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06화
“아···.”
어느새 현실로 돌아온 소년은 비통한 신음을 토해내었다. 자신이 본 것이 정녕 이 세상에 다가올 미래라면, 너무도 잔인하고 참혹하지 않는가.
사내가 소년에게 감상을 물어왔다.
“어떠니, 미래를 본 소감이.”
“너무도 끔찍했습니다. 내가 본 광경이 정말 우리가 사는 세상의 미래가 맞는 겁니까?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요?”
진저리를 치며 묻는 소년에게, 사내는 조용히 말했다.
“처음부터 정해진 미래라는 건 없어.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놔둔다면 네가 본 멸망의 미래는 변하지 않는 필정이 되겠지.”
“그렇군요.”
소년에겐 그 말이 무엇보다 깊게 와 닿았다. 처음부터 정해진 미래가 없다는 말은, 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그마한 희망을 품은 그에게 사내가 다시 한 번 시험해보듯 물어왔다.
“네 생각은 어때? 이제 곧 멸망이 다가올 세상인데, 그렇게 힘을 쏟아가며 수련할 필요가 있을까? 다른 사람보다 재능도 없는 네가 더 노력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너무나도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이었지만, 엄연한 사실이기도 했다. 소년의 재능은 너무나도 미천해서 멸망의 날이 도래할 그때까지 모든 인생을 수련에 바친다 해도, 방금 전 환상 속에서 싸우다 죽어갔던 기사들의 발치에도 못 미칠 것이다.
허나 그 사실은 누구보다도 소년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당신이 말했잖아요.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어떻게든 바꿔볼 겁니다. 내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해도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예요.”
소년에게 그 무엇보다 확고한 신념이 새겨진 순간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사내는 그제야 자신이 품어왔던 제안을 꺼내놓았다.
“정 그렇다면 널 왕으로 만들어주겠어. 그래도 그 마음 변치 않을 자신 있어?”
“왕이라고요? 제가 말인가요?”
“적어도 멸망할 세상의 미래를 바꾸려면 그 정도 기초기반은 있어야 할 테니까.”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그 말에 깜짝 놀란 소년이었지만, 사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건 혼자 싸워서 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 다가올 미래를 대비해야 했다.
그러자면 자신이 왕이 될 필요가 있었다. 멸망을 대비할 정책을 시행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소년이 결단을 내리자,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정식으로 소개하지. 난 멀린 엠리스. 이제부터 널 가르칠 스승이자, 첫 번째 신하가 될 사람이란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오른손을 내미는 사내에게, 소년은 마찬가지로 오른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제 이름은 아서 팬드래건.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멀린.”
* * *
“뭐지, 이 꿈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유태진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경지가 높아질수록 수면의 필요성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자지 않을 순 없었다.
그래서 이삼일에 한번은 한두 시간씩 잠을 청했는데, 하필 오늘 이런 꿈을 꾸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하필이면 아서 왕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꿈으로 꾸다니··· 이것도 아바론을 다녀온 영향 때문인가? 아니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유태진은 자신의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빛이 아른거리는가 싶더니 허공에서 한 자루 검이 출현했다.
그것은 카멜롯의 봉인제단에 꽂혀 있던 아서왕의 상징, 엑스칼리버였다. 여전히 낡고 풍화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엑스칼리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냐?”
유태진이 엑스칼리버를 노려보면서 중얼거리자,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검신이 잘게 진동하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속내는 복잡하기만 했다.
‘어째서지? 어째서 이 검에서 천룡파마신검의 느낌이 느껴지는 거냐?’
* * *
유태진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랜슬롯이 알려준 엑스칼리버의 이름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에 검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만큼, 그 사실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정작 그를 이렇게 놀라게 한 데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유태진이 가까이 다가선 순간, 무척이나 익숙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이미 전생에서 수도 없이 경험해 봤던, 익숙한 신기의 느낌이었다.
“···천룡파마신검!?”
유태진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물론 드러난 외형은 천룡파마신검과 전혀 달랐다. 하지만 기감에 선명하게 와 닿는 이 존재감은 분명 천룡파마신검의 그것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천룡파마신검은 분명 내 전생 세계에 있어야 맞는데···.’
게다가 랜슬롯은 분명 이 검을 가리켜 엑스칼리버라고 했다. 그가 허튼 소리를 할 리가 없으니,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그런 유태진의 혼란을 눈치 채지 못한 랜슬롯은 어째서 엑스칼리버가 여기 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믿기진 않겠지만 사실이야. 엑스칼리버는 현재 봉인진의 코어 역할을 하고 있지. 그런 엄청난 봉인을 오랜 시간 유지하려면 엑스칼리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거든. 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라고 해야 하나? 지금은 그런 쇠퇴한 몰골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지구의 봉인도 점점 약해지고 있는 거지.”
“그렇군.”
유태진은 혼란스런 와중에도 그의 설명을 귀담아 들었다. 혹시라도 어떤 단서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검이 천룡파마신검일 것 같지는 않았다. 무려 1500년 동안 유지되어 온 봉인이었다. 엑스칼리버가 그동안 계속 코어 역할을 해 왔다면, 이것이 천룡파마신검일 리가 없었다.
“이름이 유태진이라고 했지?”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랜슬롯이 지시를 내렸다.
“손을 뻗어서 엑스칼리버를 뽑아라.”
“뭐?”
