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03화
배신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 치고는 꽤나 더러운 짓이었다. 아마 저런 식으로 세뇌된다면 그 부작용으로 대상의 인성 자체가 망가질 것이다.
하지만 이건 유태진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이미 극고한 경지에 닿았던 그의 정신세계는 결코 이런 외부의 간섭 따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단지 신경이 거슬릴 뿐이었다.
‘하나 저들은 나와 다르지.’
울바크 일행은 이미 정신계 마법에 조금씩 영향을 받고 있었다. 아직은 별다른 변화가 없지만 며칠만 더 지나면 저들은 명령의 선악을 불문하고 할파스 상회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병사로 재탄생하게 될 것이다.
‘마음 같아선 세뇌되지 않게 막아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지.’
만약 손을 썼다가 저들이 세뇌되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면 할파스 상회는 그 이유를 밝혀내려 할 것이다. 그리고 인권을 무시한 조사 끝에 저들은 가차 없이 처분되겠지.
‘아직은 건드릴 때가 아니야.’
유태진은 기감을 크게 퍼뜨려 이 일대의 구조를 파악했다. 놈들이 감추고 있을 비밀을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하루일과가 끝난 뒤, 모두가 각자 배정된 숙소에서 잠든 시각.
유태진은 몰래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각자에게 배정된 숙소도 상시 감시감청 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마법과 술법을 다룰 줄 아는 이상 그 정도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었다.
사실과 다름없는 환상으로 누워 잠자는 자신의 모습을 재현한 유태진은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숙소를 빠져나왔다.
그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수법은 중원에서도 역사 깊은 공공문의 은신보법인 질공무흔보(挃空無痕步).
특수한 진기 운용과 보보로 자기 자신에 한정된 진법을 구축, 이를 통해 육체를 현실 공간으로부터 괴리시켜 버린다.
현재 그의 육신은 무수한 입자와 같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굳이 비유한다면 일종의 양자화와 다름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허공분쇄(虛空粉碎). 질공무흔보를 극고한 수준까지 갈고 닦아야 도달 가능한 경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어떠한 관측 감시 장비라 하더라도 그를 감지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이제부터 수상했던 곳들을 하나하나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유태진은 말 그대로 거침없이 이동했다. 어떤 이도 그를 보거나 감지할 수 없으니 굳이 조심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특정 장소를 완벽하게 차단한 격벽이나 장애물도 그를 막긴 어려웠다.
제아무리 밀폐된 공간이라 해도 양자 수준의 입자 형태로 변한 유태진은 얼마든지 투과해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미친놈들. 아주 제정신들이 아니구나.’
유태진은 놈들이 깊은 장소에 감춰둔 곳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우주 곳곳에서 잡혀온 수많은 지성체들이 열악한 지하에 갇혀 노예처럼 취급되고 있었다.
그들의 참혹함은 전장에서 온갖 더러운 경험을 해봤던 그마저도 치를 떨게 만들었다.
마음 같아선 이곳 할파스 상회 지부에 있는 모든 작자들을 쳐 죽이고, 저들을 구출해주고 싶었지만 그건 결국 일시적인 자기위안일 뿐이다.
이곳을 박살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저들을 전부 보호한다는 건 유태진이라 해도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지. 당분간은 이대로 놔둘 수밖에···.’
지성체들이 갇힌 장소는 꽤 여럿이었다. 할파스 상회 놈들은 그들을 뭉쳐놓지 않고 이곳저곳 여러 장소에 분산시켜놓았다. 아마도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분산시켜놓은 모양이었다.
이래서는 이들을 풀어주는 것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나 혼자서는 아무리 봐도 무리겠어. 누군가가 돕지 않는 한 말이야.’
그러던 중 유태진은 자신이 찾던 목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예측이 맞았군. 이곳으로 끌려온 거였나?’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리플 행성에서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엘하운드들이었다. 그 수만 무려 수만에 이르렀다.
그들은 거대한 밀폐시설 안에 갇혀서 제대로 옴짝달싹 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가둬둔 시설은 크고 넓었지만, 그 안에 갇힌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그마저도 비좁게 보였다.
‘여러모로 수상하다 싶었는데 역시 할파스 상회는 인베이더와 연관이 있었어. 서로 거래를 주고받는 관계인지, 아니면 할파스 상회가 놈들의 하부조직인지는 모르겠지만···.’
유태진은 더욱 깊은 장소로 향했다. 이곳 할파스 상회 지부에는 드러난 곳보다 드러나지 않은 은밀한 장소들이 더 많았다.
그 대부분은 이번 경매에서 상품화하기 위해 지성체들을 가둬둔 곳이 대다수였지만, 그 외에도 우주 각지에서 노획한 귀중품이나 금수품목들을 비치해 둔 곳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보지 못한 장소들이 남아 있었다. 유태진은 지금보다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깊게도 파 내려갔군. 이렇게까지 깊은 곳에 숨겨놓은 장소라니. 대체 뭣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그 곳에는 거대한 설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연수원에서 작동하고 있는 세뇌마법의 중추로 짐작되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야. 이건 노예들을 무력화시키는 건 물론, 이곳을 찾는 자들의 욕망까지 부추기고 있어.’
연수원에서 사용되고 있는 세뇌마법은 이곳 중추 시설이 갖고 있는 기능에 비한다면 아주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이곳에서는 자원행성을 비롯한 주역을 세뇌마법의 영역으로 장악할만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사로잡혀 있는 지성체들이 제대로 저항조차 못하는 거였군.’
