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79화 (280/448)

12권-04화

“아!”

유태진은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랬다. 저 이름을 언젠가 한번 들은 바가 있었다. 관리국장의 부관이었던 필리스와 협상하던 당시 우연찮게 보게 된 초상화. 이상하게 낯익은 기분이 들어 그에게 물었을 때, 처음으로 그 이름을 듣게 되었다.

제노디안 리피라이터

이능관리국의 초대 국장이자, 아르탈 행성 연합을 사실상 설립한 장본인이었다. 행정은 물론 검술, 마법, 정령술, 그리고 마도공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통달한 만능 그 자체였다고 했다.

헌데 그 사람이 바로 아서왕이었다니. 솔직히 듣고 나서도 믿기지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랜슬롯의 말을 거짓으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불현듯 한 가지 떠오른 의문점도 있어서 그에게 바로 질문을 던졌다.

“음, 당신의 말들이 전부 사실이라 치자. 그렇다면 랜슬롯, 당신은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바론 안에서 1500년 동안 유폐된 거나 다름없었다는 당신이 저 먼 우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어째서 그렇게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건데?”

“네 말처럼 난 이곳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지. 하지만 외부의 소식을 수시로 전해주는 작자가 있어서 그에게 들었다. 너도 잘 아는 인물일 텐데?”

유태진은 자신도 아는 인물이라는 랜슬롯의 대답에, 누군가의 이름이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상황에서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그 자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 날 이곳에 보낸 그 작자를 말하는 건가?”

“그렇지. 이제 아바론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멀린 그 작자 하나밖에 없거든. 아니, 너까지 포함하면 이제 둘이 된 건가?”

“······.”

이쯤 되니 유태진도 황망함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아바론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고, 원탁의 기사인 랜슬롯에게 지난 1500년 동안 꾸준히 소식을 전해줄 정도로 인연이 있는 자.

심지어 멀린이란 이름까지 대놓고 사용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그저 다른 천외오천들마냥 코스프레 컨셉에 취해 유명한 전설의 인물인 멀린의 이름을 차용하는 줄로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모든 조건이 부합한다면 더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다시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어. 정말로 그 작자가 아서왕의 전설에 등장하던, 킹메이커로 유명한 멀린 맞나?”

“뭐, 한때 그렇게 불리기도 했지. 나한테는 그저 취미 고약하고 악질적인 몽마의 혼혈일 뿐이지만.”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랜슬롯의 모습에, 유태진은 인정하지 눈앞으로 다가온 진실을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경박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작자가 정말로 멀린이었다고?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로군.’

그동안 봐왔던 멀린의 행동과 말투 하나하나가 새삼 새롭게 와 닿았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여유로웠던 태도는 결국 스스로에 대한 실력과 연륜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던 것이다.

‘하긴 아서왕의 전설이 시작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적어도 1500세 이상이라는 건데··· 정말로 노괴물이었군.’

전설에 따르면 멀린은 평범한 인간 태생이 아닌, 몽마와 혼혈인 반인반마라고 했다. 그렇다면 15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젊은 모습으로 멀쩡히 살아 있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헌데 그 킹메이커 멀린이 지구로부터 소환된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면서, 아르탈 행성 연합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니,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유태진은 멀린이 아서왕을 왕으로서 육성해냈고, 그가 장성한 이후엔 군주로 섬겼던 대마법사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헌데 그런 멀린이 지금도 연합에 남아있는 걸 보면··· 어쩌면 연합을 건립한 아서왕도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럼 혹시 아서왕도 지금 현재까지 살아 있는 건가?”

유태진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랜슬롯은 한 차례 픽 웃더니 가당치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멀린 때문에 그런 얼토당토 않는 생각을 하나 본데, 왕께서는 순수한 인간이셨다. 이미 오래 전에 수명이 다해 돌아가셨지. 멀린 같은 질 안 좋은 반인반마와는 사정이 달라.”

“그랬군.”

유태진은 조금 아쉬운 얼굴로 납득하고 말았다. 성좌와도 정면으로 대적했던 아서왕이라면 앞으로 인베이더와의 싸움에서 큰 전력이 될 거라 기대했는데, 역시 그도 인간의 수명을 초월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헌데 그때 랜슬롯이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그건 그렇고 대체적인 사정은 알겠어. 멀린이 널 이곳으로 보낸 걸 보면, 네가 바로 그 적합자인 모양인데··· 날 좀 따라왔으면 좋겠군.”

“적합자?”

“지금은 묻지 말고, 자세한 건 날 따라와 보면 안다.”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릴 하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앞서 걸어 나가는 랜슬롯.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보여주는 일방적인 태도에 유태진은 조금 기가 막혔지만, 그렇다고 따라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거지? 적합자는 또 무슨 소리고.’

지금까지 들은 옛 진실들만 하더라도 하나같이 놀라운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랜슬롯이 자신을 데리고 가려는 곳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유태진은 랜슬롯의 뒤를 따라 내부로 이어지는 기다란 회랑을 걸어 나갔다. 이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카멜롯에서도 아주 깊고 은밀한 곳이란 사실이었다.

어느덧 회랑이 끝나고 거대한 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얼마나 큰지 그 넓이가 어지간한 대형 운동장보다도 더 커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거대한 제단과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강렬한 위압감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유태진조차 섣불리 볼 수 없는 강력한 영압이었다.

