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23화
“이 정도면 완벽하겠지?”
지금 유태진이 역체변용술로 변신한 모습은 자신의 전생인 천화운이었다. 그 때의 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확실히 그 정도면 들키진 않을 것 같네요.”
“그만큼 심혈을 기울였으니까.”
이 정도로 심도 있게 역용술을 펼치려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아니, 역용술의 대가라 하더라도 지금의 유태진처럼 지문과 홍채, 영자패턴까지 변화시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지고한 경지에 이른 그이기에 가능한 역용이었다.
“하지만 이만큼 유용한 수법이라면 그만한 리스크도 있겠죠.”
“그렇지. 역용하는 동안은 내 본신 실력을 다 발휘할 수 없게 되지.”
편리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리스크는 존재하는 법이다. 리스티가 짐작한 것처럼 역체변용술도 그러했다. 특히 역용의 정밀도가 높을수록 시전자가 떠안는 리스크도 더욱 커진다.
“아마 지금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실력은 마이스터 중급에서 상급 사이 정도는 되겠군.”
“엄청나게 하락했네요.”
유태진이 그랜드 급에서도 중위권 이상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폭락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났다. 그 안에 존재하는 세세한 경지의 등급을 다 따진다면 거의 8-9단계 이상 하락한 셈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여차하면 역용을 풀어도 상관없고.”
“신분은요? 모습을 바꾼다 해도 그에 맞는 신분은 필요할 텐데요. 제가 따로 준비해 드려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베네트 국장이 따로 마련해 준게 있으니까.”
후보생들의 실전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에 유태진은 베네트 국장에게 새로이 연락을 받았었다.
조사에 따르면 리플 행성에서 입수한 좌표는 메세니아 연방공화국 내의 폐기지정 구역으로서, 지금은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상황일 뿐, 그곳에서는 거대한 암시장이 존재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암시장의 배후는 다름 아닌 할파스 상회.
지금까지의 조사에 따르면 엘프 아종들의 납치에는 그들이 깊게 관여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우리가 조사할 수 있었던 건 여기까지였네. 더 자세히 파보고 싶었지만, 여의치가 못한 상황이라서 말이야.]
현재 아르탈 행성 연합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베이더의 공격에 대응하는 것조차 벅차다고 했다. 라인트라 대전 때와 같은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 건 아니지만, 놈들은 기습적으로 침략한 다수의 성계에 변질된 세계수를 자라나게 하는 방식으로 이곳저곳 연합의 영역권을 공략해오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메랄드 헤븐처럼 행성 전체가 세계수로 덮인 건 아니었다. 놈들이 키워낸 건 하이브를 매개로 자라난 세계수 한 그루 뿐.
허나 이것만으로도 여러모로 골치 아팠다. 침공중인 성계에 세계수 한 그루만 출현해도 인베이더들은 본래의 역량보다 더욱 강력해지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제 세계수에 대해서도 약점이 연구된 만큼 공략하지 못할 건 없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피해가 커지는 건 막기 어려웠다.
때문에 더 이상 조사를 진행할 여력이 없게 된 관리국은 이 문제를 유태진에게 넘기기로 한 것이다.
그 대신 몇 가지 추가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메세니아 연방공화국 내에 존재하는 관리국 휘하의 비밀지부를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공화국 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몇 가지 위조신분증을 제공해준 것이다.
그가 베네트 국장에게 받은 신분증 데이터를 밴더 위로 출력해 보여주자, 어떻게든 만류하고 싶었던 아리엔도 끝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휴, 국장님이 만들어준 신분증이니 확실하긴 하겠네요. 하지만 모쪼록 조심하세요. 제가 듣기로 공화국은 위험천만한 곳이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인베이더와 결탁한 자들도 있을 테니까요.”
“그래, 알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그 말에 유태진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2년 전에 비하면 정말 많이 성장해 이젠 처녀의 모습이 엿보이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어려 보일 뿐이었다.
유태진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다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지구를 부탁한다.”
“예, 오실 때까지 확실하게 지켜낼게요.”
“스승이나 몸 성히 돌아오셔. 우리 걱정은 말고.”
“그동안 후보생들을 철저히 단련시켜 놓지요.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연구하는 중간에 시간 나는 대로 신경은 쓸게요.”
그 말에 다들 쾌활한 목소리로 화답해 주었다. 다른 이도 아닌, 유태진의 부탁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자신들에게 해준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중간에 레이첸만 조금 퉁명스런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그건 녀석의 말버릇이니 유태진도 굳이 탓하진 않았다. 말은 저래도 막상 일이 닥치면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지구를 보호할 것이다.
유태진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즉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는 특무중형함 아우기스에 올랐다.
메세니아 연방공화국의 영역까지 안정적으로 도달하려면 적어도 준대형 함에 버금가는 성능인 아우기스가 아니면 안 되었으니까.
“과연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군.”
유태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함에 올랐다. 그러자 그를 태운 아우기스는 순식간에 지구의 대기권을 탈출해 우주공간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 *
메세니아 연방공화국이 처음 세워지게 된 계기는 바로 아인종들의 자립 때문이었다.
용족을 비롯한 강력한 종족들을 제외한 다수의 아인종들은 막대한 머릿수를 자랑하는 인간들을 이겨낼 수 없었고, 결국 차별받거나 그들의 노예로 전락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결국 이대로는 안 된다는 자각이 생겼고, 아인종들은 우주의 오랜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자기들끼리 뭉치기 시작했다.
