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12화
‘문제는 위성 아렌고타에 있을 리겔과 그 여자인데···.’
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리겔의 까다로움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에 본 적 있던, 자원위성 지부를 맡고 있는 그 여자도 그리 만만치 않아 보였다. 적어도 방금 상대했던 수호방위대의 마이스터들보다는 더 강할 것이다.
하지만 관리국의 특무함대 바니아스의 전력도 결코 만만치 않다. 함대의 성능과 화력은 다른 여타 함대보다 더 강력한 편이며, 거기에 탑승하고 있는 오버러들의 질적 수준도 다른 부대에 비해 더 월등했다. 마이스터 급 실력자만 무려 셋에다가 마스터 급이라 칭해지는 A랭크 10명, 그리고 B랭크에서 C+랭크에 달하는 정예 급 오버러만 200에 달했다.
그 정도 전력이면 설령 그랜드 마스터와 맞닥뜨린다 하더라도 팽팽하게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이 놓이질 않는군.’
유태진은 계속 경고를 보내오는 자신의 날카로운 직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현재의 정황만 본다면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지만, 어떤 변수가 끼어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갔다. 유태진은 결단을 내렸다.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그렇게 내뱉으며 돌아보자, 사람들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유태진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자지러지며 바닥 위에 나뒹구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히이익!”
“어떻게! 더 이상 피할 데가 없어!”
“이런 곳에서 이 꼴이라니! 이젠 정말 끝인가···.”
경매장 전체가 봉쇄된 상황에서 그들은 더 이상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아니, 애당초 자원행성을 벗어날 수조차 없다고 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레이스컬의 스타 브레이커 함대가 그들이 타고 온 함선들을 박살내거나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맨몸으로 대기권을 돌파해 우주를 비행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도주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때 마침 경매장 외부에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들은 레이스컬의 전투부대였는데, 마침 외부의 제압을 마치고 경매장 내부로 이제 막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자, 내부로 진입한다! 보이는 대로 전부 제압해!]
[확보된 참석자 명단에 오른 자들은 가급적 생포해라. 만일 저항하면 팔다리 정도는 날려버려도 된다.]
[서둘러! 한 놈도 놓쳐선 안 된다.]
“이제야 왔나?”
유태진은 그 즉시 환영봉쇄진을 해제시켰다. 저들이 온 이상 경매 참가자들을 계속 가둬두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안으로 들이닥친 전투부대원들이 거친 기세로 참석자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으윽! 이놈들!?”
“멈춰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네놈들 어디 소속이냐!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그들의 거침없는 손속에 참석자들은 무력하게 제압되었다. 간혹 그들을 경호하기 위해 붙어있던 영능력자들이 저항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레이스컬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전투부대원들을 이긴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하물며 머릿수까지 역부족인 상황에서는 바위에 계란을 부딪치는 격이라 해야 할 것이다.
참석자들을 제압하던 전투부대원들이 유태진 앞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을 제압하려고 움직이려던 그들에게 홀로그램 신분증을 제시했다.
“관리국 소속 독립함대 인피니티 킹덤의 사령관 유태진이다. 자네들도 사정은 들었을 텐데?”
유태진의 신분증을 보고서야 그가 적이 아님을 알게 된 부대의 지휘관이 급히 나서서 사죄하였다.
“앗! 죄송합니다. 유태진 사령관님. 관리국 소속 분과 합동작전 중이라는 건 상부로부터 하달 받아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설마 사령관님께서 직접 나서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 그런가? 몰랐다면 어쩔 수 없었겠지.”
유태진은 베이노아 수상이 이번 작전을 얼마나 철저히 비밀에 붙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자원행성에 잠입해 있는 자신의 신분조차 수하들에게 알리지 않을 정도면 이번 작전의 내막을 아는 자도 거의 없다는 말이 된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베이노아 수상에겐 자신의 정치생명을 건 작전이었을 테니까.’
이번 작전이 자칫 실패할 경우, 그가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수상직에서의 퇴진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철저히 비밀을 엄수하며 신중을 기할 수밖에.
유태진은 참석자들의 압송을 그들에게 맡긴 뒤 경매장을 나섰다. 여기서 자신이 할 일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콰아앙! 콰콰콰!
바니아스 함대와 소속불명 함대간의 격전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무시무시한 화력이 투사되면서 이젠 아렌고타까지 그 피해가 확산되고 있었다.
“으음, 생각보다 제압이 쉽지 않군.”
바니아스의 오르트 메이슨 사령관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분명 전력은 자신들이 크게 앞서고 있었다. 함의 숫자도 거의 두 배에 가깝게 더 많은데다, 보유하고 있는 오버러의 질과 숫자도 이쪽이 더 많았다.
그런데도 압도하지 못하는 것은 가장 앞장서서 싸우고 있는 바로 저들 둘 때문이었다.
가면을 쓰고 있는 정체불명의 사내와 할파스 상회의 자원행성 지부장으로 알려진 레민티아.
그들의 실력은 어지간한 마이스터를 웃돌았으며, 특히 가면인의 능력적 특성은 보통 상대하기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전력적으로 우위에 있으면서도 싸움이 점점 지지부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르트 메이슨 사령관이 내심 곤혹스러워하고 있을 때, 가면인과 레민티아 측도 속사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점점 꼬이는군. 시간을 끄는 데엔 성공했지만 이래선 도주하기가 어렵겠어.]
현재 리겔은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 억양만 봐도 상황이 좋지 못함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도망치기만 하면 끝이지만, 난 미칠 지경이라고요! 지금 저기 아래 봤죠? 이름도 모를 전함들이 내 자원행성을 완전히 장악했다고요! 내가 지난 수십년 동안 노력해온 게 다 끝났다고요!”
