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13화
공간을 다루는 능력자는 비율이 그리 높진 않지만, 우주적인 규모로 보면 그 수가 그리 적은 것만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공간 능력자들 중에서 이렇게까지 특출한 수준에 이른 자들은 드물었다.
“그랜드 급도 아니면서 공간을 저렇게까지 자유롭게 주무르다니. 심지어 공간단열까지 사용했어. 이 분야의 최고봉이라는 크리스첸 가문 사람들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우주공간을 이동하며 기습을 시도했던 사내, 이올데도 기가 막히긴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진 능력은 자기 자신에 국한된 제한적 차원전환능력. 자신의 존재를 이면차원으로 유리시킴으로서 기척과 형상, 그리고 존재감을 완전히 지워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는 고유스킬이었다.
그래서 인비져블 어새신이란 명성까지 얻었는데, 지금 저 자의 수법은 제한적 차원전환능력을 가진 자신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현실과는 완전히 유리된 이면차원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공간단열이니. 이건 거의 사기적인 수준의 공간제어능력이 아닌가.
게다가 성가신 건 가면인 뿐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있는 여성도 만만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몇 번 그녀의 능력에 당한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해져왔다. 단순히 골치가 아파서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그것은 레민티아가 가진 고유능력이 바로 정신계였기 때문이었다.
“저 여자도 그래. 계속 신경을 곤두세워가며 정신방벽을 쌓아야 한다니 어지간히도 까다로운 상대야.”
물리적인 공격을 방어하는 데엔 그 누구보다 자신 있는 마이트였지만, 이처럼 정신세계를 공략해오는 수법에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바니아스 함대의 다른 오버러들은 이 싸움의 근처에도 다가오지 못했다. 괜히 접근했다간 레민티아에게 정신을 제압당해 적으로 돌아설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슬슬 한계가 보이는군.”
이올데의 읊조림처럼 저들이 제아무리 강력한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둘 뿐이라는 한계는 명확했다. 이쪽은 마이스터만 셋에 함대의 보조까지 받는 상황인 만큼 저들을 제압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가면인과 레민티아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경계했다.
[이래선 끝이 없군. 셋의 호흡이 너무 절묘해.]
“맞아. 저 셋이 평범한 마이스터였으면 제압 하고도 남았을 텐데. 셋의 궁합이 지독할 정도로 좋아.”
각 개인의 능력만을 냉정하게 비교해 본다면 가면인과 레민티아보다 명백히 두수 이상 아래였다.
하지만 저들 셋이 펼치는 합공은 그런 역량의 차이를 커버하고도 넘쳤다. 수많은 실전을 통해 그들 셋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출 수 있게 되었고, 이젠 셋이 아니라 다섯이나 여섯에 가까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신, 뭔가 방법 없어?”
레민티아가 가면인에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가면인이 어렵사리 답을 내놓았다.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조금 시간이 필요해.]
“무슨 방법인데?”
[아군을 불러들일 생각이다. 그를 불러낼 수만 있다면···.]
레민티아로스는 가면인이 말하는 그가 누군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아군이 한 명이라도 늘어난다면 뭔가 방법이 생길 것도 같았다.
“좋아. 그럼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주겠어. 얼마나 필요한데?”
[적어도 3분 정도.]
“아, 진짜! 딱 3분이야. 그걸 초과하면 각오하라고! 나도 그 이상은 못 버텨!”
3분을 벌어달라는 그 말에 레민티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지만, 지금으로선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각오를 다진 그녀는 이를 악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녀가 가진 정신계 스킬의 총화라 할 수 있는 것.
인간이 가진 정신세계를 현실 공간에 덧씌우는 이것이야말로, 혼돈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츠츠츠츠!
공간이 기이한 형태로 침식되고 시간마저 그 위에 새로운 형태로 덧씌워진다. 그것은 일대 공간을 아스트랄 사이드(정신세계)로 뒤덮어버리는 [혼세의 공방]이었다.
이 안에서는 모든 현실의 공격은 통용되지 않으며, 반대로 상상에서 비롯된 것들은 말 그대로 현실이 된다.
그리고 그 주도권은 혼세의 공방을 구축한 장본인인 레민티아에게 있었다.
눈앞의 현상을 목도하게 된 마이스터 3인방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설마 사상구현?”
“일종의 사상현계 구축이군. 아스트랄 사이드가 확장되고 있어. 아니 아스트랄 플레인인가?”
마이스터 급에 이르러 그 이후의 경지인 그랜드 급을 향해 정진하고 있는 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 상념을 극대화하여 현실을 덧씌우는 새로운 사상을 구현한다는 사상기의 강력함과 그 위험성을!
사상기의 형태와 종류는 각 개인마다 다양하고 천차만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통되는 특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 레민티아의 것처럼 이렇듯 일정 공간을 자신만의 세계로 덧칠하는 계통을 사상현계라고 한다. 그렇게 구현된 세계는 시전자의 심상과 이능에 따라 다양한 특성과 형태를 가지며, 섭리의 복원력에 의해 철거되기 전까지는 현실과 완전히 격리된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손을 뻗는 순간, 그들 세 사람에게 무시무시한 중압이 걸렸다. 그것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능력이었다.
쿠우웅!
“우욱!”
“젠장!”
다들 어떻게든 저항하고자 했지만 이곳에서는 기존의 모든 능력이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자유로운 자는 오로지 레민티아 한 사람 뿐이었다.
“칫, 빌어먹게 성기시군.”
마이트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현실에서 현상을 일으키는 이능이 구현되지 않는다는 건 치명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그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경험해봤으며, 대응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우우웅!
