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권-08화
“다들 근육 하나는 대단하네요.”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근육에 김진수가 혀를 내두르자, 마틴이 조용히 덧붙였다.
“근데 저게 다 물근육이야.”
“예?”
마틴의 그 말에 김진수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되돌아보았다.
“아니, 물근육이란 말도 정확하진 않군. 근육의 힘 자체는 확실히 대단한 편이니까. 헌데 거기에 죄다 물리력에 치중되어 있다는 게 문제야.”
“그게 무슨 뜻인데요?”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영력을 사용해 현상을 일으키지. 하지만 엘하운드는 자신의 영력을 죄다 수목 제어와 육체의 물리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사용하고 있다. 그게 문제인 거야.
인베이더에게는 단순 물리력이 통하지 않아. 영력이 깃든 공격이어야 먹히지. 헌데 단순히 육체만 강건하고 근력만 세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
“아!”
그의 설명을 듣고서야 김진수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래서 이 난리가 난 거다. 저 녀석들이 타고난 선천적인 이능이 그래. 육체는 강건해지지만, 인베이더에게는 그게 전혀 안 먹히지. 보유한 대부분의 영력이 육체의 물리적인 성질을 강화시키는 데에 사용되고 있거든. 어떻게 보면 강체력과 성질이 유사하긴 하지만, 이건 그보다 더해. 거의 순수한 물리력을 강화하는 형태로만 작용하고 있어서 인베이더들에게 영적 데미지를 입히기가 어려워졌지.”
엘하운드는 분명 엘프의 혈통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진화의 방향은 전혀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 엘하운드의 선조들은 황폐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적응하고 개척하기 위해 육체의 강건함을 바랐고, 그것이 오랜 세월을 거쳐 지금과 같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나마 수목과 소통하고 다루는 능력은 남았지만, 대상에게 영력 데미지를 가하는 능력은 극도로 약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이걸 아주 나쁘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 대신 엘하운드들은 오거 정도는 아니라도 트롤 수준에 버금가는 근력과 민첩성을 보유하게 된데다 회복력도 아주 뛰어났으니까.
인베이더와 같이 물리적 데미지가 거의 먹히지 않는 특수한 개체가 아니라면 오히려 스펙 면에서는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 종족적 특성을 갖게 된 것이다.
‘뭐, 그래 봐야 랭크는 대부분 D랭크 이하의 수준이지만.’
엘하운드들의 신체적 강건함은 뛰어났지만, 그들은 엘프들의 머나먼 혈통답게 전투와는 성향이 먼 종족이었다. 그래서 전투적인 기술보다는 식물과 소통해 문명을 발전시켜온 만큼, 실질적인 전투력은 생각보다 뒤떨어졌다.
저기 보이는 엘하운드의 지도자인 메이트룬만 봐도 그러했다. 다른 엘하운드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하긴 했지만, 그 수준은 기껏 해봐야 B랭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정도면 고작 2년 사이에 강해진 마틴과 비교해도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그때 김진수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신기하네요.”
“뭐가?”
“이렇게 나무만으로도 문명을 고도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요. 놀랍잖아요.”
지구의 과학문명과는 그 궤를 달리하긴 했지만, 엘하운드도 고도로 발전된 문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단지 그것이 수목을 이용해 발전되어 왔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고층 건물도 전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통신망이나 에너지 라인도 전부 나무를 특수한 형태로 성장시켜 그것을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좀 전에 전장에서 봤던 전함과 동일한 역할을 하는 [아스피나 트리]도 바로 나무들로 만들어진 고등 개체들 중 하나였다.
물론 여기에 사용된 나무들이 평범한 건 아니다. 엘하운드가 오랜 세월 진화시켜온 나무들인 만큼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이 단단하고 불에도 내성을 갖고 있으며, 어떻게 성장시키느냐에 따라 그 무엇으로도 변화가 가능했다.
그리고 이것들이 바로 엘하운드가 발전시킨 문명의 밑바탕이었던 것이다.
“저들이 키워내는 나무는 말 그대로 뭐든 될 수 있는 나무지. 그래서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고.”
“우주가 넓긴 넓네요.”
마틴의 말에 김진수는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알던 게 전부가 아니었고, 문명이 철기와 전기에 기반을 둔 과학이 전부가 아니라 이토록 다양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마틴이 물음을 던져왔다.
“그건 그렇고 인베이더와의 첫 실전의 느낌은 어때?”
“생각했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았어요. 우주를 주름잡는 괴물들이라고 해서 많이 긴장했었는데 말이죠.”
솔직히 말해 상대하는 게 너무도 쉬웠다. 그동안 혹독한 훈련 때문에 많이 강해졌다곤 하지만, 이렇게까지 쉽게 이길 수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김진수의 그런 감상에 마틴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대부분이 양산급이라서 그렇겠지. 이곳의 침식도는 생각보다 높지 않아. 그래서 뽑아낼 수 있는 인베이더의 질도 변변찮은 편이지.”
“그렇군요.”
“다만 물량만큼은 방심할 수 없다. 제아무리 약해빠진 것들이라도 숫자로 밀고 들어오면 상대하는 게 쉽지 않아. 그러니 너희들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예.”
인베이더의 특성에 대해 배워서 잘 알고 있는 김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 *
한편 엘하운드의 수뇌부들은 이번 연합의 참전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전 도저히 저들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서서 외친 그 말에 수뇌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는 리플 행성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무르터룬이었다.
메이트룬의 눈동자가 그를 조용히 응시했다.
“뭘 말이지?”
“고작 두 척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애원하듯 지원요청을 했는데도 고작 두 척이라니요! 전함 두 척만으로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한단 겁니까. 이건 우리를 무시한 처사입니다.”
