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91화 (292/448)

12권-16화

* * *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면서 김진수는 여지없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다른 강도들을 상대로 보인 무력을 생각한다면 일방적인 열세였다.

“으!”

“처음 그 기세는 다 어디 갔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영능이 한둘이었다면 그럭저럭 상대할 만 했겠지만, 이게 셋 이상이다 보니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훨씬 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쏟아지는 바람의 탄환을 뚫고 들어가 접근전을 펼치려 하면 탄성 배리어가 전개되어 앞을 가로막았고, 이것을 뚫으려 하면 불길이 덮쳐오면서 그를 위협해온다.

상대를 쓰러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이능이야? 이런 건 들어 본 적도 없어!’

물론 개개인이 영능을 단 한 가지만 타고나란 법은 없었다. 아주 드물긴 해도 사람의 재능에 따라서 다수의 영능을 각성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달라 보였다. 단순히 여러 종류의 이능을 다루는 게 아니라, 타인의 이능을 그대로 똑같이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게다가 놈은 아직 네 번째 이능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쓰러뜨린 강도들의 이능을 정말로 다 사용할 수 있다면, 또 다른 네 번째 이능도 분명 다룰 수 있을 게 틀림없었다.

“하하하! 좀 더 분발해보지 그래? 내 동료들은 잘도 쓰러뜨리더니 내 앞에서는 움츠러든 고양이 꼴인데?”

마지막 강도가 광소를 터뜨리며 더욱 집요하게 몰아쳐왔다. 그럴 때마다 김진수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갔고, 이제는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몰려버렸다.

“허억! 허억!”

호흡은 가빠지고, 얼마 되지도 않던 영력마저 이젠 바닥을 쳤다. 이리저리 피하고 거리를 좁히느라 체력마저 소진한 탓에 이젠 움직이는 것마저 힘들어졌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어.’

단순히 부상과 체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당초 김진수가 터득한 아르케베인 유파는 일렉트로닉 유저들의 능력을 기반으로 백병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유파였다. 그래서 보유한 기술들도 하나같이 육체에 어느 정도 과부하를 줄 수밖에 없었고, 어지간히 단련된 몸이 아니라면 사용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몸만 단련이 되었어도 이렇게까지 밀릴 이유가 없는데···!’

제아무리 영능을 각성했다 해도 김진수의 육신은 사실 일반인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영력으로 일순간 강화할 수는 있지만, 단련되지 않은 신체를 강화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상대는 육체의 단련 수준과 상관없는 능력들을 다루고 있었다. 그러니 부담감 없이 능력을 계속 쏟아낼 수 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그런 사실을 눈앞의 강도도 모를 리가 없었다.

“역시, 몸에 부담이 많이 가는 모양이지? 하긴 이제 막 각성한 게 전부니 그럴 만도 해. 탄력 방어막을 맨손으로 찢어낼 정도면 그럴 거라 생각은 했는데, 역시 예상대로였어.”

“······.”

김진수는 강도의 우쭐한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타인의 능력을 구사한다 해도,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이 이렇게까지 능숙한 걸 보면 실전경험도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싸우는 와중에 자신의 단점을 파악해냈다 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럼 밑천도 다 본 것 같으니 슬슬 끝내보자고. 이러다가 초인관리국인지 뭔지가 덮쳐들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말이야.”

그렇게 내뱉은 강도의 주변으로 묵직한 무게감이 퍼져나가 주변을 지배했다.

그것은 앞서 다른 강도가 선보였던 능력인 중력장이었다.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던 능력을 이제야 꺼내든 것이다.

“윽!”

안 그래도 이리저리 피하면서 겨우 버티던 김진수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몸놀림이 중력에 의해 둔해지고 나면, 상대의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까처럼 중력장을 상쇄시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강도 녀석도 그 사실을 잘 아는 만큼, 중력장을 상쇄시킬 틈을 주지 않고 바람의 탄환을 연신 쏟아내고 있었다.

