

유태진의 입에서 리클이 언급되는 순간, 리겔의 몸이 일순 미미하게 떨렸지만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네놈이 끝까지 그 편을 드는 건 좀 불쾌하지만, 어떻게 보면 차라리 잘 됐군. 이왕 이렇게 된 거 너와 그 뒤에 있는 녀석을 같이 생포해 데려가도록 하지. 동생의 얼굴을 직접 보면서 참회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유태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뻗었다. 리겔도 마이스터 급 이상의 강자이긴 하지만, 공간을 제어한다는 까다로운 영능의 특성을 제외한다면 제압하는 게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젠장!’

리겔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유태진의 오른손을 보며 내심 욕지기를 내뱉었다.

예전에 상대했던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어떻게든 공격을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이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손을 뻗어오고 있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데도, 무시무시한 위압감 앞에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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