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22화
“스승님, 너무 겁주는 거 아닌가요? 적당히 다독이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은데요.”
엘레나가 슬쩍 핀잔을 줬지만, 유태진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이 정도가 적당 해. 실전을 치르긴 했지만 그래도 햇병아리들이야. 게다가 앞으로 생각하면 좀 더 성장할 필요가 있어. 실전을 치르면서 자신감이 조금 붙은 모양이지만, 아직 멀었지. 괜한 자만심이 생기기 전에 바짝 조여줄 필요가 있어.”
뿔뿔이 흩어져가는 후보생들의 모습을 뒤로 한 유태진은 곧장 KM사의 한국지부로 향했다. 거기에는 자신이 사전에 연락해서 불러 모은 제자들과 일행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은 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갔다. 먼저 이야기의 물꼬를 튼 것은 아리엔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흴 부르셨어요? 뭔가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조심스런 그 물음에, 유태진도 슬슬 본론을 내놓기로 했다.
“조만간 내가 지구를 떠나야할 것 같아서 이렇게 불렀다.”
“지구를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요? 혹시 후보생들 실전 훈련이 또 있었나요?”
“아니, 그 녀석들의 실전 훈련은 이번으로 다 끝났지. 하지만 다른 문제가 생겨서 따로 우주로 나가봐야 할 것 같다.”
그러자 이번엔 리스티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요?”
“이번에 실전 훈련 때 리플 행성에서 있었던 일로 몇 가지 조사할 게 생겼다.”
그렇게 말한 유태진은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나직이 말했다.
“인베이더 놈들이 특이 반응을 보이더군. 하이브마저 포기하고 엘하운드들을 대거 생포해서 행성을 벗어나 도주하려 했다.”
“인베이더가 원주민을 납치해? 그 무슨 황당한?”
레이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건 지금까지의 상식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일이 아닌가.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인베이더놈들은 우리와 싸워 이길 수 없음을 알고는 즉시 하이브를 포기하고 후방에 있던 엘하운드의 도시를 급습했지. 그리고는 지저에 숨겨뒀던 전함을 타고 행성 탈출을 시도하기까지 했어. 결코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지.”
“그래서 조사한다고 한 거였군요.”
리스티는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짐작이지만··· 어쩌면 이 일은 아이틀란 행성에서 봤던 그 시설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설마 인체실험?”
“그럴 가능성이 높지.”
리스티가 불쑥 꺼낸 그 말에, 유태진은 무겁게 긍정해 보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가능성이 높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베네트 국장과 연락을 취했는데, 최근 엘프의 아종들이 인베이더들에게 산채로 포획된 사례가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러니 의심할 여지조차 없지.”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사실인지를 절감한 엘레나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그동안 그런 일들이 알려지지 않은 게 더 이상할 정도네요.”
“그 원인은 두 가지로 본다. 지금까지 닥치는 대로 살육만 저질러온 인베이더들이 원주민을 납치할 거라고는 전혀 예측 못했던 우리의 편견 때문이거나, 혹은 누군가에 의해 지금까지 은폐되었을 가능성이지.”
“연합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레이첸이 두 눈을 번뜩였다. 연합을 지탱하는 5대 가문의 일원인 그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가능성은 있다. 라인트라 대전 때에도 그런 의혹은 이미 여러 차례 있었으니까. 이제 와서 그 점을 의심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그렇군요. 대체 어떤 쥐새끼 같은 놈들이···.”
레이첸은 살기를 끌어올리며 이를 뿌득 갈아붙였다. 예전에 비해 실력이 상승된 탓인지, 그 기세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아마 여기에 지구의 오버러 후보생들이 있었다면 그 기세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만, 진정해라. 여기서 기세를 흘리는 건 좋지 않아.”
“···예.”
유태진의 말에 레이첸은 간신히 살기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언제든 폭발할 것 같은 기세가 그 안에서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난 당분간 지구를 떠나 있을 생각이다. 리플 행성에서 노획한 인베이더의 전함에서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놈들의 목적지가 바로 메세니아 연방공화국의 세력권으로 확인되었다.”
“메세니아 연방공화국이라면··· 설마 그때 그 브로커?”
그 말을 듣는 순간 리스티의 두 눈이 날카롭게 떠졌다. 예전의 기억 속에서 그와 연관된 무언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 아이틀란 행성의 비밀시설에서 나왔던 브로커와 연관이 있겠지. 물론 뚜렷한 확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커.”
“역시 그랬군요.”
유태진의 긍정에 리스티는 자신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재삼 확인했다. 당시엔 직접 조사할 시간도, 여력도 없어서 베네트 국장에게 알리고는 그 뒤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동안은 제대로 조사할 시간이 없었지. 갑작스럽게 벌어진 라인트라 대전에, 지구의 문제로 바빴으니 말이야. 하지만 이젠 더 미뤄둘 수 없게 되었어.”
아이틀란 행성에서 있었던 일에, 이번 엘프 아종들의 납치 문제까지 겹쳤다면 꽤나 중대한 사안이었다. 제아무리 바쁜 관리국이라 해도 이 문제를 두고 심층 조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조사할 대상이나 증거가 멀쩡히 남아 있을지의 여부였다.
엘레나가 그 부분에 대해서 다소 부정적인 투로 내뱉었다.
“문제는 그 브로커 집단이 아직 남아있기나 할지의 여부네요.”
“그래, 네 말대로 그 브로커 집단은 이미 사라진 상황이지. 이미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깔끔하게도 꼬리를 잘랐더군.”