생각지도 못한 그 말에 유태진이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랜슬롯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지금 그 말은 무슨 뜻이지? 엑스칼리버가 봉인의 코어 역할을 하고 있다고 네 입으로 말해놓고는 나더러 봉인을 무너뜨리라는 거냐?”
유태진이 이해할 수 없다며 소리 높여 물었지만, 랜슬롯은 그것이 옳다며 말했다.
“어차피 얼마 못가 무너질 봉인이다. 그 전에 엑스칼리버가 새로운 주인을 찾는 게 더 옳겠지.”
“아까부터 했던 적합자라는 말이 그런 뜻이었나?”
“그래, 그 검은 아무나 쥘 수 있는 게 아니야. 적합한 상대가 아니면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지. 지금은 많이 낡고 쇠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 검이 품고 있는 힘은 여전히 강대해.”
“하지만 검이 이래서야···.”
유태진은 엑스칼리버를 내려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적합자라는 의미는 이해했지만, 과연 이렇게 낡아버린 엑스칼리버를 가져봐야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어서였다.
그러자 랜슬롯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새로운 연단(鍊鍛) 방법을 찾아야 할 거다. 어차피 엑스칼리버는 눈에 보이는 것과 달리 물질로 만들어진 검이 아니야. 창세성검 엘시어드가 남겨준 혼의 파편을 기초로, 성계신은 물론 지구와 세상 사람들의 상념이 구체화 된, 거대한 사상이 한 데 응집해 구현화 된 형태지. 검이 낡고 쇠했다는 건 완성 당시 결속되었던 사상력이 흐트러졌다는 뜻이니, 다시 예전 모습으로 되돌릴 방법도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다.”
“사상이라.”
랜슬롯이 말해준 바가 대충 어떤 의미인지는 알 것 같았다.
연합에서도 그랜드 마스터 급의 강자들이 사용하는 의념기가 바로 사상기였다. 그들은 심상을 현세에 구현함으로서 기존의 섭리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현상이나, 그에 준하는 특수한 병기 등을 현현시킴으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엑스칼리버도 바로 그런 사상기의 일종으로 보였다.
다만 이건 일개 개인의 심상을 구현한 게 아니라, 수십 억 년 이상을 존재해온 지구의 의사와 사람들의 사상, 그리고 이것들을 한데 엮어낸 성계신의 힘까지 더해지면서 완성된 새로운 차원의 사상기라 해야 할 것이다.
‘과연 가능할까?’
무인인 유태진은 심검을 다루고 있는 만큼, 오버러들과 같은 사상기를 다루지 않았지만 그 원리는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낡고 쇠한 엑스칼리버를 본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터무니없어. 엑스칼리버가 완성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성계신이 그 막대한 사상을 한데 엮고 결집시켜서 형태를 고착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야. 그런 게 가능하려면 신이 아니고선 불가능해.’
하지만 지구의 성계신은 성좌들의 공격에 큰 타격을 받고 일찍이 소멸해버린 상황이었다. 물론 신은 영원불멸인 만큼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부활할 테지만, 적어도 긴 세월이 지난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랜슬롯의 말을 들어보면 성계신이 다시 부활할 때까지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수만 년 이상은 걸릴 것으로 보였다.
‘연합을 상징하는 빛과 생명의 여신이라는 루네리아라면 가능할까?’
하지만 그녀가 아무 관련도 없는 지구를 위해 엑스칼리버의 복원에 도움을 줄지는 의문이었다.
‘아직 시도도 안 해봤는데 벌써부터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지. 일단은 뽑고 봐야겠어.’
그렇게 해서 유태진은 랜슬롯의 말대로 엑스칼리버를 자신의 손으로 뽑았고, 그걸로 지구를 성좌들로부터 인식하지 못하게 해 주었던 봉인진도 완전히 붕괴되었다.
하지만 봉인의 힘이 당장 사라진 건 아니었다. 랜슬롯의 말에 따르면 적어도 2년 정도는 유지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약화되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진 터라, 사람들이 영능을 자각하게 되는 시점은 대충 6개월 이후로 예측했다.
그런 뒤 랜슬롯이 남아 있는 아바론을 떠나 한국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엑스칼리버의 존재 때문에 유태진의 마음은 여전히 복잡했다. 엑스칼리버를 뽑은 이후로 그는 이제 다른 오버러들이 다루는 사상기마냥 엑스칼리버를 다룰 수 있게 되어서였다.
아서왕의 검이었다던 엑스칼리버가 이젠 자신의 것인 마냥 친숙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엑스칼리버는 천룡파마신검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어. 사람이 쌍둥이라 하더라도 영자 패턴이 완벽하게 일치할 순 없는 법인데, 이건 완벽히 일치하잖아. 이럴 순 없는 일인데···.’
유태진이 리스티에게 영국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지 못한 것도 그래서였다. 엑스칼리버와 천룡파마신검이 서로 어떤 연관성을 가진 건지 답을 찾지 못한 이상, 섣불리 드러내기가 꺼려졌던 것이다.
‘차차 연구해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 생각이 정리되고 나면 리스티한테도 다 털어놓고 의논을 해봐야겠어.’
두 검의 연관성을 캐내는 것도, 엑스칼리버를 다시 완전했던 형태로 되돌리는 것도 자기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같이 머리를 맞댈 수 있을 만한 지식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으로선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리스티 하나밖에 없었다.
“일단은 가상현실 문제부터 다 끝마쳐둔 다음에···. 지금은 여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유태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엑스칼리버를 다시 사라지게 만들었다. 지금은 지구인들이 영능의 기초를 체득하는 게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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