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87화 (288/448)

12권-12화

강의는 생각보다 평이하게 진행되었다. 인피니티 킹덤 소속의 오버러들 중 실제 교관이나 강사 경험이 있는 자들은 드물었지만, 요 며칠 동안 유태진으로부터 지구인 수준에 맞춰 강의할 수 있도록 따로 특훈을 받은 덕분이었다.

그들은 유저들이 어려워할 부분을 요점적으로 짚어서 설명해 주었고, 그래도 이해 못하는 부분들은 질문을 따로 받아서 해설해 주었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참 쉽죠?]

하지만 제아무리 풀어서 설명해준다 하더라도, 처음 접한 영능의 이치가 강사의 말처럼 쉬울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전처럼 맨땅에 헤딩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무 것도 모르고 막막했던 때와 달리, 지금은 나아갈 길 정도는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KM사가 개최한 이번 강의 서비스는 그야말로 가뭄 속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강의 서비스가 시작된 지 불과 보름 만에 드디어 51레벨을 돌파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장 먼저 50레벨에 도달했던 최상위권들이었다.

그동안 벽에 막혀 정체된 나머지 후발주자와 같은 선상에 서게 되었지만, 강의를 통해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자마자 곧바로 앞서나가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전처럼 빠른 성취는 없었다. 영능의 대다수는 지식과 탐구를 통한 깨달음을 통해 진보가 이루어진다.

설령 그게 무투나 전투에 관련된 영능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 옛날 무협소설에도 자주 등장하지 않던가? 마치 철학을 논하는 듯한 문구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도약하는 장면이!

영능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초를 논할 때는 단순히 원리를 숙지하고 몸으로 체득하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성장할 테지만, 경지가 높아질수록 깨달음과 영능의 이치에 대한 고찰은 반드시 필요했다.

강의를 통해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한 유저들은 황혼과 새벽 속에서 실전과 이론을 반복해가며 점진적인 형태로 성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성장속도는 저 레벨 때와 비교하면 상당히 느려지긴 했지만, 연합 출신의 오버러들이 보기에는 가히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뭐지? 지구인들의 성장이 너무 지나치게 빠른 것 같은데?”

“음, 너무 비정상적이긴 하지.”

“보면 재능이 대단한 것도 아니야. 특히 이론이나 그런 방면에 대한 이해는 많이 뒤떨어져 있고. 그런데 영력을 제어하거나 감지하는 건 또 특출하단 말이야. 어떻게 보면 저렙 주제에 우리보다 더 세밀한 것 같기도 하고.”

인피니티 킹덤의 오버러들에게 지구인들은 놀랍고도 신기한 존재였다. 처음 접한 학문이라 그런지 영능에 관련된 이론에는 무척이나 취약하면서도, 실전에만 들어가면 놀라우리만치 성과를 내보였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일까?

하지만 지구인들과 여러 차례 접속하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오버러들 중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이곳이 오랫동안 영능이 전무했던 곳이라서 그런 것 아닐까?”

“그건 또 무슨 의미지?”

“예전에도 그런 비슷한 게 있었잖아. 특정 감각을 제한해서 어떤 감각을 민감하게 만드는 종류의 수련들 말이야. 저들의 몸에는 분명 영맥이 존재하고 있었어. 단지 영능을 감지하고 제어하는 기능 자체를 아주 오랫동안 금제 당했을 뿐이지.”

“그 말은 즉 영력을 감지하고 영력을 제어하는 행사 자체를 금제 당했던 것 자체가 영력에 대한 감각과 제어를 극대화시키는 수련과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는 거야?”

“그래 맞아. 그동안 억눌러온 게 튀어나오면 더 강하게 반발하는 것처럼, 저들도 그래. 아마도 금제 그 자체가 수련과 비슷한 효과를 낸 걸 테지.”

나름대로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금제 자체가 오히려 영적 제어와 감각을 키우는 역할을 함으로서 지구인들에게 타고난 재능 이상의 영적 통제력을 갖게 되었다면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다.

