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16화
하지만 일반적인 수단이나 방법으로는 제 시간 안에 하이브까지 닿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좀 전에 그가 하이브 인근에서 모로세움까지 어기비행술로 날아 왔을 적에도 거의 20여분 가까이 시간을 소모했었다.
물론 전력을 다한다면 좀 더 단축될 테지만, 지금은 1분1초가 급한 상황. 당장이라도 엘레나와 오버러들의 목숨이 위험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게 긴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결국 어지간해서는 사용하지 않으려던 한 수를 꺼내고야 말았다.
하이브를 향해 앞으로 내딛는 한걸음.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유태진의 일보에는 수많은 이치들이 담겨 있었다.
칠성둔형(七星遁形)
6성. 거문(巨門)
비의. 금정(禁程)
눈앞에 펼쳐진 장대한 시공간이 순식간에 한 점으로 압축되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이브에서 모로세움까지 오면서 거쳐 왔던 수만 KM에 달하는 거리를 고작 단 한걸음의 간격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무당의 시조 장삼봉이 창안했다는 절학인 칠성둔형. 일보에 시공간을 뛰어넘고, 물리법칙과 세계의 제약조차 초월한다는 초월무리의 집합체였다.
점창의 무학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유태진조차 보법에서만큼은 이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스스로 인정할 정도니, 그 고절함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만일 그가 무림맹의 공동전인이 아니었다면, 이 같은 무당의 초절무학을 전수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단 한걸음만으로 까마득한 거리를 뛰어넘은 유태진의 바로 눈앞에 하이브의 중추인 코어 룸 내부의 정경이 펼쳐졌다.
상황은 생각보다 급박했다. 어찌된 일인지 하이브의 코어는 폭주 상태로 당장이라도 터질 듯 팽배하게 부풀어 있었고, 엘레나는 그 앞에서 검을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쥐고 있는 검은 다름 아닌 엑스칼리버였다.
그것을 본 유태진의 두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역시··· 엑스칼리버가 바로 천룡파마신검이었나?’
아바론에서 엑스칼리버를 얻은 이후 그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거나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엘레나가 기존의 천룡파마신검이 아닌, 엑스칼리버를 구현해내다니.
그건 즉 천룡파마신검과 엑스칼리버가 외형은 전혀 달라도 서로 동일한 존재임을 증명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장 엘레나의 목숨이 위험했다. 유태진 없이도 용케 검을 구현해내긴 했지만, 그걸 직접 사용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사용하는 순간 모든 영맥이 박살나 사망하겠지. 아니면 전처럼 혼에 큰 타격을 입고 생사불명에 빠지거나.’
그것을 엘레나도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정을 내린 걸 보면 자신의 목숨보다 여기 있는 모두의 목숨을 더 우선시 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놔둘 순 없지.’
생각은 길었지만 그 시간은 불과 0.1초도 안될 만큼 짧았다. 유태진은 그대로 검을 휘두르려는 엘레나의 손을 붙들어 잡았다.
“누구?”
위태롭게 서 있던 엘레나가 흠칫 놀라더니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유태진을 확인하고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스··· 스승님!?”
“꽤 고생 많았구나.”
“스승님이 어떻게!”
엘레나는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스승인 유태진은 절대 여기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 앞에 나타난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검을 구현하느라 너무 무리한 나머지 환각이라도 보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가 자신의 어깨를 짚는 순간 더 이상 그런 의문은 깨끗이 사라졌다.
“더는 무리할 것 없다. 엘레나. 이젠 내가 왔으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안도의 감정과 함께 다리의 기운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안 그래도 검을 무리하게 구현하느라 입은 데미지가 긴장이 풀리면서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유태진은 무너지려는 엘레나를 한손으로 부축하고는 다른 한손으로는 그녀가 구현한 검을 받아 쥐었다.
그러자 무궁무진한 힘이 들끓는 게 느껴졌다.
쿠구구구!
‘평범한 방법으론 안 되겠어.’
행성 에너지를 강제적으로 끌어다 쓰는 하이브의 코어가 가진 힘은 실로 방대하다. 물론 그 규모는 침식도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낮은 침식도라 할지라도 그 에너지 량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 폭주 상태에 놓인 코어의 에너지만 봐도 그러했다. 저 정도면 설령 그랜드 급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그대로 쓸려나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유태진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우우우우!
유태진의 손에 들린 엑스칼리버가 붉은 광채를 흩뿌리면서 크게 울었다.
비록 오랜 세월 속에서 낡고 무디어졌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그야말로 경천동지.
유태진은 그 힘으로 코어의 폭주를 저지하기 위해 나섰다.
천룡무상검법(天龍無上劍法) 제 4식. 적룡출하(赤龍出荷)
비의. 적류회선강(積流回旋罡)
검신이 크게 원을 그린 순간 붉은 용의 그림자와 함께 거대한 흐름이 일어나 팽배하게 부풀어 오른 코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것이 천룡무상검법의 적류회선강. 흡, 탄, 반, 회, 유, 류 등의 무결이 에너지의 흐름을 파고들어가 오히려 그것을 침식 장악하고, 회전을 통해 융합-증폭시킨 후 그대로 그 힘을 폭풍처럼 발산하여 강대한 파괴력을 내는 비의.
그것이 지금 폭주하는 코어의 에너지를 거침없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쿠르르! 콰우우!
코어에서 시작된 에너지가 적룡의 그림자에 휘말려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일단 터져나가면 반경 수백 킬로미터를 지옥으로 만들고 남을 막대한 에너지가 빠르게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아아···!”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의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게나 절망스럽던 코어의 폭주가 저런 식으로 간단히 제압될 줄이야.
