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권-02화
하지만 지금 현재 그의 신분은 유태진이 아닌, C랭크에 불과한 데니스 크라이드였다. 여기서 제 실력을 보였다간 기껏 위장신분까지 만들어가면서 잠입한 일이 전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일부러 혈맥 일부를 터뜨려 약간의 피를 토했다. 그리고는 젠트 이사의 기세 속에서 간신히 버티는 것처럼 연기했다.
젠트 이사는 곧 기세를 거둬들이며 감탄했다.
“음··· 확실히 제법이야. 전력을 다한 내 기세를 받고도 멀쩡히 서 있다니 말이야. 영력의 양은 C랭크인데 그걸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어.”
“허억 허억···”
유태진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일부러 힘든 척 하는 게, 인베이더 대군과 하루 꼬박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았다.
허나 이 속임수가 잘 먹혀들었는지, 젠트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제법 괜찮은 인재를 데려왔군. 좋아, 고용하도록 하지.”
“어이쿠! 감사합니다.”
“수고했네. 원하는 대로 알선비는 톡톡히 챙겨주지.”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유태진은 내심 기가 막혔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며 고용여부를 확정짓다니··· 이 무슨 황당한 경우란 말인가?
하지만 애당초 그의 목적은 할파스 상회의 조사였다. 알아서 고용해주겠다고 하는데, 괜히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일단은 잠자코 있기로 했다.
“참, 신상명세에 대해선 제대로 조사를 했겠지?”
“철저하게 해 놨습니다. 신분과 내력에 대해서는 의심하시지 않아도 될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제가 이 바닥에서 어떻게 잔뼈가 굵어왔는지 말입니다.”
“하긴 자넨 다른 건 몰라도 신용하나는 철저했지. 그래서 자네가 나와 직접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거고.”
보기에는 경박하고 믿음직스럽지 않게 보여도 골고다인은 이 바닥에서 나름대로 이름난 인사였다. 다양한 종류의 알선 중계를 성공시켰으며, 이를 토대로 할파스 상회의 인사에게 인정받을 만큼 상당한 신용을 쌓아올렸다.
그래서 젠트 이사도 그가 가져온 조사결과를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좋네. 고용하기로 하지. 실력도 괜찮고 신상내역도 전부 다 사실이라면 고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언제나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젠트 이사에게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감사인사를 올린 골고다인이 유태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고맙다고 인사드리게. 자네는 지금 저분에게 채용된 거야.”
유태진은 젠트 이사가 자신을 고용해준 것을 어지간히 큰 은혜처럼 언급하는 골고다인이 영 거슬렸지만, 지금은 일단 참기로 했다.
“고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데니스 크라이드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 할파스 상회를 위해 열심히 하도록. 그러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야. 그럼 날 따라오게. 신입사원이 된 이상 앞으로 배워야 할 것들이 많아.”
오만한 태도로 지껄이는 그 모습에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었지만, 일단 그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앞으로 잘 해보게. 난 이만 가봄세. 나중에 일 있으면 찾아오게나. 아까 약속한 것처럼 좋은 데로 안내해주지.”
골고다인은 젠트 이사를 따라 걸어가는 유태진의 등 뒤에 그런 말을 남기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고용알선도 끝냈고, 그에 따른 이득도 취했으니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뜻이었다.
유태진도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애당초 그와 접선해서 밀항을 주선 받았던 것도 바로 할파스 상회와 연결점을 갖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젠트 이사를 따라 고용센터를 벗어난 유태진은 어떤 큰 장소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곳은 거대한 강당처럼 보였는데, 꽤나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기가 바로 연수원일세. 자네처럼 특별채용으로 고용된 자들을 교육하는 곳이지. 이곳에서 며칠간 교육받은 뒤 정식으로 직책이 내려올 것이야. 그러니 열심히 하도록.”
유태진을 그곳에 남겨둔 젠트 이사는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그를 여기까지 데려다 준 것만으로도 자기가 할 일은 다 했다는 태도였다.
그가 외부인인 유태진을 그냥 방임해 둔 듯 보였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유태진의 감각에 여러 가지 기척들이 걸려들고 있었다.
‘이놈저놈 꽤나 숨어 있군. 믿을 수 없으니 일단은 감시하겠다는 건가?’
그러니 할파스 상회에 고용된 척 들어온 자들이 첩자질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감시하는 자들의 면모만 봐도 그럴만 했다.
‘제법이야. B랭크 상당의 실력자들을 이런 식으로 부리다니. 돈만 많으면 뭐든 다 된다는 거군.’
오버러들 중에서도 상위권이라 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이런 감시에 쓰인다는 사실이 우습긴 했지만, 그만큼 철두철미하게 내부의 사정을 유출시키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니 할파스 상회가 지금까지 그렇게 악명을 떨치면서도 망하지 않고 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근처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려왔다.
“호오, 우리 말고도 특별채용 된 녀석이 또 있었나보지?”
고개를 돌려보니 제법 우락부락해 보이는 사내가 있었다. 2m를 훌쩍 넘어 보이는 큰 신장에, 두터운 근육질. 그리고 머리카락 한 올 없어 보이는 대머리가 상당히 돋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와 키 작은 사내가 붙어 있었다.
“그러게 말이야. 이번 기수는 우리뿐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겉보기엔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는데, 나름 한 가락 하나 보지?”
그들은 마치 유태진을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살펴보았다. 같은 기수에 고용된 자에 대한 호기심과 경계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반면 유태진은 그들을 보자마자 수준을 파악했다.