“하지만 저 가파른 성장도 시간이 갈수록 점차 둔화되겠지. 영능이란 건 단순히 영적 감각이나 제어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니 말이야.”

“그렇겠지.”

영적 감각과 제어력이 높을수록 성장하는 데에 보다 유리한 건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였다면 재능 있는 자들은 전부 초월자가 되었을 것이다.

영능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 그리고 여러 가지 요소와 더불어 운까지 더해져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게 바로 상승의 영역인 만큼, 지구인들이 당장 빠른 성장을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질시할 필요는 없었다.

유저들이 성장하는 동안에도, 유태진은 각국의 정상들과 함께 앞으로의 정책과 대응방법들을 논했다.

지구권 국가들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지구연방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하였고, 각국의 정상들도 더 이상 정상이 아니라 각 지역을 대표하는 지역 자치장이 된 상황이었다.

전 미국 대통령이자 초대 연방 수상이 된 메켈린 스콧라이어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회의를 주관하였다.

“이제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인베이더의 침공 가시권이 지구에 미치기까지 불과 1년 5개월. 우리는 그 안에 대비를 끝마쳐야 합니다.”

그 말을 서두로 회의를 시작한 메켈린 수상은 예전 대통령들이었던 지역 자치장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정책을 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처리해야 할 의제들은 너무나도 많았다.

전 세계를 급히 하나로 통합한 만큼 잡음도 많이 빚어졌고, 그밖에 진통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제들을 하나하나 처리해나간 그들은 마지막으로 유태진에게 시선을 옮겼다.

“유태진 사령관님께 묻겠습니다. 현재 그 일에 대한 진척은 어디까지 되었습니까?”

메켈린 수상이 던진 물음에, 지금까지 지켜보고만 있던 유태진도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일단 말씀드리자면··· 목표한 바의 절반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생산 설비의 복제 등은 대충 마무리가 됐지만, 그걸 운용할 사람들이 기술에 대해 전부 소화하지 못한 상황이니 말이지요.”

“이제 겨우 절반이라면···.”

“너무 촉박하군.”

사람들은 무겁게 중얼거렸다. 지난 5달 동안 이룬 게 고작 절반이라면, 앞으로 5개월은 더 흘러야 목표 달성이 가능하다는 말 아닌가?

물론 인베이더의 침략 가시권까지 1년 5개월이 남은 상황이니만큼, 유태진의 말대로 된다면 5개월 후에는 목표했던 바를 달성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전수받은 기술을 모두 이해한다 하더라도, 지구를 수호할 전함을 양산해서 그럴듯한 함대를 갖추기까지 고작 1년이란 시간 가지고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과 기술자들도 여러분들이 우려하는 문제를 모르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가상현실에 상시 접속한 상태로 그 안에서 학습을 지속하고 있지요.”

“아, 그렇군!”

“가상현실에서는 현실보다 몇 배로 시간을 늘려 활용할 수 있었지?”

가상현실은 접속한 인간의 사고를 가속해서 당사자가 체감할 수 있는 주관시간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 조금 무리를 한다면 현실보다 무려 10배까지 시간배율을 늘려 활용할 수도 있다. 현실의 10분이, 그곳에서는 100분이 되는 것이다.

“아마 앞으로 두 달 정도 지나면 학습이 끝날 겁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가게 되겠지요.”

물론 당장 전함을 생산하지 않고 있다 해서 마냥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현재 유태진은 남은 가용인력을 동원해 태양계 주변을 떠도는 작은 소행성들을 탐색해서 자원이 될 만한 것들을 죄다 끌어 모으고 있었다.

앞으로 전함을 대거 양산하려면 지구의 것만으로는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자원이 필요할 터. 이를 위해 우주상의 자원을 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예정했던 것보다 무려 3달 정도나 더 줄일 수 있다면 한시름 돌릴 수 있겠군요.”

