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80화 (281/448)

12권-05화

“아저씨가 이렇게까지 진지한 걸 보면 확실하겠네요.”

잠시 유태진의 눈을 바라보던 리스티는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더 자세한 건 묻지 않았다.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된 출처나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서두르도록 해요. 가상현실 시스템을 전 세계 규모로 구축하려면 준비할 게 생각보다 많으니까요.”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진행했다면 촉박할 리 없었겠지만, 계획을 무려 1년 이상이나 시간을 앞당기는 일이다.

이걸 단기간에 진행하려면 역량을 총동원한다 하더라도 일정이 꽤 빠듯할 것이다.

“그런데 아저씨는 서비스 시점을 언제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거죠? 6개월 안에 각성한다면 최소한 그보다는 빨리 진행해야 할 텐데요.”

“적어도 1개월 내엔 시작해야지. 그래야 사람들도 적응할만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

“휴우··· 1개월이라.”

유태진이 목표한 1개월이란 말에, 리스티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상현실을 서비스하기 위해선 그냥 접속기만 대량 생산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가상현실을 운영할 수 있는 초고성능 서버와, 이를 위한 시설 등··· 다양한 인프라들도 기본적으로 마련해야 했다.

특히 지구상의 기술이나 인력으론 어림도 없는 만큼, 이 모든 것을 리스티와 유태진, 그리고 인피니티 킹덤의 기술진들의 힘만으로 해내야 한다는 것도 문제였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쉽지도 않겠네요. 특히 한 달이라는 그 기한을 맞추려면 더더욱 그렇고요.”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 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영능에 익숙해지면 그게 나중에는 큰 전력이 될 테니까.”

그랬다. 그들이 애당초 가상현실을 서비스하려고 계획했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가상현실을 통해 그들이 간접적으로나마 영능을 지금부터 접하고 학습함으로서, 후에 현실에서 영능을 각성하더라도 빠르게 전력화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로 사람들이 영능을 각성할 시기가 크게 앞당겨짐으로서, 기존의 계획 자체도 앞당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니 상당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그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이대로 [오버러 육성용 전투모의 시뮬레이션]을 내놓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봐요.”

“음? 뭐가 문제인데.”

리스티의 그 말에 유태진이 무슨 뜻이냐며 되물었다. 그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은 관리국 내에서 검증을 마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모의 시뮬레이션이었다.

전투를 경험하기 위해선 이보다 확실한 게 없는데도, 리스티가 문제가 있다고 말하니 유태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자 리스티가 답답하다는 듯 토로해왔다.

“아저씨, 좀 생각해 봐요. 이건 말 그대로 전투 시뮬레이션이에요. 이런 걸 그대로 낸다고 해서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 생각하세요? 물론 가상현실 기반의 서비스이니 다들 어느 정도 흥미는 가지겠죠. 하지만 금방 떨어져나갈 걸요? 무지막지한 난이도에, 필터링이 전무한 잔혹함. 그리고 초심자들로서는 기초를 닦을만한 학습 커러큘럼도 없죠. 이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영능을 습득한 사람들이 모의 전투를 진행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이에요. 학습 기능은 거의 전무하다고요. 아무 것도 모르는 지구인이 이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 말대로였다. 전투 모의시뮬레이션은 철저히 실전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학습 기능이 없진 않았지만, 영능에 대해 무지한 지구인들이 영능의 기초를 닦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피가 튀거나 하는 잔혹한 광경들이 조금도 여과 없이 노출되는 만큼,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채 평화롭게 살아온 일반 시민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 현재 우리가 보유한 프로그램 중에선 그것 외에는 간접적으로나마 영능을 체험할 수 있는 게 없는 걸로 아는데···.”

만일 다른 차선책이 있었다면 유태진도 다른 프로그램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연합의 중심지로부터 꽤 떨어진 변두리 우주였고, 이걸 대신할만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수주할만한 곳도 없었다.

헌데 리스티가 이 부분에 대해 짚고 나온 것이다.

“이걸 게임 형식으로 바꿔야죠. 우주를 주 무대로 하는 SF판타지로요. 지구에 와보니 참고할만한 게임들이 참 많더라고요. 여기에 오로라 시스템의 기반까지 그대로 옮겨 놓으면 적당할 것 같아요.”

“흐음, 그러면야 좋겠지. 하지만 그럴만한 시간이 있을까? 그걸 새로운 형식으로 뜯어 고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닐 텐데.”

리스티의 의견에는 이진운도 일정부분 동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성된 프로그램을 뜯어고치고 개수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새로 만드는 것보다 더 힘들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은 애당초 고려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리스티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이건 차라리 쉽죠. 프로그램은 그냥 데이터 내용만 일부 개찬하면 끝이니까요. 저한테는 가상현실 서비스 기반을 준비하는 게 더 힘들고 오래 걸린다고요. 이건 직접 움직이고 해야 하잖아요.”

“···아, 그래?”