피피피핑!

퍼퍼퍼펑!

이리저리 바람의 탄환을 쳐내면서 어떻게든 접근하려 했지만 몸이 몇 배로 무거워지면서 이젠 시도조차 어렵게 되었다.

퍽! 퍼퍼퍽!

“크!”

이제는 그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미처 막아내지 못한 탄환들이 김진수의 전신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영력으로 몸을 보호했지만, 말 그대로 즉사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온 몸이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바람의 탄환을 막다 힘에 부친 나머지 왼팔까지 부러져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의 상황에 닥쳤으면서도 김진수는 두려움의 감정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필사적인 거지? 이건 게임이 아니야! 현실이라고!’

죽어도 얼마 후면 다시 되살아날 수 있는 게임의 아바타와 달리, 현실에서 죽음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분했다. 눈앞에서 깔짝거리면서 자신을 농락하는 저 강도 녀석을 어떻게든 때려눕히고 싶을 뿐이었다.

그때 눈앞으로 맹렬한 무언가가 허공에 응집되기 시작했다. 생성되는 과정은 바람의 탄환과 비슷해 보였지만, 그 위력만큼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대기가 이지러지면서 내는 소리가 제법 맹렬하게 들려왔다.

위이잉!

“이걸로 끝내주지. 잘 가라.”

그와 동시에 강화된 바람의 탄환이 파공성을 뿌리며 날아들었다. 그것은 정확히 김진수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을 소진한 나머지 기진맥진하고 만 김진수로서는 피하기조차 어려웠다. 지금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기적이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 앞에, 김진수의 머릿속은 말 그대로 깨끗이 지워진 것 마냥 명료해졌다.

현재 그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갈망이라면··· 이렇게 죽게 될 거 놈에게 어떻게든 한방이라도 먹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그리고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을 거머쥐었다. 절뢰섬인을 사용한 탓에 오른손도 성치는 못했지만, 주먹을 쥐는 정도는 가능했다.

그 순간! 눈앞의 정경이 느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온 세상의 시간이 정체되는 듯한 광경이었다.

곧 펼쳐질 끔찍할 광경을 생각하면서 비명을 내지르는 은행의 직원들과 고객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날아들고 있는 강력한 바람의 탄환까지··· 이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완전히 텅 빈 줄 알았던 영맥에서 한 줄기 영력이 샘솟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신을 타고 한 바퀴 순환하더니, 거동할 수조차 없을 상태였던 그의 몸에 자그마한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이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 의문은 거기서 접어두었다. 자신의 몸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보다는, 지금 생긴 이 한 줌의 힘으로 강도질도 모자라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하는 저 빌어먹을 녀석의 얼굴에 한방 먹여주는 게 더 우선이었다.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벅찼던 몸인데, 지금은 당연하다는 듯 뜻대로 자연스럽게 움직여 주었다.

그리고 다시 체내를 순환함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집결되는 영력!

아르케베인 류.

진회일혼격(震廻一魂擊).

거의 멈춘 듯한 세상에서 내질러진 그의 주먹이 허공을 꿰뚫었다. 그것은 강도가 작정하고 내쏜 회심의 탄환까지 꿰뚫고 나아가더니 급기야 유연한 탄성으로 충격을 흡수한다는 방어막까지 그대로 관통해 버렸다.

“허헉!?”

강도가 일순 숨 넘어는 소래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다 죽어가던 녀석이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쇄도해 오더니 주먹으로 바람의 탄환을 부수고 다가와 방어막까지 뚫어버릴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그 주먹은 자신의 얼굴을 불과 십여 센티 앞두고 그대로 멈춰 섰다. 바람의 탄환을 부수고, 탄성 방어막까지 뚫느라 여력을 다한 것이다.

“정말 아까워. 이대로 한 방 제대로 먹여 줄 수 있었는데···.”