안도하는 듯한 메켈린 대통령의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동감이라는 반응을 내보였다. 3달 이상의 시간을 벌었으니, 잘만 한다면 목표로 세워놓은 규모 이상의 함대를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태진이 하고자 하는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일에 대해선 일단 접어둔다 해도,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한 달 뒤의 예정일 이후가 더 큰 문제일 겁니다.”

“으음.”

“그랬지. 벌써 그렇게 되었군.”

유태진이 말한 예정일은 바로 지구인들에게 가해졌던 금제가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었다. 이제 그때가 되면 지구인들도 황혼과 새벽 내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영능을 각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미 유태진에게 사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대비책도 차근차근 준비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대비한다고 해서 쉽게 넘어갈만한 사안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래서 다들 근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우려되는 점은 각성한 사람들 중 일부가 영능을 범죄에 활용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테러에 이용될 수도 있겠지요.”

영능에 의한 범죄와 테러. 이건 애당초 지구인들이 영능을 각성하기로 예정된 순간부터 예고된 상황이었다. 연합 내에서도 이런 영능이 사용된 범죄 사례들이 적지 않은 만큼, 지구도 이때를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일단은 본 함대의 인력을 동원해 범죄자들을 구속하겠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가 도맡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구연방에서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응책을 수립해야 할 겁니다.”

유태진은 일단 지구에서 벌어질 초창기의 범죄에 대해서는 인피니티 킹덤이 직접 개입하기로 했다.

지구는 이제 겨우 영능에 대해 알아가는 상황이었다. 영능이 범죄에 사용되는 것을 사전에 감지하거나 포착할 수도 없고, 영능 범죄를 수사할만한 전문수사기술이나 활용할 데이터도 딱히 마련되지 않았다. 그리고 범죄를 저지른 영능력자를 사로잡는다 하더라도 이들을 가둬둘만한 전문 수감시설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아르탈 행성 연합이 보유한 수사기술이나 장비, 그리고 여러 가지 정보 등에 대해 나름 제공은 해주겠지만, 그걸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 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많은 도움 부탁드리겠습니다.”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도움을 구하는 메켈린 수상의 말에, 유태진은 긍정적인 답을 내놓았지만 추가적으로 철저한 대비를 당부했다.

“예, 도움은 드리지요. 그리고 기술도 제공해 드리고요. 하지만 영능력자들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체계는 확실히 마련해야 할 겁니다. 영능이란 건 그 수준에 따라선 미국에서 총기를 허용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위험성을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연합에서도 괜히 이능관리국을 만든 게 아니었다. 바로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전략병기보다도 더 위험해질 수 있는 게 바로 영능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이능관리국이 세워졌고, 그 결과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연합을 제어해 왔던 것이다.

유태진이 볼 때, 지구에도 그와 같은 전문담당 기관이 필요했다.

허나 메켈린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이미 준비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체계는 세워놨어도, 영능력자들을 통제할 기술이 없어서 문제더군요.”

모든 법과 제도는 결국 강제성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질서 확립의 여부가 달라진다. 제아무리 법과 제도를 잘 만들어도, 그것을 준수해야 할 자에게 강제할 힘이 없다면 결과적으로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유태진도 그 말에는 수긍했다. 아니, 그에 관련한 기술제공에 대해선 메켈린 수상이 말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었다.

“음, 그에 대해선 저희 측에서 따로 기술을 제공해 드리지요. 하지만 제도 마련에 있어 절충점을 잘 찾아야 할 겁니다. 영능력자들을 너무 강하게 강제하려 하면 인권문제가 대두될 테고, 그렇다고 너무 풀어주면 방만해져서 각종 사고를 일으키게 될 테니까요. 쉽지 않겠지만 메켈린 수상이라면 잘 하시리라 믿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제 이름을 걸고 확실하게 결과로 보여드리지요.”

메켈린 수상은 결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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