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04화
‘그런데 제물이라고? 실험체가 아니라?’
유태진은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행적을 토대로 볼 때 놈들은 수많은 지성체들을 상대로 인체실험을 자행해온 걸로 추정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제물이라니··· 기밀이 유출될 것을 우려해 실험체란 말 대신 사용하는 대체용어인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말 그대로 제물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저 여자를 당장 제압해 고문이라도 해서 죄다 토해내게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다. 일단은 지켜보는 수밖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대체할 제물은?]
리겔의 물음에 여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화답해주었다.
“엘하운드 정도로 피가 짙은 엘프의 아종은 아니지만, 그래도 물량으로 커버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뭐 혈통으로 따진다면 거의 잡종 수준이지만 그래도 제법 비축해뒀으니까 알아서 챙겨가도록 해. 더 이상은 나도 구할 수 없어. 연합에서 눈치 챘을지도 모르니 말이야.”
[알았다. 그럼 경매 예정일은?]
“기존의 예정대로 2주 뒤야. 바뀐 건 없어.”
[그럼 이번 인수는 어디서 할까?]
“위성인 [아렌고타]에서 하지. 경매가 한창일 때면 다들 눈치 못 챌 거야. 그때 전부 넘겨주겠어.”
[좋다. 그럼 그때 만나기로 하지. 그날까지 철저히 단속해두도록. 혹시라도 기밀이 유출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어졌다. 사라져가는 홀로그램 화상을 보던 여성이 가볍게 혀를 차고 말았다.
“딱딱하기는.”
그녀에게 있어 가면인은 거북한 상대였다. 항상 사무적이고 농담조차 통하지 않는 만큼, 뭔가 껄끄러웠다.
“이렇게 많은 제물로 뭘 할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거기까진 내 알바 아니지. 돈만 벌수 있다면 충분하니까.”
그 말을 끝으로 여성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태진은 머릿속이 다시 한 번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지? 둘이 협력 관계이긴 해도 같은 집단 소속은 아닌 건가?’
이름 모를 여성은 제물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듯했다. 단지 돈을 받고 리겔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해주는 게 전부인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구호는 둘 다 마교의 것을 사용했지. 같은 집단이라도 소속이나 계열이 다른 건가?’
그럴지도 모른다. 관리국도 그 휘하에 다양한 부서를 두고 있는 것처럼, 저들도 그런 식으로 세력을 관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마교라. 이게 과연 우연일까?’
유태진은 자신의 숙소로 되돌아왔다. 계속 지켜봐야 더 나올 것도 없어서였다.
그는 침상에 누운 채 자신만의 생각 속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래, 마교의 구호는 우연일 수도 있어.’
그와 마주쳤던 신좌들은 이 차원의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무공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휘하에 있는 자들이 중원무림의 정보를 일부 알고 있다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좀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이면 많고 많은 것들 중에 마교의 구호를 암호로 사용한단 말인가?
“이제 그만 두자. 더 이상 고민해봐야 답이 나올 일도 아니지.”
좀 더 단서가 주어졌다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는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다.
* * *
다음날 아침, 유태진은 할파스 상회 지부를 벗어나 거리로 나섰다. 아직 연수기간이 다 끝나지 않았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모두에게 휴식이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하든 각자의 자유였고, 다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그동안 자지 못했던 잠을 몰아 자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유태진처럼 거리로 나가 마음껏 하고 싶은 유흥을 즐겼다.
“어이, 데니스. 너도 외출이야?”
지부를 나서던 그때, 누군가가 옆에서 그를 불렀다. 바로 울바크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항상 함께하던 그의 동료 둘이 보였다.
“뭐 그렇지. 안에만 있으려니 좀 답답해서 나갔다 올 생각이었지.”
“역시 그런가? 하긴 거의 갇혀 지내면서 연수받는 게 생각만큼 쉽진 않더군. 그래서 모처럼 우리도 나가서 한 잔 하기로 했는데, 같이 갈 텐가?”
“아니,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어. 어디 좀 들를 데가 있거든.”
울바크가 술을 마시자고 권유했지만, 유태진은 정중하게 거절해 버렸다. 지금은 그들과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래? 일이 있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럼 나중에 보세.”
입맛을 다신 울바크는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주점이 있는 방향으로 멀어져 갔다.
그들과 헤어진 유태진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감으로 주변을 살폈지만, 감시하는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군. 일단 세뇌가 시작된 이상 자신들을 배신할 일은 없다 이건가? 그래서 외출을 허용해 준 거군.’
아마 다들 느끼지는 못하고 있겠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세뇌의 중추가 되는 술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것이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진 않았지만, 적어도 할파스 상회에 위해가 되는 짓을 저지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이제 겨우 연수를 받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외부에 유출할 만큼 중요한 비밀을 알 리도 없었다.
‘아무튼 감시가 없다니 조금은 편하게 움직여도 되겠군.’
유태진이 향한 곳은 잡화점이었다. 이것저것 다양한 물품들을 취급하는 곳이었는데, 그다지 장사가 잘 되는 곳 같지는 않았다.
워낙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데다, 우주 각지에서 귀한 것들이 모여드는 이런 곳에까지 와서 굳이 잡화를 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딱 봐도 망해가는 것처럼 허름한 가게의 모습을 본 유태진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가게 주인이 유태진은 크게 반기며 맞이했다. 워낙 장사가 안 돼서 파리만 날리고 있는 상황이니, 모처럼 찾아온 손님을 친절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가게 주인에게 유태진은 먼저 한 마디를 던졌다.
