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15화
외부와의 통신도 전부 먹통이 되었다. 혹시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까 싶어 아우기스나 유태진에게 연락을 취해보기도 했지만, 코어 에너지가 폭주하면서 발생한 에너지 펄스에 의해 모든 연락이 두절되고 있었다.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다고 여긴 그때, 코어 룸을 뒤흔드는 울림이 시작되었다.
고오오오!
폭주하기 시작한 코어 에너지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어지간한 준대형 전함의 포격에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이었다.
만약 이곳에 유태진이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저 폭주를 억누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엘레나와 마틴으로선 도저히 불가능했다. 저건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쿠구구구!
진동이 커질수록, 그리고 폭주하는 에너지의 파동이 거대해질수록 모두의 얼굴 위로 절망감이 짙어져갔다. 이젠 그들도 피부로 와 닿는 죽음의 그림자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방법이 없는 건가!? 이대로 끝이라고?”
마틴조차 어지간해서는 내뱉지 않을 말을 내뱉었다. 그만큼 상황이 절망적이었다. 도망칠 수도, 그렇다고 뭔가를 시도해 볼 방도조차 없는 이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한 사람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엘레나만큼 유일하게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시도해볼 방법은 있어. 하지만 가능할까, 스승님 없이?’
그녀는 유태진이 보여주었던 그 당시의 광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검으로 세계수를 가르고 저 우주와 맞닿아 있던 까마득한 상공까지 베어내던 거대한 빛의 거검의 모습을.
그것이라면 저 코어의 폭주를 힘으로 제압하는 것도 가능할 터. 설혹 그 힘의 극히 일부만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국면을 모면하기에는 충분할 거라 믿었다.
‘부탁이야. 내게 힘을 빌려줘.’
그녀의 심상 위로 한 자루의 검이 떠올랐다. 그것은 비록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지만, 유태진과 만난 이후로 언제나 이어져 있는··· 상상을 초월한 사상의 결정체였다.
고오오오!
그녀의 갈망과 함께 이 자리에 존재할 리 없는 한 자루의 검이 현실세계에 구현되기 시작했다.
뿌득!
하지만 쉽지 않았다. 잇몸에서 피가 흘러나올 만큼 이를 악물며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다.
전신의 영맥은 당장이라도 파열할 것 같았고, 의식마저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구현하려 하는 이 검은 그녀의 역량을 한참 넘어섰으니까.
예전에 세계수를 베어낼 당시 천룡파마신검을 구현했던 엘레나는 한동안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던 일이 있었다.
자신의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구현한 탓에 혼백에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엘레나는 고통스런 와중에도 최대한 신중을 기했다.
‘그때처럼 완벽할 필욘 없어. 그 힘의 극히 일부라도 구현해낼 수 있다면 충분해.’
많은 이들에게 무구구현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것의 진정한 이름은 바로 만병의 주인(Weapon Master). 병기란 카테고리 내에서라면 그녀가 인지한 그 무엇이든 구현해 낼 수 있는 고유이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모든 병기를 구현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역량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가능했으며, 그 이상의 병기를 구현하려 했다간 자멸할 위험이 컸다.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달랐다. 영성을 가진 천룡파마신검은 유태진의 제자가 된 엘레나와 교감을 나눴고, 그녀에게 기꺼이 힘을 빌려주기로 하였다.
그렇기에 본래대로라면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초유의 신기를 이렇듯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화아악!
드디어 온전한 검의 형상이 손에 잡혔다.
엘레나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천룡파마신검, 아니 천룡파마신검이라고 여겼던 검의 모습에 일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검의 형상이 달라졌어?’
그냥 외형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심지어 오랜 세월에 풍화된 것 마냥 낡고 볼품없기까지 했다.
하지만 엘레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외형은 달라졌다 해도 그 안에 담긴 본질만큼은 달라지지 않았음을. 가히 무궁무진이라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막대한 힘과 지고한 격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뭐··· 뭐야!?”
“허어어억! 무슨 이런 미친 규모의 영력이!?”
코어의 폭주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엘레나가 쥔 검으로부터 분출되어 나오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세와 힘!
다들 거기에 압도되고 만 것이다. 심지어 일부 오버러나 후보생들은 그 힘에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완전히 구현된 게 아니었다. 지금도 검은 구현되고 있는 중이었고, 엘레나는 안간힘을 쓰며 그것을 안정화시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역시··· 나 혼자서는··· 벅차구나.’
사실 유태진의 도움 없이 여기까지 해낸 것만으로도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불안전하게나마 구현할 수 있었던 건, 그 당시에 비해 그녀의 역량이 수배 이상 상승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못했더라면 구현 도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거나,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게 분명했다.
“엘레나 양, 대체 그건?”
“다들··· 물러서라고 해··· 주세요.”
자신을 돌아보며 묻는 마틴에게 엘레나는 간신히 쥐어짜는 목소리로 그렇게 경고하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이제 코어의 폭주는 거의 임계점에 가까워진 상황. 새빨갛게 물든 채 본래의 크기보다 몇 배나 커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무겁다.’
