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06화
* * *
어느덧 연수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경매를 일주일 앞둔 때부터는 실습체험삼아 현장에 직접 나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종의 견습 과정이었다.
유태진은 되도록 조용히 지내면서 업무를 배워나갔다. 업무라고 해 봐야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대처요령이었다.
현재 유태진이 몸담게 된 소속은 수호방위부. 정확하게 말하자면 할파스 상회의 행사를 방해하거나 위해를 가하는 일을 막는 부서였다.
이번 경매도 마찬가지였다. 우주 각지에서 모여드는 고객들을 응대하는 한편, 경매의 진행에 방해되는 자들을 신속히 처리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인 것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내일은 경매가 개최되는 날이다. 모두들 철저한 자세로 임무에 임하도록.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할 수 없으며,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신속히 처리한다. 알겠나?”
“예!”
수호방위부를 대표하는 대장의 단호한 그 말에 부대원들이 목소리를 높여 대꾸했다. 수호방위대장은 무려 마이스터 급 강자로서, 나름대로 뛰어난 실력 때문에 특채로 채용된 수하들을 압도할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수호방위부는 이렇게 엄정한 체계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견습들은 선임의 말에 철저히 따른다. 혹시라도 문제를 일으키거나 잘못된 대응으로 고객들에게 불쾌감을 줄 경우 그에 대한 응보가 따르게 될 것이다. 임금차감은 물론 여러 가지로 불이익이 주어지겠지. 앞으로 이곳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면 조심하는 게 좋을 게야.”
그렇게 말하면서 유태진과 울바크 일행이 있는 쪽을 응시했다. 신참인 그들에게 특별히 조심하리고 눈치를 주는 것이다.
유태진은 그 말을 귀담아 듣는 척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미 준비는 모두 끝났다. 베네트 국장으로부터 응답도 받았고. 작전은 내일 정오인가?’
작전 개시 시각은 경매가 시작되는 낮 정오로 확정되었다. 경매 시작과 함께 바로 덮쳐서 제압하고, 경매에 참석한 자들도 모조리 붙잡아 조사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변수인데··· 아직까진 딱히 알 수 있는 게 없군.’
경매를 개최하는 할파스 상회의 전력은 대략 파악해둔 상황이었다.
놀랍게도 마이스터 급 실력자만 무려 다섯에, A랭크 급 영능력자 40명. 그리고 그 이하의 영능력자는 500명 이상이었다. 심지어 그 500명조차 대부분 C랭크 이상으로서 어지간한 함대의 전력을 크게 웃돌 지경이었으니, 할파스 상회가 비공식 경매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쏟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전부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유태진이 밤마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피긴 했지만, 모든 것을 확인하기에는 이곳 자원행성의 규모가 너무 컸다. 그리고 이 자원행성뿐만 아니라, 주변의 위성들까지 생각하면 또 다른 전력이 대기하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관리국에서 보내올 전력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되겠지.’
그리고 또 다른 희소식은 연방공화국의 수상인 베이노아도 이번 작전에 함께 동참한다는 것이다.
베네트 국장이 비밀지부를 통해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공화국의 의용정치조직 레이스컬에서 수십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부대를 파견한다고 했다.
그 규모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구체적인 정보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베이노아 수상이 자신 있게 파견한 함대였다. 적어도 군부의 어지간한 정예 함대 이상의 전력은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공화국 내의 부정부패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얼마나 칼을 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무튼 베이노아 수상이나 레이스컬도 참 대담한 짓을 하는군. 명목상 PMC(민간군사기업)라곤 하지만, 일개 정치조직이 잘도 그런 사병조직을 육성하고 있었다니.’
하긴 그만한 역량을 갖고 있으니 할파스 상회가 공화국 내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상황에서도 그만한 위치까지 올라설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할파스 상회에게 찍히고도 수십 년 이상 살아남아 세를 유지한 곳은 레이스컬과 베이노아 수상이 유일했다.
‘일단 내일 이곳을 덮칠 전력은 그만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 문제는 리겔이군.’
리클의 형이자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찬 리겔의 능력은 여러모로 까다로웠다. 공간과 차원에 관련된 이능을 가진데다, 본인의 역량보다 더 큰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증폭수단인 디멘션 쿼츠까지 있다.
여기 있는 할파스 지부의 전력보다 오히려 리겔 하나가 더 까다로울 수 있었다.
내일 있을 경계업무에 대한 프로필이 끝난 뒤, 전부 해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 업무가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기존의 일정대로의 업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지긋지긋해.”
“대장의 잔소리는 아주 귀에 박혔다니까. 경매만 벌써 몇 번이나 치러봤는데 또 잔소리야.”
“무슨 우리가 신입인 줄 알고 있어. 여기서 구른 지가 벌써 6년이군.”
대장에 대한 불만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대원들은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들이 향한 곳은 각자 맡고 있는 업무지가 아니라 사내의 매점이었다.
유태진을 비롯한 신입들은 내심 어이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이제 겨우 견습에 불과한 자신들이 선임이 하는 일에 뭐라 지적할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매점에 들어서자마자 선임들이 신입들에게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뭐 해? 차나 타 와라. 아니 그보다는 시원한 맥주가 좋겠군. 넌 어때?”
