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301화 (302/448)

13권-01화

멀린과의 만남으로 멸망의 미래를 보게 된 아서 팬드리건은 왕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각오에 따라 더욱 자신을 갈고 닦기로 마음먹었다. 왕이 되려면 자신부터 그만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머지않은 미래에 멸망을 앞둔 지금이라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춰야 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음에도 그가 얻을 수 있는 성과는 너무나도 미약했으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멀린이 딱하다는 혀를 차며 말했다.

“아서. 솔직히 말하자면 너의 재능은 거의 밑바닥 수준이란다. 너와 같은 수준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분노했을 테지만, 아서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압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재능 없는 인간이라는 걸. 누구보다 저 자신이 더 잘 알죠.”

“그래도 계속할 생각이야? 얻는 성과는 거의 없다시피 한데도?”

“그래도 할 겁니다. 어차피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듯 내뱉고는 다시 수련에 몰입하는 그 모습에, 멀린은 잠시 지켜보다가 한 가지 제안을 던졌다.

“아서, 나의 왕. 당신이 그런 각오로 노력하겠다면 고려할만한 수단이 한 가지 있어.”

“수단?”

“그래, 당신이 견딜 수만 있다면 재능이 없어도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는, 그런 수단이.”

그 말에 일순 솔깃해졌다. 끝없이 노력은 하고 있지만 그 결과가 낙관적이지 못하다는 건 아서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헌데 멀린이 부족한 재능으로도 강해질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있다고 하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같은 범인도 강해질 수 있다면 보통 수단은 아니겠군요.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외도의 길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혹시라도 그것이 사특한 수단일 것을 우려해 이렇게 말했지만, 멀린은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사특한 방법이 아니라는 건 내가 장담할게. 그리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야. 단지 아서, 당신 혼자만 고통스럽고 괴로워질 뿐이지.”

“그렇다면 들어 보겠습니다.”

외도의 길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미 아서의 결심이 굳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챈 멀린은 설명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서,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인간이 아니야. 인간과 몽마의 혼혈이지. 그렇기에 현실과 다름없는 환상을 다룰 수 있어.”

“예, 그렇다고 했었죠.”

“이 환상으로 당신에게 가상의 세계를 구축해 주겠어. 이 안에서는 늙지도 않고, 먹지도 않아도 돼. 어떤 부상을 당해도 죽을 염려도 없지. 금세 다시 되살아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현실의 하루를 1년처럼 보낼 수 있어. 그곳에서 10년을 수련한다면 현실에서는 고작 10일이 흐르는 거지. 나의 왕께서는 어떻게 생각해?”

“좋군요. 환상이라고 하지만 현실과 다름없다면 그야말로 최적의 수련환경이로군요.”

아서는 멀린이 제안한 방법이란 게 무엇인지 바로 알아챘다.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환상세계라면 제아무리 가혹한 수련이라 해도 무한히 반복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심지어 현실의 하루가 환상 속에서는 무려 1년이나 된다고 하니, 자신처럼 재능 없는 사람이라면 시간과 노력으로 그 간극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묻겠어. 그래도 하겠어?”

“예, 길이 있다면 굳이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죠.”

망설임 없는 아서의 대답에 멀린은 다시 신중하게 물었다.

“다시 한 번 묻겠어. 당신의 재능으로 납득할만한 성과를 보려면 수십 년으로도 모자랄 거야. 어쩌면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 이건 인간의 정신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업이 아니야. 생각 이상으로 가혹한 지옥이 될지도 몰라.”

“알고 있습니다. 쉽지 않다는 거. 지금까지도 그랬었죠. 딱히 달라질 것도 없어요.”

“아니, 그 이상이야. 잘 들어, 아서. 인간의 정신은 생각 이상으로 나약해. 고작 백수십 년의 세월만으로도 몸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노쇠해져 버리지.