아쉬움을 금치 못하면서 주먹을 아래로 늘어뜨리는 김진수. 이번 공격을 마지막으로 남은 여력을 전부 다 소모하고 만 것이다.

“이놈이!?”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간담이 서늘해지고 만 강도가 핏발을 세우며 두 눈을 부릅떴다. 하마터면 다 죽어가는 녀석에게 당할 뻔했다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분노한 강도가 손을 들어올렸다. 예상치 못한 반격으로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한 녀석이지만 이제는 서 있을 힘도 없어 보였다. 이대로 쳐 죽이는 건 너무나도 간단했다.

“마음 같아선 두고두고 고통을 주다 죽이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는 게 아쉽군.”

그는 애석하다는 투로 중얼거리면서 손끝에 불길을 일으켰다. 고문을 해서 괴롭힐 수 없다면, 적어도 그냥 단숨에 죽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길게 괴로워 할 수 있는 죽음을 주고 싶어서였다.

“어디 타 죽어가면서 두고두고 후회해봐라. 왜 우리 앞에 나서서 죽음을 자처했는지 말이야.”

그리고 손끝에서 일어날 불길이 김진수를 덮치려 한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뭔가가 그의 오른손을 꿰뚫고 지나갔다.

퍼억!

“컥! 끄으으!”

졸지에 손목에 동전만한 구멍이 생긴 강도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신음을 터뜨렸다. 이게 대체 어디서 날아든 공격이란 말인가?

그도 황혼과 새벽에서 허송세월을 보낸 건 아니라서, 즉시 손목을 지혈했다. 영력을 이용해 응급처치를 하는 방법은 유저들이라면 대부분 아는 상식이었다.

그리곤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국인으로는 도무지 볼 수 없는 백인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그가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며 성난 목소리를 내뱉었다.

“하? 고작 은행이나 터는 강도 새끼가 사람을 죽이려 했다 이거지?”

“뭐냐, 네놈은? 감히 날 공격해?”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자였지만, 생각지도 못한 부상으로 손목이 반쯤 날아가 버린 강도는 이미 냉정을 잃어버렸다.

“죽어!”

순식간에 전면을 가득 메우는 바람의 탄환들. 대기가 뭉쳐 만들어지는 것들이라 딱히 형체가 드러나진 않았지만, 영능을 다루는 자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슈슈슈슝!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바람의 탄환들이 백인 사내를 향해 일제히 날아들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위협을 느끼기는커녕 그저 갖잖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어디서 이딴 재롱을 부려?”

백인 사내가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손바람을 일으키는 듯한 동작이었다.

그런데 별 것 아닌 그 동작에, 강도가 내쏜 바람의 탄환들이 말끔히 소멸되었다.

“뭐야!?”

눈앞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결과에 강도가 당황해 외쳤다. 황혼과 새벽에서도 여러 차례 실전을 겪어봤지만, 이런 식으로 공격 자체가 소멸되어버린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백인사내가 이죽대듯 말했다.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군. 이제 막 각성한 병아리 주제에, 수년 동안 수련해온 우리와 동등할 거라 생각했나?”

“그 말은··· 당신 설마 그 외계인의?”

그제야 강도는 상대의 정체를 알아채게 되었다. 오늘 막 각성을 시작한 게 아니라, 이미 수년 전부터 현실에서 이능을 수련해 왔다면 지구인일 리가 없었다.

“난 엄연히 지구 출신이지만, 외계에 다녀온 건 사실이지. 그럼 이 악물고 몸에 힘 줘라. 잘못하면 뒤진다.”

백인 사내는 그렇게 내뱉고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들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강도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마치 공간을 압축해 이동한 것처럼 보였다.

강도의 전신에는 김진수의 공격을 몇 번이나 막았던 탄성 방어막이 다시 생성되었지만, 백인 사내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뚫어버렸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면··· 바로 엄지와 중지를 서로 맞닿도록 둥글게 말아서 튕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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