몸으로 움직여야 하는 일보다는, 차라리 이런 일이 간단하고 쉽다는 그 말에 유태진은 그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리스티가 천재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방대한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개찬하는 일조차 별로 어렵지 않다고 하는 걸 보면 역시 능력 하나는 상식 밖이었다.

* * *

한 소년이 있었다. 왕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태생적 문제 때문에 한 기사의 양자가 되었고, 그의 보살핌 속에서 무탈하게 자라나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기사의 품에서 안전하게 자라긴 했지만, 소년이 본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외적은 수시로 침범해왔고, 토지는 점점 피폐해져서 민심까지 흉흉해졌다. 게다가 사람들 사이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멸망의 예언까지 떠돌면서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기사의 집안이라 크게 어려움 없이 자라온 소년조차도 세상의 위기감이 피부로 크게 와 닿을 정도였다.

그래서 기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처럼 기사가 되어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지켜주겠다고, 소년은 그렇게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했던 소년의 결심은 곧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네겐 재능이 없는 모양이구나.”

그의 아버지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아들에게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을 꺼낸 건 소년이 양아들이라서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얻지 못하는 아들이 안타까워서였다.

소년은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친자식과 차별 없이 키워주셨고, 기사가 되고자 했던 자신을 최선을 다해 가르쳐주셨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소년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같은 훈련을 해도 항상 남보다 뒤처지는 자신의 모습에서 재능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몸이었다. 설령 재능이 없다 하더라도 이렇게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끝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남들보다 더 노력함으로서 부족한 재능을 대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쏟는 노력에 비해 실력의 향상은 여전히 지지부진했고, 오히려 자신보다 늦게 시작했던 아이들이 앞서나가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를 악물며 버텼다. 자신이 재능이 없음을 절감할 때마다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지만, 지금까지 해온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포기할 순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성과 없는 훈련에 노력을 쏟던 어느 날, 소년은 한 사내와 만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사내가 소년을 찾아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화사한 로브를 입은 사내는 소년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가차 없이 평가를 내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재능이 없구나. 그쯤 했으면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처음 보는 타인에게 하는 말치고는 너무도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사내와 소년의 첫 만남은 그렇게 최악으로 기억되고 말았다.

소년은 그 즉시 사내를 자신이 훈련하던 장소에서 내쫓았지만, 그날 이후에도 사내는 매일같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소년의 훈련을 지켜보면서 이것저것 은근슬쩍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첫 인상이 별로였던지라 그냥 무시해버렸지만, 그런 날이 점점 길어지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의 말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사내는 생각보다 박학다식한 인물이었다. 첫 인상의 편견을 버리고 나니, 그가 가진 능력들이 보였다.

특히 훈련에 대해 던져준 조언은 놀라울 정도였다. 아버지에게 받은 가르침보다, 사내의 말에 따라 훈련했을 때 훨씬 더 높은 성취를 얻었으니까.

물론 그래봐야 다른 사람들에 비한다면 대단할 것도 없는 성장이었지만, 재능이 보잘 것 없던 소년에게는 그 정도만으로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진지하게 그의 정체를 물었다.

그러자 사내는 자신을 대마법사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멸망의 예언을 한 장본인이라고도 밝혔다.

“당신이 그 얼토당토 않는 소문을 낸 주인이라고요?”

소년이 황당하다는 듯 묻자, 사내는 빙긋 웃어보였다.

“얼토당토않기는··· 멸망의 예언은 사실이란다.”

“당신은 어째서 그런 예언을 한 거죠?”

“조만간 다가올 미래니까. 너희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에겐 전부 보인단다.”

소년으로선 믿기 어려운 이야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봐온 이 사내는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내뱉긴 해도, 결코 허튼 소리를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본 멸망의 미래를 네게도 똑같이 보여주도록 하마.”

생각지도 않은 사내의 제안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말이 진실이라면 그 예언의 실체를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화아악!

“이건!?”

제안을 받아들인 순간 소년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의 눈앞에는 현실 대신, 사내가 말했던 예언의 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쾅! 콰아아앙!

온 사방이 불타오르고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이 개미떼마냥 우수수 죽어나갔다.

그리고 소년은 볼 수 있었다. 저 하늘 너머에 존재하는 머나먼 별들로부터 날아온 기괴한 적들의 모습을!

모든 걸 파괴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저 괴물들이 바로 이 세상에 멸망을 가져올 예언 속의 존재들인 것이다.

괴물들은 실로 잔혹하고 강력했다. 세상에 이름난 기사들조차 저 괴물들 앞에서는 무참하게 죽어나가고 있었다. 물론 분전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괴물이 나타나 저항하는 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그야말로 파괴의 화신! 놈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말 그대로 풀 한포기 남아있지 못했다.

그렇게 세상을 파괴한 괴물들은 모든 생명체들을 박멸한 다음에야 행보를 멈췄다. 온 세상이 괴물로 뒤덮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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