그런데 그 이상, 아니 수백 수천 년의 까마득한 세월을 반복적인 수련에만 몰두한다고 생각해 봐. 과연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왜 이런 고통스런 수련을 하게 됐는지 그 목적마저 잃어버릴지도 몰라. 아니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을지도 모르지. 그런데도 하겠어?”

멀린은 그것이 얼마나 고난의 길인지를 상세히 말해주었다. 멀린이 평소 보여준 모습들을 생각하면 그가 아서의 안위를 얼마나 염려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그 길은 어느 누구도 함께 할 수 없어. 당신 혼자서 견뎌 나가야 해. 그 긴 세월을 혼자서 걸어 나갈 수 있겠어?”

계속된 멀린의 말에, 아서도 자신이 선택한 이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괴로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함께 할 수 없으며, 오로지 혼자서 수백 수천 년을 수련만하면서 견뎌야 하는 가시밭길이었다. 그 길을 자신이 걸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결단을 내린 뒤였다.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예, 처음부터 각오한 바였습니다.”

“그래도 잘 생각해 봐야 할 거야. 이건 그냥 수련이 아니야. 긴 세월 속에서 자기 자신을 깎고 마모시켜 나가면서 쌓아 올려야 하는 고행이지. 원하는 결과를 얻기도 전에 아서 너의 자아가 먼저 붕괴될지도 몰라.”

“물론 쉽지 않으리란 건 압니다, 멀린. 당신 말대로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길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미 왕이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멸망의 미래를 바꾸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지켜내려면 적어도 그 정도는 해 내야겠지요. 아니, 꼭 해낼 겁니다.”

거듭된 충고에도 변하지 않는 그 모습에, 멀린은 아서의 결심이 결코 치기어린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알겠어. 아서, 나의 왕. 당신의 선택을 존중해 주겠어.”

그때부터 아서는 멀린의 도움 하에, 외로운 고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멀린이 그에게 구축해준 것은 현실에 가까운 환상. 수련에 관련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한 이곳을 두고 아서는 가상현실이라 이름 붙였다.

가상현실은 실로 놀라웠다. 늙거나 죽지도 않았고, 인간이라면 당연히 겪어야 할 3대 욕구도 무시하는 게 가능했다.

아서는 열정적으로 수련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으며, 열흘, 보름··· 어느덧 일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가 눈을 떠서 보게 된 것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현실 세계의 모습이었다.

“느낌은 어때, 나의 왕.”

“나쁘진 않군요. 시간은 얼마나 지난 겁니까?”

눈을 뜨자마자 보인 멀린의 모습에 그가 그렇게 물었다.

“만 하루.”

“정말로 그곳의 일 년이 현실의 하루였군요.”

직접 경험했지만 그래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게나 생생하던 지난 1년이 정말로 가상으로 구축된 환상이었다니.

“성과는 어땠어?”

결과를 묻는 멀린의 모습에, 아서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역시··· 들이는 수고에 비해 얻는 게 없더군요. 덕분에 제 재능이 얼마나 하찮은 수준인지만 절감했죠.”

그는 1년이란 시간 동안 끝없이 검을 휘두르고 무예를 갈고 닦았다. 하지만 성장은 미미하기만 했다. 어느 정도 재능을 타고난 자라면 한두 달 만에 얻을 성취를 무려 1년의 시간을 꼬박 투자해 겨우 얻은 것이다.

‘아니, 먹고 자는 시간조차 없는 상태로 보낸 1년이니, 현실기준으로 본다면 적어도 2-3년에 준하는 수련 양이었겠지.’

그런데도 남들의 한두 달 수준에도 못 미친다니··· 아서의 재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아서에게 멀린이 다시 한 번 확인 차 물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지?”

“예, 이렇게 포기할 거였다면 아예 시작도 안했을 겁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하루 종일 못했던 식사와 휴식을 취한 뒤 또다시 가상현실에 진입하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어느 순간부터 아서는 더 이상 날짜를 세지 않게 되었다. 현실의 시간이 이러했으니, 가상현실 속에서 체감한 그의 시간은 이미 수십 년에 이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진전이 보이질 않았다. 무려 수십 년의 시간을 수련에만 전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서의 실력은 이제 겨우 견습 기사 수준에 다다라 있을 뿐이었다.