흠칫 놀란 그가 랜슬롯에게 물었다.

“여긴 뭐지? 그리고 이 압력은?”

“카멜롯의 중심축이지. 지구를 봉인하고 있는 의례법진이 존재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1500년 전에 소멸하고 없는 성계신의 성지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활용되고 있지. 네가 방금 느낀 건 아마도 봉인제단에서 흘러나온 힘의 잔재일 거다.”

“그렇군. 여기가 성지의 중심이었나?”

랜슬롯의 설명을 듣고서야 납득이 갔다. 그냥 봉인도 아니고, 인베이더의 성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만금 강력한 봉인술진이었다. 자신이 그 잔재만으로도 이만한 위압감을 느낀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랜슬롯을 제단을 향해 자신의 오른손 검지로 가리켰다. 그리곤 유태진에게 말했다.

“일단 저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저 제단의 중심으로 다가가. 그곳에 네가 봐야 할 게 있다.”

“당신은 같이 안 가는 건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상대의 모습에 유태진이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랜슬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내가 적합자란 말을 했었지? 나는 적합자가 아니라서 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이 봉인을 유지하고 있는 힘이 적합하지 않은 자는 밀어내 버리지.”

랜슬롯은 그 사실을 유태진에게 직접 보여줄 생각인지 제단이 있는 방향을 향해 앞으로 한발 내딛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장벽이 그를 거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바로 이렇게 말이야.”

랜슬롯은 시범을 보여주자마자 바로 뒤로 물러섰다. 더 이상 쓸데없이 기운 빼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사실이었군. 방금 일보도 만만치 않은데, 그걸 막아버릴 줄이야.’

방금 랜슬롯이 보여준 일보는 결코 평범한 게 아니었다. 이곳이 성지가 아니라 평범한 곳이었다면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막강한 힘을 담고 있었다.

헌데도 랜슬롯은 전혀 나아가지 못했다. 그만큼 봉인지에서 발생되는 역장의 힘이 강대하단 뜻이었다.

시범을 보여준 랜슬롯이 이번엔 유태진에게 손가락으로 제단을 가리켜 보였다. 그 뜻을 이해한 유태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나섰다.

“그럼 한번 시도는 해보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방금 전 랜슬롯이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곳에서 그는 천천히 한발 내딛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때와 전혀 달랐다. 유태진의 오른발은 분명히 랜슬롯이 가로막혔던 곳보다 한 치 정도 더 깊이 나아가 지면을 딛고 서 있었다.

‘그 말이 정말이었어. 적합자라서 가능할거라더니···.’

어느 정도 저항력은 느껴졌지만, 랜슬롯 때와 같이 완고하게 저지하진 않았다. 걸음을 내딛을수록 압력은 더욱 커졌지만, 그렇다고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 뭣 때문에 나보고 제단으로 가보라는 거지? 여기에 뭐가 있기에.’

유태진도 누가 시킨다고 해서 그대로 따를 만큼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었다. 단지 제안을 해온 랜슬롯에게 악의가 없음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그 말대로 따른 것이다.

그리고 나름 짐작 가는 바도 있었다.

‘아마도 저 제단에 봉인을 유지하고 있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아서왕이 남긴 유산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제단에 가까워진 유태진은 제단 안에 세워진 기다란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긴 세월 속에서 풍화된 나머지, 본연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 색은 바란 지 오래고, 낡고 부서져서 이젠 간신히 형체만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오래전에 사용되었을 한 자루의 검이었다.

“랜슬롯··· 이건 혹시?”

유태진은 곧바로 랜슬롯을 돌아보았다. 이 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짐작이 갔지만, 그래도 랜슬롯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잠시 한숨을 내쉰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게 바로 나의 왕, 아서의 성검 엑스칼리버다.”

* * *

그로부터 얼마 뒤, 유태진은 영국에서의 일을 다 끝마치고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선 여유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아저씨? 영국 갔다 왔다더니 거기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걱정스럽게 묻는 리스티의 말에, 유태진은 그제야 자신이 평소와 다르게 동요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군. 나답지 않았어. 그 일 때문에 내가 이렇게까지 흔들리게 될 줄이야.’

내심 쓰게 웃은 유태진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냉정하게 판단하고 움직여야 할 때였다. 안 그래도 아바론에서 뜻밖의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기존의 계획을 좀 더 앞당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리스티, 지금부터 잘 들어라.”

“네, 말씀하세요.”

예전과는 사뭇 다른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리스티도 평소의 느긋함을 지우고 귀를 기울였다.

“상황이 좀 급박하게 되었다. 우리가 세워두었던 가상현실육성프로젝트를 아무래도 크게 앞당겨야 할 것 같아.”

“그 말은··· 지구인들의 영능 각성 시기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라졌다는 건가요?”

“그래, 내 계산이 맞다면 앞으로 6개월 안에 이뤄질 거로 예상되고 있다.”

리스티는 그 말에 놀라 숨을 삼켰다.

빛과 생명의 여신 루네리아의 권능이 사람들의 신성력을 일깨운 후로, 지구인들의 영능이 서서히 깨어날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건 계산했던 것보다 무려 1년 반 이상이나 더 빠르지 않은가?

그녀로서는 유태진이 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추측을 내놓는지 의문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번 영국행으로 뭔가 새로운 것을 알게 된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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