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20화
“확실한 겁니까?”
[그래. 좀 전까진 나도 반신반의하고 있었지. 하지만 자네의 보고를 받고는 이제야 확신이 섰다.]
“······.”
엘프의 아종을 노린다는 그 말에 유태진은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틀란 행성에서 비밀시설에 갖혀 있던 제이나의 경우도 그랬고, 변질된 세계수와 에메랄드 헤븐도 전부 엘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 있는 것들 아니던가.
[물론 아주 단정 짓긴 이르지. 지금 확인된 건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하니까. 좀 더 조사해보고 자세한 내용이 밝혀지면 ]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
“저희가 포획한 인베이더 함선의 데이터 시스템에서 몇 가지 정보를 획득했습니다. 놈들의 목적이 뭔지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될지도 모릅니다.”
[호오, 그래.]
유태진은 즉시 통신회선을 통해 데이터를 전송했다. 그것은 인베이더 전함의 항법 데이터였다. 거기에는 놈들의 전함이 어떤 경로로 움직여 왔으며, 마지막으로 어디로 향하려 했는지 목적지에 대한 좌표가 기록되어 있었다.
전송받은 데이터를 확인한 베네트 국장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여긴 메세니아 연방공화국의 영역 안인데··· 자네도 이걸 확인했나?]
“예, 좌표의 위치가 메세니아 연방공화국의 영역이라 섣불리 움직일 수 없어 이렇게 국장님께 직접 보고 드린 겁니다.”
[그렇군. 이런 문제는 쉬이 건드리기 어려운 일이지.]
아르탈 행성연합보다는 그 세가 작긴 해도, 메세니아 연방공화국은 인베이더와 대적하는 우주의 3대 세력 중 하나였다. 제아무리 연합이 강성하다 해도, 그 영역을 함부로 조사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유태진이 이렇듯 베네트 국장에게 먼저 알린 것이다.
“이번 일은 메세니아 연방공화국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봐야 할까요?
유태진이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묻는 그 말에, 베네트 국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그렇다고 단정 짓긴 어려워. 이 데이터에 나온 좌표가 메세니아 연방공화국 영역인 건 확실하지만 지금 현재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곳이니까. 몇 번에 걸친 인베이더의 침공으로 인근 성계들이 초토화 되면서 폐기 지정을 받았고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있지.]
“적어도 메세니아 연방공화국의 중앙정부가 관여되었을 가능성은 없다는 거군요.”
[그렇지. 현재의 연방수상인 이사트 베이노아는 올곧고 신념 넘치는 인물이야. 내가 아는 한 그 자가 이런 더러운 일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은 결단코 없다고 본다.]
이사트 베이노아는 청렴하기로 유명한 자였다. 특히 공화국의 정풍운동을 주장하고 나선 의용조직 레이스컬의 거두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연방공화국 내에서도 최근 부정부패지수가 크게 주춤하는 추세였다.
그렇지만 중앙정부가 관여될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메세니아 연방공화국 전체가 그런 건 아니었다.
“허나 문제는 연방 수상 외의 인물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거군요.”
[그렇지. 연방공화국은 꽤나 부패한 곳이니까. 이사트가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노력은 하고 있지만, 워낙 뿌리 깊은 나무인 만큼 쉽지가 않아. 그러니 테트라 같은 부패한 군부조직이 맘껏 활개를 치고 있는 거겠지.]
이사트 베이노아 수상과 레이스컬 출신의 인물들이 공화국을 청렴하게 바꾸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쏟고 있긴 하나, 실제 그들의 손이 미치는 곳은 극히 적었다. 특히 오랜 부패 세력인 군부조직인 테트라 같은 곳은 섣불리 건드리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아직도 연방공화국 전반은 부패의 천국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어떻게 할까요?”
유태진의 물음에 베네트 국장이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은 내 직속 요원들을 움직여 은밀히 조사를 해보도록 하지. 이유야 어찌 됐든 공화국을 건드리는 일이니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겠지. 자네가 나서는 것보다는 나을 게야.]