이쯤 되니 어지간해선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정신력을 가진 아서라 할지라도, 점점 마음이 깎여 나갈 수밖에 없었다.

지쳐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멀린이 조용히 권유해왔다.

“아서, 나의 왕.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이쯤에서 검을 포기하는 게 어떻겠어?”

“무슨 소립니까, 멀린? 저더러 검을 포기하라니요.”

아서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포기하라고 하니 이해가 되질 않아서였다.

그가 만일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크게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재능은 보잘 것 없어도 성품만큼의 왕의 그릇으로 인정받은 아서는 달랐다. 그는 화를 내기보다는 멀린이 이렇게까지 말했다면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신의 재능은 보잘 것 없지만 그 중에서도 검과 무예에 대해서는 가히 최악이랄 수 있어. 그러니 검술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이 어떨까?”

검에 재능이 없다고 직설적으로 언급한 멀린에게, 아서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제가 그렇게까지 검에 재능이 없는 겁니까?”

“아서 당신이 가진 재능들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지. 아마 마법이든 뭐든 다른 것을 익히는 게 지금보다는 2배 이상 빠를 걸?”

“······.”

일순 기가 막혔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가르침 받아온 자신의 실력이 대단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말을 들을 정도로 형편없는 재능이었나?

조금 충격적이긴 했지만, 아서는 멀린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의 목표는 기사가 아니라 이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이었다. 검 외에 다른 재능이 더 낫다면, 굳이 검을 고집할 게 아니라 다른 것을 갈고 닦아도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 검 외엔 배워 본 게 없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합니까?”

“걱정 마, 아서. 나는 멀린. 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반인반마지. 그동안 수많은 것을 익혀왔고, 모르는 게 없다고 장담할 정도로 많은 지식을 배웠지. 내 왕에게 가르침을 주기엔 충분하고 넘친다고 해 둘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부터 멀린, 당신에게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그때부터 아서는 멀린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마법은 물론, 지리, 천문 등 지식들을 배웠으며, 심지어 미술이나 음악, 하다못해 대장장이 기술까지 배웠다.

말 그대로 해보지 않은 게 없을 지경이었다.

물론 진척은 무척이나 더뎠다. 제아무리 검술의 재능보다는 낫다 하더라도 그의 재능들이 전반적으로 범인 수준에 불과한 것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는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항상 지지부진했던 검술에 반해, 이것들은 적어도 노력하면 어느 정도 성취를 얻을 수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웠던 것이다.

어느 정도 그의 기초가 완성됐다고 여긴 멀린이 아서에게 말했다.

“아서,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이제부터는 당신이 노력하기에 달렸어. 이미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갖추고 있잖아.”

“그래봐야 암기만 했을 뿐이죠. 제대로 이해하는 건 1푼도 못 됩니다.”

지금까지 아서는 멀린이 가르쳐준 그 많은 지식들을 주입식 형태로 배웠을 뿐. 그것에 대한 이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사실 그가 제대로 배운 부분을 말한다면, 대부분 기초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멀린은 어쩔 수 없다며 말했다.

“그건 스스로 해 나가야 해. 지식은 얼마든지 가르쳐줄 수 있어도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깨달음까지 내가 해줄 순 없는 문제야. 그래도 지금까지처럼만 한다면 충분히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결국 부족한 만큼 저 스스로 노력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군요.”

아서는 무겁게 중얼거리면서 멀린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랬다. 배운 것을 소화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이었다. 신하이자 스승인 그는 최선을 다해 가르쳤지만, 자신의 재능이 미천한 나머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그에게 배운 지식들은 머리로 완전히 암기하고 있으니, 앞으로 스스로 갈고 닦아 나가기엔 충분했다.

그때부터 아서의 외로운 수련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수련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