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21화 (322/448)

13권-21화

‘애당초 내 운명은 그 당시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건가. 내가 이렇게 환생해 살아가게 된 것도 전부?’

엘레나의 가설대로라면 자신은 천룡검신 천화운 시절부터 이미 인베이더와 싸울 운명이었다는 말이 된다. 어쩌면 전생의 기억을 잃지 않고 이렇게 다시 태어난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기분 나쁘다거나 불쾌한 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인과의 흐름이 계속 그런 형태로 몰아가는 것 같아 앞날이 걱정될 따름이었다.

‘만일 내가 인베이더와 숙명적으로 부딪쳐야 하는 운명이라면 지금의 역량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해.’

이전까지는 그저 인베이더란 적이 존재하기에 싸웠지만, 현재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놈들과의 숙명적인 싸움을 예고하고 있었다.

오래전 인베이더가 지구를 침공했었고, 그것을 아서왕이 격퇴했으며 지금은 그의 검을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물려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천룡검신이었던 전생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정해진 숙명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

‘실력을 더 키워야겠군. 전생의 경지를 회복하는 것만으론 안 돼.’

전생 마지막 순간 생사경에 올라선 건 그다지 위안도 되지 않는다. 이미 반신 급에 해당하는 인베이더와 맞닥뜨려봤으며, 그보다 훨씬 윗줄인 성좌 급의 존재도 두 차례씩이나 경험했었다.

그들과 싸우기 위해선 적어도 초월지경에 도달해야 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실낱같은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이 검도 어떻게든 다시 예전처럼 복원시킬 수 있을까?’

유태진은 이제 자신의 검이 된 엑스칼리버를 떠올리며 작게 한숨지었다. 한때 신좌들마저 격퇴할 수 있었던 절대의 신기가 지금은 폐품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외지물에 의존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엑스칼리버를 다시 복원시켜야 해. 그래야 가능성이 일말은 생겨.’

그래서 유태진은 엘레나에게 엑스칼리버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능력이 만병의 주인인 만큼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서였다.

하지만 엘레나의 입에서도 부정적인 말만 흘러나왔다.

“확실히··· 지금 이 상태론 못 쓸 것 같네요. 스승님이 말한 봉인을 유지하느라 많이 망가진 모양인데, 아마 이대로 사용했다간 정말로 박살나버릴지도 몰라요.”

“그럼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수준으로 복원할 수는 있을까?”

“무리에요. 보통의 신기도 아니고, 이건 말 그대로 창세 급이잖아요. 제가 손 댈만한 게 아니에요.”

“휴우··· 역시 그렇겠지?”

“본체의 1푼에도 못 미치는 수준만 불완전하게 구현했는데도 제가 이렇게 됐어요. 아마 저 검을 제대로 구현하려고 시도했다간, 구현이 되기도 전에 제가 먼저 즉사할 걸요? 하물며 복원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제 영혼을 불태운다 해도 절대 불가능해요.”

결과적으로 엘레나의 능력으론 엑스칼리버의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 알게 된 유태진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포기하기엔 일렀다. 신좌들과의 싸움에서 조금이라도 승산을 거머쥐려면 엑스칼리버의 복원은 필수였다.

‘그 작자라면 뭔가 알지도 모르겠군.’

결국 멀린을 만나봐야 한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는 인베이더가 지구를 침공했던 1500년 때보다 훨씬 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심지어 엑스칼리버 제작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작자인 만큼 어떤 방도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만난다는 건 어려웠다. 자신은 연합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구 인근의 성계에 있었고, 그들은 지금도 최전선에서 인베이더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아르탈 행성으로 복귀한 다음이라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연락을 주고받는 것조차 여의치 않을 것이다.

불가능하다는 말을 내놓은 이후에도 엘레나는 엑스칼리버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겠네요.”

“뭘?”

“엑스칼리버라는 이 검이 결코 물질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요. 일종의 사상기에 가까워요. 단지 일반적인 사상기는 각 개인마다 갖는 독자적인 의념을 구체화한 거라면, 이건 수많은 사상들을 한데 집결시킨 총화라고나 할까요? 그러니 그 부분에서 복원할 방법을 찾는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렇군. 확실히 일리가 있어.”

엑스칼리버가 가진 터무니없는 힘과 격도 문제지만, 애당초 이 검의 그릇을 만들어낸 방식 자체부터가 매우 특별했다. 성계신은 자신의 남은 힘과 지구의 사상, 그리고 인류의 상념을 더하여 검을 완성시켰다.

그러니 일반적인 물건의 복원방식으론 답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같은 과정을 다시 답습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같은 방법을 사용하려 해도, 지구의 성계신은 소멸된 지 오래였다. 물론 신은 죽지 않는 존재이므로 언제고 다시 부활할 테지만, 그건 적게 잡아도 수백 수천 년 이후일 터.

당장 인베이더의 침공이 예상되는 지금으로선 성계신의 부활만 기다릴 순 없었다. 이를 대체할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 했다.

정 안된다면 연합의 신인 루네리아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만큼 쉽지 않겠지.’