“알겠습니다. 그럼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죠.”
베네트 국장이 그렇게 결정을 내린 이상 유태진도 더는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할 순 없었다. 일단 조사 결과가 나온 뒤에야 의견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해 일단락 지은 베네트 국장이 불쑥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지구에서 발굴해낸 병아리들을 실전훈련 시키느라 바쁘다지?]
“예, 지구의 전반적인 전력을 끌어 올리려면 실전은 필수니 말입니다. 이제 겨우 첫 실전이긴 합니다만···.”
후보생들이 첫 실전 치고는 다들 잘 해준 덕분에 성과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만족하기엔 아직 일렀다. 나쁘지 않다는 말은 병아리들 치고는 제법이라는 거였지, 정식 오버러들과 비교한다면 제몫을 다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제대로 한 사람 몫을 다 하려면 앞으로 몇 차례 더 실전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럼 내가 조사를 끝낼 때까지 자네는 병아리들이나 훈련시키고 있게. 조만간 다시 연락을 주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다시 뵙도록 하지요.”
그것으로 두 사람의 길지 않은 통신이 마무리 되었다.
“메세니아 연방 공화국이라. 인연이 제법 깊긴 하군.”
그 뒤로 ‘그게 악연인지 선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라고 덧붙인 유태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아우기스 내에 있는 의무실로 곧장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엘레나가 여전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계속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미 어제 저녁부터 그녀는 의식을 회복한 상태였다. 다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만큼 의무실 신세를 지고 있었던 것이다.
유태진이 안으로 들어서자, 누워 있던 엘레나가 병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스승님.”
“됐다. 그냥 편히 누워 있어. 몸도 정상이 아닌데 말이야.”
유태진의 만류에 엘레나가 다시 침상에 몸을 뉘였다. 움직임이 느린 걸 보니 여전히 힘들어 보였다.
“그래. 몸은 좀 어때?”
“나른한 게 움직이기 좀 힘든 편이에요. 그래도 어디가 아프거나 한 건 아니니 곧 나아지겠죠.”
“그렇다면 다행이고.”
사실 엘레나의 상태는 육체의 문제보다는 영혼의 문제라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역량을 넘어서는 구현으로 혼에 큰 부담이 가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천룡파마신검을 구현했던 당시와 달리 이 정도에서 그친 것은, 그만큼 그녀의 역량이 성장한 덕분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럼 치료를 하도록 하자. 편히 있어.”
“예.”
유태진은 신성력을 일으켜 엘레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고하면서도 온화한 기운이 퍼져 나와 그녀를 푸근하게 감싸듯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략 10여분 정도 지난 뒤, 유태진은 기운을 거둬들였다. 마음 같아선 그대의 여신대리자처럼 단번에 완치시키고 싶었지만, 아직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신성을 자각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고, 이것을 다루는 것도 능숙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이렇게 주기적으로 치료를 하고 있었다.
치료가 끝난 뒤 엘리나가 한결 가뿐해졌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움직여 보였다.
“많이 나아졌어요. 이젠 거동할 만한데요?”
“그래?”
“저, 이제 더는 누워 있지 않아도 되겠죠?”
가만히 누워 있는 게 어지간히도 지겨운 모양이었다. 하긴 의식을 되찾은 어제부터 하루 꼬박 계속 누워있기만 했으니 지겨울 만도 했다.
잠시 고민한 유태진은 엘레나의 지금 몸 상태를 감안해 부분적으로 허락해 주었다.
“음, 무리하지 않는다면 상관없겠지. 하지만 영력은 아직 사용 금지다. 당분간은 쉬면서 영혼의 부담을 줄여야 해. 만일 조금이라도 사용하는 모습이 보이면 의무실 침상에 묶어놓을 거야. 알았어?”
“예.”
유태진의 단호한 엄포에 엘레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해뒀으니 그녀도 섣불리 영력을 사용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쯤 해뒀으면 되겠다 싶어 의무실을 나서려던 그때, 엘레나가 그를 붙잡았다.