물론 부족이나 국가 단위로 뭉친 경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성계를 넘어 우주적인 규모로 뭉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게 바로 메세니아 연방공화국이었다. 그렇기에 우주의 무수한 아인종들이 그 구성원이었고, 아인종들이 사는 수많은 성계들이 속속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그들은 인간을 비롯한 다른 강력한 종족들에 의해 억압받아온 탓에, 뭔가에 의해 명령받거나 구속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공화국이라는 정치 형태로 나타났다.
그렇기에 메세니아 연방공화국은 여러 콜로니와 행성들이 각각 대표를 선출한 뒤, 그들 중에서 또다시 대표를 선출하여 통치하는 행성연합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공화국에 소속된 각 콜로니와 행성들은 공화국 형태의 정치체계를 갖고 있으며, 독립적이다. 그리고 각 행성의 수상들이 모여 10년에 한 번씩 연방수상을 선출하는데, 그가 10년이란 임기기간동안 공화국을 통솔하게 된다.
이런 정치적인 구조 탓에 메세니아 연방공화국은 대체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특정 범죄가 아닌 이상 시민들을 억압하지도 않았고, 어지간한 문제로는 제재하지도 않았다.
허나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와 체계 탓에 문제도 많았다.
규제를 최소화 한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터라 기업의 규모와 경제력은 우주의 3대 세력 중 가히 최고 수준이었지만, 그만큼 부패지수가 높았으며 정치적으로도 혼란한 편이었다.
기업과 관료가 서로 뇌물을 주고받으며 결탁하는 건 예사였고, 심지어 기업이 공화국의 통치에 간섭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할파스 상회였다. 우주의 10대 기업 중 하나이자, 공화국 최고의 기업.
하지만 이들이 쌓은 부는 공화국 내부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함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공화국 내에서도 치안이 좋지 않은 변두리 지역은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버렸고, 이젠 마피아나 갱들이 설치면서 갖가지 범죄를 일으키고 있었다.
즉, 마피아나 갱들이 바로 그 지역의 주인이 된 셈이다. 지방행성정부의 힘 따윈 그들 앞에서 통용되지 않았다. 아니, 범죄자들을 처벌해야 하는 그들마저 마피아와 갱들과 한통속이었다.
이런 혼란한 사회 탓에 연합이나 제국에서 큰 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은 죄다 공화국으로 몰렸다.
그리고 지금 알타 성계로 향하는 수송함 데드불스도 바로 그런 자들을 실어 나르는 밀항함 중 하나였다.
“음···.”
데드불스 내의 실내는 여러 모로 열악했다. 불법적으로 운영되는 수송함인 만큼 제대로 점검도 하지 않는데다, 밀항하길 원하는 다수의 범죄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러니 위생이나 청결도 신경 쓰지 않는 건 당연했다.
유태진은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그는 유태진이 아니라, 바로 베네트 국장이 만들어준 가상의 신분인 용병 데니스 크라이드였으니까.
지금 그의 겉모습도 역체변용술로 데니스 크라이드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상태였다.
헌데 그때,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왔다. 바로 이번 밀항을 주선해준 브로커였다. 놈은 수염을 길게 기른 드워프였는데, 드워프답지 않게 욕심 많고 추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딜 가나 이런 놈들은 있군.’
드워프라 하면 강직하면서도 고집 있는 종족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타락한 녀석도 있는 걸 보면 여러모로 신기하기까지 했다.
놈이 유태진에게 불쑥 말을 걸어왔다.
“그래, 듣자니 전직 오버러 출신이라고?”
“맞아. 오버러 짓 좀 몇 년 하다가 때려치웠지. 쥐꼬리만 한 수당에 비해 너무 위험천만해서 말이야. 위험수당도 몇 푼 안 된다고.”
유태진이 불량스런 말투로 대답하자, 브로커가 맞장구치면서 웃었다.
“하긴 그렇지. 인베이더를 상대로 최전선에서 싸운다는 게 좀 위험한 일인가? 게다가 목숨 값에 비한다면 주는 수당도 턱없이 낮다고 들었어. 때려 치길 잘했군. 낄낄낄.”
“하지만 말이야. 연합에서는 좀체 일거리가 없단 말이야. 내가 할 줄 아는 게 싸우는 것뿐인데, 거기서 싸울 일은 인베이더와의 전쟁 밖에 없어. 거긴 치안이 워낙 좋아서, 나 같이 신분이 불분명한 용병이 활동할 건덕지가 없지. 그래서 공화국을 가보려고. 거긴 일거리가 넘친다고 하던데.”
유태진은 자신의 가상 신분에 주어진 설정을 간단하게 읊어주었다. 데니스 크라이드는 최전선에서 도망친 오버러였다. 결국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해 관리국으로 귀환하지 못했고, 음지에서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관리국과 연방의 치하 내에서는 신분이 불분명한 용병이 활약할 일이 적었고, 결국 공화국으로 밀항을 시도한다는 게 이번 신분의 설정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공화국이야 말로 자네 같은 용병들이 활동하긴 최고의 환경이지. 싸움이 항상 넘친다니까! 싸울 상대도 위험한 인베이더가 아니라, 아인종들이나 인간들뿐이니 말이야. 하긴 너 같은 오버러라면 돈 벌기에는 최고일 거야. 아마 거기서 몇 년 만 활동하면 오버러로 벌었던 돈의 수십 배는 벌어들일걸? 그야말로 싸워서 벌어먹는 자들에겐 천국이지!”
그렇게 돈 벌기 좋은 환경이라며 공화국을 칭송한 브로커는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건지, 유태진을 향해 슬쩍 운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침 좋은 벌이가 있는데, 한번 해볼 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