무르터룬의 주장에 일부 수뇌부들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까 전장에서 고작 두 척의 전함만 지원병력이라고 도착했을 때 얼마나 황당했던가.
그동안 연합과 해온 거래를 생각하면 적어도 작은 함대 하나 정도는 지원을 와줬어야 했다.
이에 대해 메이트룬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까 보여준 전투력을 생각하면 두 척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지. 충분히 큰 전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상당한 전력이라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베이더의 물량은 끝이 없지요. 두 척으로 활약할 수 있는 데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그 정도 전력은 순식간에 녹아버릴 겁니다.”
“그것도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너희도 봤을 텐데. 사령관이란 자의 무위를.”
메이트룬이 유태진을 언급하자 무르터룬이 당혹스런 기색을 드러냈다.
“그···그건···.”
“단 일검으로 수만에 이르는 인베이더들을 한순간에 몰살시켰다. 물론 그것들의 수준이 낮은 편이긴 했지만, 이만한 무력을 우리 중에서 누가 발휘할 수 있지?”
“······.”
“아무도 없지. 심지어 나조차도 불가능하니까.”
메이트룬은 엘하운드의 지도자이자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실력자였다. 헌데 그런 그조차도 유태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적어도 A랭크 이상이겠지. 어쩌면 S랭크 이상일수도 있고.”
아까 보여준 압도적인 실력조차도 전력을 다한 것 같지가 않았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데다, 그의 태도는 시종 여유로웠으니까.
그렇기에 유태진의 실력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 이상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2척 뿐이라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 정도 강자가 지원을 해준다면 나쁠 게 없지.”
메이트룬이 이렇게 잘라 말하자, 다른 수뇌부들도 더 이상 그에 대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만큼 지도자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그에게 의견을 제시할 순 있어도 결정을 강요할 순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저들과 협력 체계로 인베이더들을 소탕한다. 우리가 살기 위해선 그 길밖에 없어. 그러니 분란을 일으킬만한 행동은 최대한 삼가도록. 만일 이를 어기는 이가 있다면 직위가 어찌 됐던 반드시 엄벌로 대응할 거다.”
강경하기 그지없는 그 말에, 다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침묵하고 말았다.
하지만 무르타룬만큼은 달랐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의 두 눈은 여전히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이틀간의 정비 끝에 엘하운드의 지도자 메이트룬과 유태진은 즉각 반격작전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인베이더의 물량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었다. 하이브의 침식수준이 높아질수록 양산해낼 수 있는 수도 그만큼 늘어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제 슬슬 침식도도 중반에 가까워진다. 조금만 더 늦게 된다면, 양산형 뿐만 아니라 침공급의 고위 개체도 등장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되기 전까지 어떻게든 하이브를 다운시켜야 했다. 그 이상 침식도가 높아지면 리플 성계에 더는 미래가 없었다.
“하지만 물량 때문에 하이브를 떨어뜨리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겁니다. 하이브로 향하는 길 모두를 놈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태라서 말입니다.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면서 하이브까지 밀고 들어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그 전에 하이브의 침식도가 중반 단계로 넘어갈 경우도 벌어질 수도 있고요.”
메이트룬의 그 말에 유태진은 한 가지 작전을 제시했다.
“그러면 지금 쓸 수 있는 방법은 강습작전밖에 없습니다. 놈들의 시선을 한 군데로 모은 뒤, 저 높은 상공에서 곧바로 하이브를 기습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놈들에게 통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든 통하도록 해야지요. 하이브로 가는 경로에 있는 인베이더들의 시선을 한 군데로 집중시키는 겁니다. 그 사이 우리 쪽 특무함으로 강습을 시행하는 거지요.”
“으음.”
여러 가지로 무리한 작전이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유태진이 제안한 작전 밖에 답이 없었다.
다만 문제는 하이브로 가는 모든 길목을 장악한 인베이더들을 어떻게 유인하느냐였다.
이에 대해 유태진이 먼저 나섰다.
“그 역할은 제가 맡도록 하지요.”
“당신이 말입니까?”
“저열한 것들이라 해도 그 수는 무시할 수 없지요.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선 저 밖에 없습니다.”
메이트룬은 깜짝 놀랐지만, 유태진의 말에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브를 둘러싸고 있는 인베이더의 수는 가히 천문학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측된 수가 수천만 단위였고, 그로부터 며칠의 시간이 지났으니 지금쯤은 억 단위까지 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이브를 향해 쳐들어가려고 해도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것이고.
“···괜찮겠습니까?”
메이트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윗줄의 강자라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렇게까지 압도적인 물량을 감당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유태진은 자신만만해했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그런 조무래기들 따윈 아무리 많다 해도 제 상대가 아니니까요. 솔직히 마음만 먹는다면 저 혼자서도 하이브는 언제든 다운시킬 수 있습니다. 헌데도 제가 이렇게 작전을 진행하는 건 바로 저 녀석들에게 실전을 경험할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군요.”
혼자서도 하이브를 다운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그 말에, 메이트룬은 내심 당혹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전에 들어봤던 어떤 소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연합에는 혼자서 함대를 상대할 수 있는 절대강자들이 여럿 존재한다고 하던 그런 소문이었다. 하지만 리플 성계는 워낙 구석진 곳이다 보니 그런 소문들이 정말 사실인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헌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상대가 바로 그런 소문의 강자들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 천문학적인 물량을 혼자 감당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어찌 됐든 우리에게 나쁠 것 없는 제안이군. 성공한다면 우리 행성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실패한다 해도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어.’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손해 볼 일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메이트룬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곧바로 강습작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