“건어물 있나?”
“거··· 건어물이요?”
뜬금없이 건어물을 찾는 그 말에 가게 주인의 얼굴이 일순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뒤이은 유태진의 요구에 그의 눈빛은 사뭇 깊게 가라앉았다.
“그래, 잘 말린 오징어가 좋겠군. 구워서 먹으면 쫄깃쫄깃하고 고소하거든.”
“구워서 대령할까요? 아니면 그냥 갖다 드릴까요?”
“은근한 불에 적당히 구워서 줬으면 좋겠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주문이었지만, 잡화점 주인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가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쪽문을 가리켰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유태진은 그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워낙 작아서 허리를 숙여야 했지만, 애당초 이런 낡고 볼품없는 가게에서 편의성을 기대한 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게 주인이 공손한 자세로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처음 만나 뵈어 반갑습니다. 유태진 님. 전 이곳 관리국의 비밀지부를 맡고 있는 슈미트라고 합니다.”
그랬다. 이곳은 평범한 가게가 아니었다. 관리국에서 조사차 파견한 요원이 맡고 있는 비밀지부였던 것이다.
인피니티 킹덤이 아이틀란 행성에서 찾아낸 브로커의 정보를 단서로 시작된 조사는 지금까지 계속되었고, 그 결과 공화국 내에 여러 비밀 지부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슈미트가 담당하고 있는 이곳이었다.
유태진은 먼저 밴더를 열고 저장된 데이터 파일을 보여주었다.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걸 베네트 국장에게 보내줬으면 좋겠군. 한시라도 빨리.”
“이건?”
“할파스 상회 지부에서 내가 입수한 증거 데이터들이지.”
“허, 대단하시군요. 잠입하신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것들을···.”
슈미트는 그야말로 놀란 표정이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시도를 해봤지만 할파스 상회 지부에 대한 조사는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몇 번이나 내부로 잠입시킬 요원들을 보내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과의 소식은 두절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입했던 요원들이 배신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기껏 세웠던 비밀 지부 중 몇몇 곳이 발각되어 꽤나 많은 손실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정식으로 첩보훈련을 받지도 않은 사람이 불과 며칠 만에 결과를 가져오다니. 물론 유태진이 천외오천을 비롯한 그랜드 급과 버금가는 강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슈미트였지만, 그래도 이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동안 잠입했던 요원들이 죄다 실종되었다고 했지?”
“예, 사라진 숫자만 해도 무려 스무 명이 넘습니다.”
유태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슈미트. 유태진은 그에게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밝히며 충고해 주었다.
“어지간해서는 접근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놈들은 연수를 핑계로 외부에서 고용된 자들을 철저히 세뇌시키고 있다. 그러니 먼저 잠입했던 요원들이 배신했던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
“설마 그럴 리가요. 그들은 세뇌당하거나, 혹독한 고문을 당해도 절대 비밀을 토설하지 않도록 철저히 훈련받은 요원들인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유태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이건 그런 차원이 아니야. 할파스 상회 지부 건물 자체가 세뇌를 위한 기반 설비나 다름없으니까. 제아무리 세뇌에 내성이 있어도 소용이 없어. 저걸 견디려면 적어도 마이스터 급 정도의 역량은 되어야겠지.”
“허··· 마이스터 급이라고요?”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슈미트에게 유태은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애당초 저긴 세뇌시키는 설비의 규모 자체부터가 달라. 세뇌나 고문에 내성이 있어도 큰 의미가 없어. 거기 저장된 데이터를 확인해보면 상세한 내역을 알 수 있을 거다.”
“그렇군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제라도 알게 된 이상 더는 무모한 잠입은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요원들의 기본 역량으로 세뇌를 이겨낼 수단이 없는 이상 굳이 피해를 늘릴 이유가 없었다.
이번엔 유태진이 물었다.
“연락은 언제쯤 되지?”
“아마 오늘 저녁때 쯤 이뤄질 겁니다. 정기적으로 보고를 올리고 있는데, 마침 좋은 시기에 오셨군요. 아마 내일 오셨다면 적어도 보름 이상 기다리셔야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할파스 상회의 경매 개최일이 고작 2주 뒤에 있었다. 만일 오늘 시기를 놓쳤다면 경매가 끝난 뒤에나 자신이 보낸 연락이 베네트 국장에게 당도했을 것이다.
“해킹되거나 할파스 상회의 감시망에 들킬 위험은 없겠지?”
“예, 철저히 은폐된 전송 방식입니다. 연합 내에서도 최근에 개발된 기술이죠. 물론 단점은 은밀한 만큼 보름에 한번, 그것도 1시간 남짓 밖에 주고받지 못한다는 거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어째서 정기연락이 보름에 한번인가 싶었는데, 그게 다 기술적인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대체 어떤 기술인지 한번 확인하고 싶었지만, 궁금증에 대한 해소는 나중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그렇다면 됐어. 나중에 또 한 번 방문할 테니 그때 다시 보지.”
“알겠습니다. 그럼 무사하시길···.”
슈미트의 인사를 받은 유태진은 그가 건네준 잘 구워진 오징어가 담긴 꾸러미를 들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잡회점에 너무 오래 있어봐야 의심만 받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바깥에서 할 일이 있거나 유흥을 즐길만한 성격도 아닌 만큼 이대로 귀환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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