베네트 국장이 전해준 자료에 따르면 그 때의 브로커 집단은 종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모습을 감추었다. 말 그대로 증발한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더 깊이 조사했다면 그 끈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필이면 그때 라인트라 대전이 벌어졌다. 그래서 브로커에 대한 조사도 어느 순간부터 유야무야 그만두게 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조사하실 생각이죠?”
그 생각을 묻는 리스티의 말에, 유태진이 어렵지 않게 답했다.
“생각보다 간단하더군. 너희도 알겠지만 메세니아 연방공화국의 모든 범죄는 할파스 상회로부터 시작되지. 만악의 근원이라 불리기도 하고. 아마도 사라진 브로커 놈들도 그 근본을 타고 올라가 보면 분명 할파스 상회와 연관이 있겠지. 우리는 그 부분을 파고들어갈 거다. 놈들은 분명 뭔가 알고 있어.”
유태진의 말은 정론이었다. 할파스 상회는 공화국 내의 상권 대부분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심지어 양지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음지까지 장악한, 전무후무한 상권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이라면 조사해야 할 대상이던 브로커들도 충분히 연관이 있을 것이다. 아니, 틀림없었다.
공화국 내에서 불법적인 장사를 하려면 적어도 할파스 상회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는 시도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할파스 상회의 영향력은 그 정도로 컸다.
그러자 이번엔 아리엔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위험해요. 할파스 상회는 그냥 평범한 기업이 아니라고요.”
“안다. 우주의 10대 기업 중 하나라는 걸.”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에요. 우주적인 규모로 본다면 10대 기업 중 하나지만 공화국 내부에서는 그보다 더하죠. 공화국 전체를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오죽하면 메세니아 연방공화국을 할파스 연방공화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겠어요? 이건 우주의 3대 세력 중 하나를 적으로 돌리는 거나 다름없다고요.”
아리엔의 말대로였다. 할파스 상회의 힘은 메세니아 연방 공화국 전체를 좌지우지한다. 그들이 가진 돈은 공화국의 정재계에 고루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심지어 부패한 군부집단이라는 테트라조차 그들 앞에서는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니, 그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리스티도 이에 덧붙여 말했다.
“저도 아리엔의 말에 동감이에요. 할파스 상회는 상당히 위험해요. 특히 공화국 내에서라면 더욱 그렇죠. 제가 보유한 기업들이 우주 10대 기업 급이지만, 공화국 내부에서의 영향력만 본다면 할파스 상회의 발끝에도 못 미쳐요.”
여러 사람들이 거듭 경고하자, 유태진도 조금 경각심이 들었다.
물론 쉬울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인베이더들과 연관이 있는 일이니 어느 정도 위험은 있을 거라 짐작했었다.
헌데 이들의 말을 듣고 보니 짐작했던 것보다 더 위험한 듯 보였다.
‘할파스 상회라··· 이윤이 된다면 무슨 짓이든 가리지 않는, 돈에 미친 악덕 기업인가 보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뜻을 접을 생각은 없었다.
“알았다. 너희가 그렇게 말하는 만큼 충분히 조심해서 움직이마. 하지만 놈들을 조사하지 않을 순 없어.”
“···역시 쉽게 포기할 리가 없죠.”
리스티의 얼굴 위로 ‘그럼 그렇지’ 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와 함께 하면서 어떤 성격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직감이 이렇게 말하고 있더군. 여기에 분명 중요한 뭔가가 연관되어 있다고. 그러니 조사하지 않을 수가 없어. 조금 위험하더라도 말이야.”
“역시 고집불통 우리 스승. 결국 이렇게 되네.”
레이첸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당초 이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이미 결정 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너희는 여기 남아있도록 해라. 조사는 나 혼자 해볼 생각이니까.”
“혼자서요? 안돼요!”
“스승님이 강한 건 알지만, 너무 무리한 일입니다.”
유태진이 홀로 나서겠다고 선언하자, 모두가 반대의 목소리를 토해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평범한 조사도 아니고 무려 공화국을 쥐락펴락하는 거대 기업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유태진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심지어 공화국은 우주의 3대 세력 중 하나다. 자칫 유태진이 문제를 일으키기라도 하면 연합과의 외교적인 문제로 대두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나도 지금의 모습과 신분을 사용할 생각은 없다. 다른 모습과 신분을 사용해야지. 그러면 별 문제 없을 거다.”
“다른 모습이요?”
“이렇게 말이야.”
유태진은 그 자리에서 역체변용술을 보여주었다. 인체의 근육과 골격을 뒤트는 것은 물론, 주술적인 힘까지 가미된 역체변용술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시켜주는 중원무림의 변용술 가운데 하나였다.
앞으로 몇 걸음 걷는 순간, 그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다. 더 이상 유태진이라 볼 수 없는 얼굴과 체형을 하고 있었다.
리스티마저 깜짝 놀라 외쳤다.
“세상에··· 이건 그냥 눈속임이 아니야. 거의 폴리모프 수준인데?”
다른 사람들과 달리 리스티는 유태진이 겉모습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 챘다. 심지어 지문은 물론, 눈동자의 홍채조차 다른 사람의 것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모든 물질이나 생명체들이 제각기 갖는 고유의 영자패턴도 달라졌다. 이 정도면 어떠한 고성능 감지장치라 해도 본래 모습의 유태진과 지금의 변화된 유태진을 동일하다고 판단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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