마법이나 갖가지 술법에 대해서도 상당한 수준까지 통달한 유태진은 중추시설의 원리를 빠르게 파악해 나갔다.
‘그 외에도 욕망을 부추기고 양심의 거리낌을 없애는 기능도 있군. 이건 경매를 위해서 만든 건가?’
이런 불법적인 경매가 성행하려면 양심의 거리낌을 없애는 효과는 필수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비참한 꼴로 전락한 지성체들을 노예로 사고팔 수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경매 참석자들의 욕망을 간접적으로 부추김으로서, 경쟁을 더욱 유발시켜 이윤을 극대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걸 본 이상 가만 놔둘 순 없지.’
유태진은 정신계 마법의 중추시설에 슬쩍 간섭하기 시작했다. 기존에 있던 술식에 몇 가지를 더함으로서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개찬시킬 생각이었다.
각종 술식이 새겨진 회로에 강기를 투사시켜서 기존에 없던 새로운 회로를 만들어내고, 몇몇 부분은 깎아내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덕분에 정신계 마법을 발생시키는 중추시설의 기능은 완전히 달라졌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당분간은 예전과 다름없을 거다. 하지만 내가 원격으로 새롭게 개찬된 술식을 가동시킨다면 바로 효과가 나타나게 되겠지.’
술식의 개찬을 끝낸 유태진은 그만 물러나기로 했다. 아직 며칠 더 여유가 있는데다, 지금은 시간도 꽤 늦어서 더 이상 내부를 뒤지고 다닐 수도 없었다.
헌데 그때였다.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어떤 기척이 느껴졌다.
‘음? 누구지?’
저 높은 상층에서부터 누군가가 이곳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빠르게 수직으로 내려오고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이 비밀 시설과 직통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위이잉!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소리와 함께 중추시설 내로 누군가가 발을 들였다.
유태진으로서는 처음 보는 자였다.
웨이브 진 보라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그 안에 내재된 기운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적어도 A랭크 이상.
‘···아니, 이 정도면 거의 마이스터 급이군.’
영능은 무공의 경지와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 상이한 차이가 있었지만, 이만한 격과 힘을 보유하고 있다면 마이스터 급이 틀림없었다.
그런 강자도 유태진의 존재를 파악하진 못했다. 하긴 육체가 아주 작은 입자로 화해 흩어져 있는데, 그걸 파악해낸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시설 내로 들어선 여성은 정신계 마법의 중추설비 앞에 섰다. 그러더니 작게 외쳤다.
“석양은 저물어가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헌데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특정 목소리나 단어에 반응하도록 되어 있는 일종의 프로그램이었다.
[마가 충천하나니.]
“천마의 보보 아래 만마가 굴복하리라.”
마치 말을 주고받듯 내뱉은 여성의 마지막 말에, 유태진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건 이런 먼 우주에서 듣게 될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했던 낯익은 구호였다.
‘뭐라고!?’
[패스워드 컴플리트. 마지막 구호를 외치시오.]
“마교출세 천마군림.”
‘어떻게 이럴 수가···.’
이미 오래 전에 들었던 구호였지만, 유태진으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구호이기도 했다.
그의 전생 시절 중원무림의 가장 큰 대적이었던 천마신교의 교도들이 항시 외치는 구호였다.
‘설마, 이곳에 마교가 있다는 건가?’
유태진으로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중원무림은 이 세상에, 아니 이 우주에 없었고··· 그건 마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구에도 무림에 대한 이야기가 무협소설 등을 통해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러 모로 조사해 봤지만 지구에는 무림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 전에 엑스칼리버에 의해 영능이 봉인되면서 무림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외딴 우주에서 난데없이 마교라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모든 게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심지어 지금 저 여성은 마교의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것은 분명 영능의 흔적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내게서 무공을 감출 실력도 아니니 마교의 무공을 익힌건 확실히 아니라는 건데··· 마교의 구호를 외친다?’
유태진은 놀란 감정을 진정시켰다.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 흔들릴 정도로 놀라긴 했지만, 그가 지금까지 겪어온 수많은 경험들은 흔들렸던 감정을 금세 추스르게 해주었다.
‘좀 더 지켜보면 뭔가 알 수 있겠지.’
구호를 마지막으로 패스워드 과정이 마무리 된 것인지, 곧 홀로그램 화상이 떠올랐다. 거기에는 유태진도 한번 본 적이 있는 가면인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딱 제 시간에 연락을 해줬군.]
“이래 뵈도 난 한 번도 약속시간을 어긴 적 없어. 시간은 곧 돈이거든.”
[그래, 너의 돈에 대한 예찬은 그쯤 해두기로 하지. 내게 해야 할 말이 있을 텐데.]
“하여간 재미없기는. 너희가 요구한 건 이미 준비해뒀어. 제물도 바로 며칠 전에 도착했지.”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래, 문제가 있긴 있었지. 제물을 수급하던 리플 행성이 망한 모양이야. 연합의 전함 두 척이 와서 우리 공급자들을 훌륭하게 박살내 주었지. 그래서 제물 수급이 더 이상은 어려워졌어.”
유태진은 여성의 그 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놈들은 리플 행성에서 엘하운드를 생포하던 인베이더들과 연관이 있었다. 아니, 애당초 리클의 형인 리겔이 가면을 쓴 상태로 나타났을 때부터 그 사실은 이미 확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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