“스승님.”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유태진이 이유를 묻자, 이번에는 엘레나가 반대로 되물어왔다.
“스승님의 검··· 어떻게 된 거죠?”
“······.”
그녀도 천룡파마신검이 달라진 사실을 인지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검을 직접 구현하기까지 했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천룡파마신검은 뭐라 하지?”
“어느 순간부터 아무 말도 안 해주고 있어요.”
그녀는 천룡파마신검과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주고받는 건 아니어도, 어느 정도 념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헌데 그마저도 이젠 통하지 않게 된 듯싶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유태진은 잠시 갈등했다. 아발론에서 알게 된 아서와 엑스칼리버에 대한 이야기를 엘레나에게 밝혀도 될지 고민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이내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천룡파마신검을 통해 자신의 전생에 대한 사실까지 알고 있는 제자였다. 여기에 아서와 엑스칼리버에 대한 진실까지 더해진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휴··· 일단 자리에 앉아라.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구나.”
유태진은 그때부터 자신이 보고 듣고, 겪었던 아발론에서 있었던 일들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엘레나는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에 거듭 놀라면서도, 그 이야기들을 신중히 귀담아 들었다.
이야기가 끝난 뒤, 그녀는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랬군요. 인베이더가 지구를 침략한 게 벌써 오래 전에 있었던 거였군요.”
“그래. 그런 셈이지.”
“그리고 엑스칼리버를 얻으면서 천룡파마신검이 변했고요?”
“나도 어떻게 된 건지는 잘은 모른다. 하지만 천룡파마신검이 엑스칼리버와 동질인 것만은 확실해.”
그렇지 않다면 엘레나가 구현한 검이 엑스칼리버의 모습으로 나왔을 리 없었다. 그리고 유태진이 느낀 바로도 그 두 검의 성질과 영적 반응도 서로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모순점이 존재했다. 엘레나도 그 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하지만 스승님의 전생 세계인 무림은 아서왕이 활동한 세계와 전혀 다르죠. 그리고 그 시기에는 분명 아발론에 봉인되어 있었을 테고요. 그렇다면 시공간에는 별개의 검으로 존재했다는 건데··· 이럴 수도 있는 건가요?”
“그래서 나도 이해가 안 가는 거지.”
유태진도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던 그때, 엘레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한 가지 가설을 내놓았다.
“어쩌면 천룡파마신검은 엑스칼리버의 분신이었을 수도 있겠어요.”
“분신?”
“예, 란슬롯이란 사람이 그랬었죠? 엑스칼리버에는 그에 합당한 적합자가 필요하다고요. 어쩌면 엑스칼리버는 적합자를 찾기 위해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내보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거냐?”
“방금 스승님이 보여준 엑스칼리버 때문이에요.”
좀 전에 아발론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면서 유태진은 자신의 심상에 존재하던 엑스칼리버를 현실로 끄집어내 엘레나에게 직접 보여주었었다. 그리고 그때 뭔가 느낀 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천룡파마신검과 엑스칼리버는 분명 동질이에요.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죠. 하지만 그 안에 내재된 격에서 차원이 달라요.”
“격이 다르다?”
“예, 천룡파마신검이 촛불이라면, 엑스칼리버는 대형 산불 정도라고나 할까요? 그 정도로 차이가 커요. 그래서 분신이라는 가설을 떠올린 거고요.”
“으음···.”
“지금은 엑스칼리버가 정상이 아니라서 그렇지만, 아마 전성기 시절에는 정말 무시무시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 힘으로 성좌들을 물리쳤겠죠. 하나 지금 드러난 힘은 말 그대로 단편적인 수준에 불과해요. 아마 1푼에도 못 미칠 걸요?”
“그렇군.”
이쯤 되니 엘레나의 가설이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성좌들을 물리칠 정도의 막강함이라면, 기존의 천룡파마신검과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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