레민티아는 화가 치민다는 듯 이를 갈아붙였다. 이곳에 지부를 세운 것도, 지금처럼 전 우주적인 규모의 불법 경매지로 키워낸 것도 바로 그녀였다.
헌데 수십 년 동안 쏟아온 노력이 지금 바로 눈앞에서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니 원통하다 못해 미칠 지경일 수밖에 없었다.
[화내고 있을 여유가 없어. 지금은 이곳을 벗어날 생각부터 하는 게 좋을 거다. 이대론 우리 둘 다 포위되어서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니까 입 다물어! 더 화가 나니까.”
한 차례 거친 말을 내뱉은 레민티아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자들의 면면에 억지로 화를 억눌러 삼켰다.
짜증나긴 하지만 가면인의 말은 지극히 정론이었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선 보다 냉철한 판단이 필요했다. 지금도 자신을 둘러싼 오버러들을 보라.
하나같이 방심할 수 없는 실력자들이 아닌가.
특히 세 명의 마이스터와 열 명의 마스터 급 오버러들의 공세는 버티는 것조차 벅찰 정도였다.
또다시 사방에서 밀려오는 공세가 그들을 더욱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위이잉!
사방에서 밀려오는 섬광줄기가 그들을 압박해온다. 눈으로 좆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빠른 이 공격은 시전자의 뜻에 따라 난반사를 거듭하면서 가면인과 레민티아의 활동 범위를 점점 축소시키고 있었다.
그건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뇌옥과도 같았다.
“하하하! 이제 그만 항복하지 그래?”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자신의 손 위에 또 다른 빛을 띄워 올렸다. 일단 타깃이 정해지고 나면,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고유스킬인 샤이닝 프리즌의 보유자, 덴켄 쥬사이더였다.
빛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그의 공격은 어디나 닿을 수 있으며, 일단 난반사를 거듭하며 일정 범위의 공간을 장악하고 나면 그 안에 든 대상에 한해선 언제든 즉발적으로 유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복잡하면서도 현란하게 난반사를 거듭하며 공간을 입체적으로 옭아매고 있는 저 빛줄기들은 가면인과 레민티아의 활동범위를 완벽하게 제약하고 있었다.
[성가시군!]
가면인이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우주공간이 이지러지면서 날카로운 균열이 생겼다. 그것은 난반사 하던 빛을 거침없이 집어삼켰다.
“이미 그 수는 몇 번이나 봤어!”
공간을 일그러뜨려 빛을 흡수하거나 난반사의 궤도를 흩트리는 수법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젠 익숙하게 대응하였다.
그의 손 위에 떠올라 있던 빛이 그 즉시 쏘아져 나갔다. 공간의 균열로 사라진 그 자리를 미리 준비해둔 빛을 쏘아내 다시 채워넣은 것이다.
이를 본 레민티아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내뱉었다.
“결국 제자리잖아?”
[점점 대응이 더 빨라지고 있군. 시간을 끌수록 이쪽이 불리해져.]
가면인과 레민티아의 고유 능력이 특출한 건 사실이지만, 적들도 거기에 적응하면서 점점 상대하기 까다로워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분석당하다 보면 당하는 건 이쪽이 될 것이다.
저쪽은 머릿수에서부터 크게 우위인데다, 함대의 전력조차 더 압도적이었다. 어떤 조건을 봐도 이쪽이 이길 확률은 가히 1할에도 못 미쳤다.
그때, 레민티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가면인의 귓전을 흔들었다.
“앗, 피해!”
[음?!]
가면인은 그 외침을 듣자마자 생각해볼 것도 없이 즉시 몸을 날렸다. 그러자 그가 있었던 자리 위로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날카롭게 공간을 관통하는 광경이 보였다.
“칫, 또 피했나?”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재빨리 물러섰다. 나름대로 치명적인 기습이라 생각했는데, 허를 찔러가던 그 순간 가면인이 몸을 빼버린 것이다.
“이것들이!”
레민티아가 두 눈에 불을 켜며 즉각 영력을 분출시켰다. 막강한 영력이 해일처럼 번져나간 순간, 기습을 해온 사내는 물론 다른 오버러들까지 신음을 토하며 인상을 썼다.
“큭!”
“젠장!”
가면인은 그들이 틈을 보인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우주공간을 화폭 삼아 선을 긋는 순간. 그것은 공간을 뛰어넘는 하나의 참격이 되어 그들을 베어나갔다.
끄그그긋!
시공간을 비틀어 만들어낸 공간단열의 흔적!
허나 모든 물질을 절단할 수 있는 강력한 한수는 누군가의 손길 앞에 가로막혔다.
콰드드득!
바위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게 물든 듯한 육체를 보유한 사내가 거대한 참격을 그대로 받아내었다. 공간단열의 참격은 주변을 일그러뜨리며 전진하려 했지만, 사내의 방어를 넘어설 순 없었다.
결국 시공의 복원력에 의해 기세가 누그러든 공간단열은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지독한 위력이군. 차라리 전함의 함포를 받아내는 게 더 나을 정도야.”
가면인의 공격을 방어해낸 사내가 혀를 내두르며 투덜거렸다. 그가 공간단열을 막느라 내민 양 팔에는 붉은 선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배틀 슈트의 응급치료 기능에 의해 완전히 지혈된 상태긴 하지만, 상처가 가벼운 건 결코 아니었다.
그는 바니아스 함대 소속의 마이스터 중 한 명인 마이트 게인. 전함의 주포조차 맨몸으로 상처 하나 없이 막아낸 적 있는 전열방어에 특화된 능력자였다.
물론 공격능력은 대단치 않지만, 그의 방어능력만큼은 거의 그랜드 급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런 그가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것을 본 덴켄이 혀를 내둘렀다.
“역시 저건 특성이 너무 사기적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