“좋지. 안 그래도 잔소리만 몇 시간동안 주구장창 듣느라 머리가 무거운데 맥주가 좀 들어가면 시원해질 것 같아.”
엄연히 업무시간인데도 태연히 음주를 하겠다는 선임들의 그 말에 유태진은 황당하단 표정이 되었다. 그러자 그 표정이 꽤 불쾌하게 보였던지, 선임 중 하나가 와락 인상을 썼다.
“이 새끼 봐라. 아주 넋을 빼놓고 있네. 신입이란 게 벌써부터 빠져가지고 말이야. 맥주 좀 사 오랬더니 그냥 씹냐? 좀 눈치껏 해라. 멍청아. 어리바리하지 말고.”
쫘악!
손으로 유태진의 뒤통수를 한 차례 세게 후려갈긴 선임대원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자, 가서 맥주를 사온다. 선임의 말에 불복종하는 녀석은 알지?”
“···예.”
유태진은 내심 기가 막혔지만, 일단 그 말대로 따르기로 했다. 지금 자신은 C랭크의 영능력자인 데니스 크라이드였다. 일단은 저들의 말에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졸지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긴 했지만, 딱히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이미 경지에 이르러 금강불괴의 단계마저 넘어선 그의 육체가 고작 그 정도로 아플 리는 만무하니까.
다만 기분이 나쁠 뿐이다.
시키는 대로 술을 사다 준 유태진은 드러나지 않게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기강이 엉망이군. 하긴 지금까지 할파스 상회의 행사를 방해한 자들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연방공화국 내에서 할파스 상회에 대항할 세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군부든 정치 세력이든 나름 거대한 세력들은 전부 할파스 상회와 직간접적으로 연을 맺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베이노아 수상과 레이스컬이 할파스 상회에 대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그냥 놔두고 있었을 뿐이다. 만일 그들이 작정하고 움직였다면 레이스컬은 오래 전에 척결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중요한 경매를 앞두고도 수호방위대원들은 풀어지다 못해 아주 늘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방공화국 내에서 누가 감히 할파스 상회가 치르는 행사를 어찌하겠는가 하는 인식이 그들의 기저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잘됐어. 이놈들이 이렇게 방심하고 있다면 더 일이 수월해지겠지.’
유태진은 그런 선임들을 바라보면서 서늘한 눈빛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 온 사방에서 워프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경매에 초대받은 참석자들이 워프항법으로 단숨에 이곳으로 당도한 것이다.
자원행성의 하늘 위로 변동중력원이 형성되더니, 다수의 함선들이 곧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수만 해도 무려 수백 척이나 되었다. 아니, 지금도 계속해서 함선의 수는 늘어나고 있었다.
‘정말 엄청나게 많군. 하긴 전 우주에서 고객들이 몰려오고 있는 거니, 이 정도면 그리 많은 것도 아니겠지.’
하긴 선임들에게 들은 바대로라면, 이전의 경매에서는 무려 1만 척의 함선들이 이곳을 방문했었다고 했다.
물론 그 함선들이 전부 중형이나 준대형 급 이상의 전함인 건 아니지만 그 수가 무려 1만이라면 무시할 수 없었다.
‘그나마 전함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수가 얼마 안 되는군. 수송함이나, 여객용 함선이 대다수야.’
사실 인베이더와 싸우거나 혹은, 각 세력의 방위를 담당하는 함대에 소속된 게 아닌 이상 굳이 전함을 제조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해적과 맞닥뜨릴 수 있는 만큼 자력구제를 위한 최소한의 무장은 필요했지만, 그렇다 해도 전함에 비할 바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인지, 경매 참석자들이 끌고 온 함선들은 대부분 전투보다는 편의성이나 물자의 대규모 수송에 중점을 둔 것들이 많았다.
“자자, 이쪽으로.”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할파스 상회의 비공식 경매는 아무나 참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각계의 유력 인사이거나 그에 상응하는 부를 축적한 자, 혹은 할파스 상회와 이런저런 연줄을 가진 자들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부정부패와 비리에 가깝다는 것이다. 악인이 아니라면 이곳에 올 수가 없었다.
애당초 할파스 상회는 그런 자들을 상대로 손님을 유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불법 투성이의 경매에 초대할 이유가 없었다.
“자, 신사숙녀 여러분. 반갑습니다. 벌써 6개월 만이지요? 이번에도 경매를 주관하게 될 조르딕 메디스가 인사드립니다.”
검은 나비 형태의 가면을 쓴 정장의 사내가 단상 위에 올라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이미 그는 이곳의 경매를 10년 이상 담당해온 베테랑 직원이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군요. 방금 통계에 따르면 무려 10만 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울 일입니다. 여러분의 성원에 저희 상회의 경매는 항상 성황리에 진행됐으며, 그에 상응하는 많은 매출을 올렸습니다. 그 덕분에 이번에도 보다 좋은 상품들만 구해다 놨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럼 경매는 지금부터 약 50분 뒤에 진행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저희 상회에서 준비한 여흥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부드러운 음악 연주와 함께 경매에 참석한 자들을 위한 가벼운 연회가 시작되었다.
여태까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유태진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