‘대충 B-랭크 수준이군. C+랭크에서 이제 막 다음 단계에 올라선 녀석들이야.’
할파스 상회에서 말하는 특별채용의 기준이 어떤 정도인지 알 것 같았다. 놈들은 바로 B랭크를 기준으로 고용을 선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제 막 B-랭크가 된 만큼, 제 수준에 맞는 역량을 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헌데 그때 대머리 사내가 다가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울바크라고 한다. 전열방어가 담당이지. 앞으로 함께 일할 것 같은데 잘 부탁하지.”
“어? 아, 그래. 난 데니스 크라이드라고 하지. 역할을 따진다면 공격수라고 해야겠군. 마찬가지로 나도 잘 부탁하지.”
유태진은 먼저 접근해온 울바크의 모습이 조금 뜻밖이었지만, 당분간은 어차피 함께할 사이들이었다. 괜히 경계한답시고 신경 곤두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 친구들도 소개해주지. 이쪽은 제퍼드. 우리 쪽의 저격 담당이야.”
“앞으로 잘해보자고.”
호리호리한 사네가 울바크의 소개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모습이 꽤 사납고 집요해 보였다. 저격수의 역할과 아주 잘 어울릴 듯했다.
“이 작은 친구는 세틀라이. 공격수와 서포트를 겸한 하이브리드지. 필요할 때마다 역할을 달리 하기 때문에 정해진 포지션은 없어.”
“이것저것 다 하는 잡캐니까 신경 쓸 것 없어.”
세틀라이라 소개된 녀석은 꽤나 시니컬해보였다. 자신에 대한 소개를 듣고도 그냥 잡캐라는 말로 일축시켜버렸다.
덕분에 유태진은 이들의 관계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걸 보니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가까운 사이였나 보지?”
“한 팀이었지. 꽤 잘나가는 용병대였어.”
“그런데 어쩌다가 여길 들어온 거지?”
유태진이 이렇게 묻는 것도 당연했다. 할파스 상회는 우주의 10대 기업 중 하나이자, 연방공화국을 쥐락펴락하는 곳이긴 했지만, 그만큼 악명도 높았다.
스카웃 되는 거라면 모를까, 어지간해서는 이곳에 고용되겠다고 자기 발로 스스로 걸어들어오는 고위 영능력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자 울바크가 한숨을 내쉬며 간략히 말해주었다.
“안 좋은 일이 있었지. 우린 100명으로 이루어져 있던 용병대였는데, 하필이면 운이 없었어. 예상치 못했던 인베이더의 기습이 있었거든.”
“그래서 졸지에 용병대가 망해버렸지. 동료들이나 수하들은 죄다 죽어버렸고. 덕분에 그 녀석들에 대한 보상금과 빚을 살아남은 우리가 떠안게 되어버렸어.”
울바크가 하던 말을 제퍼드가 받아 덧붙였다. 그것만으로도 사정은 대충 알 수 있었다.
“결국 돈 때문에 왔다 이거군.”
“인생사가 다 그렇지.”
제퍼드는 유태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이 할파스 상회로 흘러들게 된 것은 다 돈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상금과 빚 때문이라니. 그건 그냥 무시해도 됐을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런데 죽은 동료나 수하의 가족들이 밑바닥까지 떨어지는데 그걸 두고 볼 자신이 없더군. 그래서 우리가 그 빚을 떠안기로 한 거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꽤나 큰 금액인 모양인데, 그걸 떠안을 만큼 그들에게 의리를 지킬 이유가 있었나?”
“한때 한솥밥을 먹던 녀석들이었어. 남들은 눈 딱 감고 포기해버린다고 하던데, 우린 그게 잘 안되더군. 그리고 우린 적어도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잖나.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우직해 보이는 울바크의 그 말에, 유태진은 이 녀석들이 보기보다 의리 넘치고 건실한 녀석들임을 알게 되었다.
‘하긴 할파스 상회도 바보가 아니니 적어도 쉬이 배신할만한 녀석들을 고용하진 않았겠지.’
그렇게 보면 유태진이 지금 뒤집어쓰고 있는 위조 신분인 데니스 크라이드도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평판도 좋았으며, 용병들 사이에서도 의리 있고 정의감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마음에 걸렸다.
‘할파스 상회에서 실력 있는 영능력자를 고용한 건 결국 어딘가 써먹기 위해서일 텐데.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거란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인성 좋은 녀석들을 뽑아서 어쩔 생각인 거지?’
이 세 녀석처럼 인성 좋은 녀석들에게 누군가를 학살하거나, 범죄에 가담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반발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녀석들을 뽑다니, 유태진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허나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알 수 있었다.
“오늘부터 이번 연수를 맡게 된, 겔데인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교육을 맡게 되어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연수가 시작되면서부터 유태진은 기이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 강당을 중심으로 어떤 특수한 패턴을 가진 영적 파동이 은은하게 흐르면서 간섭해오고 있었다.
‘그렇군. 꽤 고등한 정신계마법이야. 연수시설 전체에 이런 정신마법을 교묘하게 펼쳐둔 건가?’
얼마나 교묘한지 유태진도 마법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 힘은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어와 대상의 정신을 굴복시키는 역할을 하는 정신마법이었다.
이건 하루 이틀 사이에 될 게 아니었다. 아마도 할파스 상회가 연수기간을 잡아놓은 것도 바로 외부에서 고용된 자들을 확실하게 상회에 충성하는 자들로 만들 목적인 것으로 짐작되었다.
‘어째 신뢰하기 힘든 외부인을 서슴없이 고용하더라니···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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