엘레나는 구현된 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불완전하게 구현되었으면서도, 그 안에 담긴 힘이 너무 무궁무진한 탓인지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게 편 채 간신히 버티고 섰다. 이제 자신들의 마지막 희망은 이 검에 달려 있었다.
고오오오!
무지막지한 영력이 검신 위로 맺히기 시작했다. 어찌나 강대하던지 기운이 일어난 것만으로도 하이브 전체가 크게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엘레나의 뇌리로 하나의 검식이 떠올랐다. 천룡무상신검이 정신감응을 그녀에게 전해준 이 검식이야말로 지금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선 가장 적합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힘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설혹 자멸할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여기 있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선 자신의 목숨이라도 감수할 수밖에···.
결연한 마음으로 온 힘을 쥐어짜 검을 내리그으려던 그 순간, 검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붙잡는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다.
“누구?”
엘레나가 당황해 돌아보자, 그곳에는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스··· 스승님!?”
* * *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는 고향을 못 보는 줄 알았어요.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자신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하는 엘하운드들을 바라보면서 유태진은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인베이더들이 설마 엘하운드들을 산 채로 잡아뒀을 줄이야.”
인베이더에 대한 기존의 상식대로라면 놈들에겐 포로라는 개념이 없었다. 지성체는 무조건 멸절해야 하는 대상인 만큼, 놈들이 지나간 장소에는 시체와 파괴된 흔적 밖에는 남지 않는다.
그런데 원주민을 산채로 사로잡아서 어딘가로 이송하려 했다? 이건 기존의 인베이더에 대한 인식과 완전히 배치되는 일이었다.
“죽이지 않고 산채로 포로로 잡았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도무지 알 수가 없군.”
그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인체실험이었다. 물론 인베이더들이 인체실험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납득하긴 어려웠지만, 그와 비슷한 선례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다.
아이틀란 행성의 하이브 인근에서 발견되었던 비밀연구시설. 하이엘프의 혈통으로 짐작되던 제이나도 당시 그곳에 사로잡혀 있었지 않았던가.
구체적인 목적은 알 수 없지만, 그 의도가 좋지 못할 거란 건 확실했다.
‘하지만 하고많은 종족 중에서 왜 굳이 엘하운드지?’
최근 후보생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여러 행성들을 수소문해봤지만, 원주민들을 산채로 잡아간다는 소린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그 사실이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일이 다수의 행성에서 발생했었다면 진작 소문이 돌았을 것이다.
“일단 함선 안을 더 뒤져볼까?”
좀 전엔 포로로 갇혀 있던 엘하운드들을 풀어주느라 함선 내부를 수색해볼 겨를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샅샅이 찾아보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걸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 함이 엘하운드를 어디로 옮기려 했는지, 그 행선지만 알아내도 충분하지.’
일단 가려고 했던 목적지만 알아내도 놈들을 추적해보기엔 충분할 것이다.
유태진은 이번 사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반드시 사수해야 할 1수위인 하이브를 서슴없이 포기해 가면서까지 엘하운드를 어디론가로 수송해 가려 했던 인베이더들이었다. 그들을 이용해 무엇을 하려 한 것인지 보다 확실히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이 둘 모두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제이나가 잡혀 있던 아이틀란 행성의 비밀 시설과, 이곳에서 엘하운드들을 포획하려 한 이 상황이 말이야.’
딱히 근거를 대긴 어려웠지만, 유태진은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그런 직감은 대부분 들어맞았다. 그의 영격은 이미 반신지경에 이르러 있는 만큼, 스쳐지나가듯 느끼는 직감조차 거의 미래예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함선 안을 조사해보려고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그의 얼굴이 일순 흠칫 굳어졌다.
“뭐지!?”
우우우웅!
돌연 알 수 없는 강한 울림이 내부에서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심상에서부터였다.
그리고 그 원인은 금세 알아냈다.
“엑스칼리버?”
그의 심상과 동화되어 있던 엑스칼리버가 돌연 어떤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도 곧 알게 되었다.
“설마, 엘레나가?
엑스칼리버의 공명이 저 먼 곳과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에는 하이브가 존재했다.
‘그래, 그때도 그랬어.’
엘레나가 천룡파마신검을 구현했을 때도 바로 이런 느낌을 받았다.
검과 연을 이어서 그것을 사상으로 빚어내는 형태의 구현 능력.
아마 그 녀석이 지금, 엑스칼리버를 구현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건 즉, 이 검의 힘을 필요로 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치잇,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좀 전만 하더라도 하이브를 지키는 인베이더의 수가 대폭 줄어 있다고 전해왔었다.
모로세움을 공격하느라 하이브를 지킬 병력까지 다 내돌린 줄 알았는데, 설마 그게 아니었단 건가?
다급히 모듈밴더로 연락을 취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어떤 에너지 펄스가 작용하고 있는 건지, 통신 자체가 먹통이었다.
유태진은 더 이상 연락을 시도하지 않았다.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엘라나가 무리해가면서까지 그 검을 구현했다면,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는 말이 된다.
“가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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