심지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코어의 폭주 에너지를 집어삼킨 적룡의 그림자가 검 끝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본래 적류회선강은 상대의 공격을 집어삼켜 다시 되돌려주는 비의. 하지만 공격할 상대가 없는 지금, 유태진은 이 막대한 힘을 다른 방도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느껴진다.’
크게 확장된 그의 기감으로 수많은 존재들이 느껴졌다. 현경의 경지를 다시 되찾은 데다, 엑스칼리버를 손에 쥐면서 전생의 마지막 순간의 경지까지 도달하게 된 유태진의 감각권은 무려 리플 행성 전체를 자신의 손바닥 내려다보듯 아우르고 있었다.
고오오오!
그 순간, 검 끝에 집중되었던 막대한 에너지를 품은 적룡의 그림자가 곧 무수한 빛다발로 화했다.
그것은 무려 2억4천8백50만 개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어검강. 그 수는 정확히 리플 행성 내에 존재하는 인베이더들의 수와 일치하고 있었다.
“대청소 시간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한꺼번에 쓸어주지.”
인베이더의 멸절을 단언하는 그 말과 함께, 무시무시한 숫자의 어검강들이 저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하이브의 상부를 가차 없이 꿰뚫더니 저 하늘 높은 곳까지 치솟았다.
한편 하이브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아우기스와 프로메테오스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안그래도 하이브의 코어 폭주가 관측되는 바람에, 내부에 진입한 오버러 부대와 계속 연락을 시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코어의 폭주 에너지에 의한 펄스 노이즈가 발생하면서 통신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더 이상 오버러 부대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함장님! 당장이라도 후퇴해야 합니다. 이대라로라면 본 함도 코어의 폭주에 휘말리게 될 게 뻔합니다. 그렇게 되면 본 함도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어요!]
[후퇴?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나? 오버러들은 지금 하이브 심층에서 싸우고 있는데, 우리만 안전을 도모하자고?]
부관의 말에 함장이 두 눈에 불을 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부관은 무거운 표정으로 현실을 직언했다.
[휴··· 함장님 심정도 이해는 갑니다만, 코어의 폭주가 이미 절정단계를 넘어섰습니다. 그들이 무사히 빠져 나올 가능성은 확률상 0.1%도 되지 못합니다. 이 상황에서 저희까지 위험을 감수하는 건 너무 무모합니다. 이번 코어의 폭주에 휘말리면 본 함의 방어력이라 해도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관측되고 있는 코어의 폭주가 미치는 범위는 생각보다 좁아서 고작 해봐야 수백 킬로미터에 불과했다. 막대한 행성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하이브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폭발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폭주하는 에너지의 밀도가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 어느 정도냐면 준대형에 근접한 출력을 가진 특무함 아우기스조차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때문에 부관이 이런 조언을 했지만, 함장은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물론 위험하다는 건 안다. 가능성이 낮다는 것도 알지. 하지만 우리의 임무는 오버러들을 안전하게 이송하고 다시 데려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오버러들이 하이브를 빠져나오기라도 한다면 어쩔 생각이냐? 그들을 포기한 채 우리만 살겠다고 도망가겠다고?]
[······.]
[애당초 전함에 탄 순간부터 나는 목숨을 걸었다. 인베이더와 싸우기 위해 군에 입대했고, 지금까지 놈들을 쳐 죽이는 걸 목적으로 전장을 전전해왔지. 헌데 너희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기로 한 거냐? 꼬박꼬박 지급되는 연봉과 알량한 전투수당? 아니면, 출세가 너희의 목적이냐? 애당초 안전을 도모할 생각이라면 전장에 나오지 말았어야지.]
다들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임무는 오버러들을 작전지까지 무사히 이송하고, 다시 귀환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함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던가.
물론 코어의 폭주가 위험하다고는 하지만 아군의 죽음이 제대로 확인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후퇴를 거론한다는 건 명백한 실수였다.
[죄송합니다.]
[그래. 반성했으면 그걸로 됐다. 다들 하이브 심층부 상황을 다시 관측해. 통신도 재시도하고. 어떻게든 펄스 노이즈를 뚫고 그들과 연결을 시도하는 거다. 그리고 배리어 출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코어가 폭주하더라도 어떻게든 버티면서 기다린다. 그들의 사망이 확인되지 않는 한 우린 포기하지 않는다.]
다들 함장의 호통소리에 각오를 다진 듯 결연한 얼굴로 즉각 행동에 들어갔다. 허나 그들이 뭔가를 시도하기도 전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오퍼레이터가 비명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하이브 심층으로부터 막대한 영자력 반응! 아니, 그것이 지금 지상을 향해 치솟아 오르고 있습니다.]
[뭣이!? 펄스 노이즈로 통신까지 끊긴 상황에서 이건 또 무슨 일이야?]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이브의 상부를 꿰뚫고 무수한 빛줄기들이 솟구치는 것이 관측되었다.
그것은 가히 눈으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빛줄기들의 향연이었다.
[대체 이건!]
[초고밀도 영자탄에 가깝습니다. 그 수는··· 무려 2억4천8백80만 개!]
[이런 미친!? 대체 하이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하이브의 포격이라고 하기엔 그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하이브가 대공공격 능력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하이브의 제네레이터 역할을 하고 있는 코어가 폭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포격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영자탄들이 아우기스와 프로메테우스를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하늘로 솟구쳐 날아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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