여신 루네리아는 인베이더의 신좌들을 견제하기 위해 가진 능력을 다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그녀가 과연 엑스칼리버의 복원에 힘을 보태줄만한 여력이 남아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심지어 여신을 직접 만나봐야 하는데, 지금 유태진의 입지로는 그것조차 힘들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많은 공을 세우긴 했지만, 연합에서 활동한 기간이 워낙 짧았기 때문이었다.

더 고민해봐야 답이 나올 상황이 아님을 절감한 유태진은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상념을 털어내었다.

“일단 복원 방법은 차차 찾아보도록 하자. 뭔가 방법이 있겠지.”

“예, 스승님. 저도 고민해 볼게요. 하지만 많이 놀랐어요. 아서왕의 전설에 그런 사연이 있었다니요. 게다가 전설의 성검인 엑스칼리버를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새삼스런 눈으로 엑스칼리버와 유태진을 바라보는 엘레나의 눈빛에, 유태진은 그저 쓰게 웃고 말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설마 내가 그 전설을 이어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

* * *

리플 행성에서의 일들을 뒷마무리한 유태진은 서둘러 떠나기로 했다.

이미 리플 행성에 있던 인베이더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전멸한 상황. 애당초 후보생들의 실전훈련이 목적이었던 만큼 이곳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엘하운드들을 납치해 이송하려 했던 좌표가 연방공화국 세력권 안이란 것이 확인된 이상 더는 시간을 지체하기도 어려웠다.

조만간 대략적인 조사가 끝나고 나면 베네트 국장이 연락을 해올 것이다. 그 전까지 어떻게든 후보생들의 실전 훈련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정말 아쉽습니다. 좀 더 머물면서 편히 쉬시다 가셨으면 했는데···.”

메이트룬은 정말로 아쉽다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인베이더와의 전투가 마무리된 이후 불과 3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동안 그들은 유태진 일행들을 융숭하게 대접해주었다.

이 정도면 거의 국빈취급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편하고 좋아도, 더는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래서 유태진도 단호하게 결단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저흰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고마움은 마음으로만 받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때는 정말 성대하게 대접해 드리지요.”

“예, 언젠가 여유가 되면 다시 찾겠습니다.”

그렇게 유태진 일행과 오버러들은 엘하운드들의 성대한 배웅을 받으면서 리플 행성을 떠나갔다.

순식간에 대기권을 탈출한 아우기스와 프로메테우스는 곧바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아아, 이제 편한 날은 다 지나갔구나.”

“불과 3일뿐인 천국이었지. 그런 꿀맛 같은 휴식은 간만이었어.”

“그건 그렇고 휴가는 언제 쓰지?”

“휴가는 무슨. 우리 인생이 죄다 싸움 뿐인데 말이야.”

“지구 파견만 끝나면 휴가라도 신청해야겠어.”

“요즘 인베이더들이 극성이라던데 상부에서 받아나 줄지 모르겠군.”

“아무튼 시도는 해 봐야지.”

오버러들은 다들 지난 며칠간의 안락함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앞으로 싸워야 할 전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버러들의 풀어진 모습에 후보생들까지 해이해질 것을 염려한 마틴이 그들을 다그쳤다.

“며칠 편히 쉬었다고 다들 풀어졌나본데 이제부터 다들 바짝 긴장하도록. 여러분들은 겨우 첫 실전을 치렀다. 그게 실전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예.”

후보생들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들도 리플행성에서 겪은 첫 실전으로 인베이더와의 싸움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인지하고 있었다. 물론 침식도가 낮은 행성 치고는 너무 변수가 많아서, 싸움도 평소보다 더 험난했지만··· 그건 어떤 전장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싸움에는 정석이 없었고, 변수란 어디서도 생겨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러니 항상 방심하지 않는 태도로 전투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게 옳았다.

아우기스와 프로메테우스는 리플 행성을 떠난 이후 6곳의 성계를 돌면서 인베이더들을 무사히 격퇴했다. 하나같이 침식도가 낮은 곳들인 터라 엘레나와 마틴이 후보생들을 인솔하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거듭 실전을 겪으면서 후보생들은 점점 오버러다운 모습이 되었다. 첫 실전에서 보인 미숙함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실력은 아직도 한참 멀었지만, 이제 어떤 실전을 겪더라도 이전과 같은 어리숙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준에는 겨우 도달하게 된 것이다.

‘실전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앞으로는 실력을 갈고 닦는 게 더 낫겠어.’

물론 유태진이 보기에는 아직도 많이 부족해 보였지만, 이제부터는 단순히 실전만으로 갈고 닦는 걸론 성장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본신의 실력을 좀 더 갈고 닦는 게 효율적으로 더 나았다.

* * *

아우기스와 프로메테우스는 이윽고 태양계에 이르렀다. 후보생들의 실전훈련을 마무리하고 간신히 지구로 귀환하는 길이었다.

지구에 도착한 뒤 유태진은 후보생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앞으로 일주일간은 휴식 시간을 주겠다. 그러니 그동안은 마음껏 즐기도록!”

“와!”

후보생들이 흥분에 차 소리 질렀다. 그동안 계속된 싸움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는데, 휴식기간을 준다고 하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태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강도 높은 훈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일주일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게 좋을 거다. 이상!”

그 말에 후보생들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훈련이 기다리고 있기에 이런 엄포를 놓는 건지 짐작이 가질 않아서였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