사상현계가 놀라운 수법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이진 않았다. 이 또한 결국 영능에서 비롯된 것이며, 영력을 기반을 둔 것은 다를 바 없었으니까.
현실에서 현상을 일으키는 스킬 자체는 유사 아스트랄 플레인이 된 이곳에서는 거의 먹통이 되지만, 순수하게 영력을 운용하는 방법 자체는 여전히 사용이 가능했다.
“흐압!”
전신을 타고 충만히 흐르는 영력의 흐름이 중압을 떨쳐냈다. 제아무리 현실 위에 가상의 세계를 덧칠하는 사상현계라 하더라도, 결국 힘의 총량이나 격은 시전자의 수준을 크게 넘어설 순 없는 법이었다.
특히 레민티아처럼 상상하는 바를 그대로 구현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특정 계통이나 일정 법칙에만 특화된 사상현계라면 시전자의 경지를 아득히 넘어선 특성이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겠지만, 이처럼 만능에 가까운 것이라면 그만큼 발현강도는 낮아지기 마련일 수밖에 없었다.
중압 다음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공격이 날아들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이능이 그들 앞에 구현된 것이다.
이를 본 마이트는 자신의 근육질 몸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면서 앞으로 나섰다.
“어떻게든 버틴다. 어차피 이런 식의 사상현계는 오래 못가!”
현실 위에 심상의 세계를 덧씌우는 사상현계는 오랜 시간 구현할 게 못되었다. 현실의 섭리가 가진 수복력이 그러한 괴리를 용납하지 않고 이를 원상태로 되돌리려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오래 구현해봐야 몇 분 남짓.
그 시간동안 다양한 이능들이 그들의 전신을 유린하듯 휘몰아쳤다.
하지만 쉽게 쓰러지거나 하진 않았다. 마이트를 중심으로 뭉쳐서 영력의 구조를 보다 밀도 있고 조밀한 형태로 바꾼 그들의 방어력은 평소의 몇 배에 달한 상황.
단순히 방어에 치중한다면 레민티아 혼자 퍼붓는 공격을 버텨내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 뒤로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부터 세계를 침식했던 사상의 현상이 걷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 레민티아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었다.
“헉헉···! 아직 멀었어?”
[잘 해줬다. 이제 다 마무리군.]
그렇게 말한 가면인의 양 손 위로 일그러짐이 생성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공간의 왜곡이 아니었다. 특정 좌표와 이곳을 다이렉트로 잇는 공간이동의 조짐이었다.
“젠장,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막아!”
레민티아의 [혼세의 공방]이 철거되면서 간신히 자유를 되찾은 마이스터 3인방이 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려 했지만, 그 전에 공간이동이 완료되었다.
고오오오!
아득히 먼 우주와 이곳이 직통으로 연결되면서 드디어 한 사람이 소환되었다.
그렇게 소환된 자는 마치 어둠 그 자체를 전신에 두른 듯한 인영이었다. 불길하기까지 한 칠흑빛 아우라가 피어올리고 있는 검은 로브의 사내는 두건에 가려진 얼굴 사이로 흐릿한 미소를 드러내었다.
“꽤나 다급했던 모양이군. 리겔. 나를 이렇게까지 불러내다니.”
[제물을 인수받으러 왔다가 적들에게 기습을 당했다. 어쩔 수가 없었소.]
간단히 사정을 설명하는 그 말에 로브의 인물이 주변을 살피고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가? 보니 연합의 함대군. 그리고 저 밑에 있는 함대는 또 어디지? 아무튼 꽤 곤욕을 치른 모양이구나.”
[일처리가 미숙했소.]
변명하지 않고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는 그 말에, 로브의 사내는 질책하지 않았다.
“됐다. 지금은 이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겠군.”
그 말과 동시에 로브의 사내의 시선이 마이스터 3인방과 바니아스 함대를 향했다.
“뭐지? 새로운 적인가?”
“···섣불리 접근할 수가 없어. 뭐지, 이 무시무시한 기운은···?”
리겔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였던 마이스터들은 곧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저지에 실패한 것은 물론, 그들 앞에 나타난 새로운 인물 때문이었다.
얼굴은 물론 전신을 가리고 있는 로브 탓에 상대의 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지만, 이것 한 가지만큼은 명확했다.
저 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강자였다. 어렴풋이 드러난 존재감만으로도 그들 셋을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마이스터 셋의 면모를 한 차례 훑어본 로브의 사내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뱉었다.
“확실히 저 정도면 네가 고생했을 만도 하군. 연합에서 어떻게 냄새를 맡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를 상정하지 않은 건 아니지.”
화아악!
그 순간, 로브의 사내로부터 풍겨오던 존재감이 폭발적으로 상승되기 시작했다. 이건 저자가 지금까지 갈무리하고 있던 힘을 본격적으로 개방하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이었다.
“큭! 저항력을 끌어 올려! 최대로!”
마치 먹물이라도 푼 듯 번져나가는 거대한 기운 앞에 마이트가 동료들을 향해 이를 악물며 외쳤다. 그러자 다른 두 사람도 반사적으로 기운을 끌어올려 저항했다.
단순히 기운을 해방했을 뿐인데도, 저자의 기운에 담긴 저주와 독기가 온 몸을 침식해오고 있었다.
‘설마 그랜드 급의 흑마법사인가? 아니면 네크로맨서?’
이런 지독할 정도로 악의에 찬 기운을 다루는 자라면, 생각나는 건 그들 밖에 없었다. 언 홀리 파워로 통칭적으로 구분되는 이 힘은 생명체에게는 극히 해로우며, 접하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위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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