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02화
“뭐···!?”
충격에 휩싸인 나머지 유태진은 일순 아무 말도 못했다. 질문은 자신이 했거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되돌아온 것이다.
허나 그것도 잠시 뿐, 유태진은 미간을 일그러뜨리고는 추궁하듯 캐물었다.
“···이 안에서 계속 유폐 생활을 하고 있다던 녀석이 인베이더까지 알아? 그건 어떻게 안 거냐? 그리고 내가 우주로 나갔다 왔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았고?”
쿠구구구!
들끓는 감정 때문인지 무시무시한 무형지기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카멜롯을 박살내고도 남는 가공할 기세의 폭풍이었다.
그렇지만 그 앞에서도 랜슬롯은 태연하기만 했다.
“기세는 좀 줄이지. 내 피부가 다 따끔거리는군. 적당히 가라앉히지 그래? 곧 설명해 줄 테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테이블 위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누르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자 은밀하게 퍼져 나온 무형의 힘이 유태진의 끓어오르는 기세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좋아, 그럼 말해 봐.”
유태진은 이대로 기세를 부딪쳐볼 수도 있었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상대와 신경전을 벌이기보다는 일단 어떻게 된 건지 사정부터 듣는 게 우선이었다.
“흥분을 금세 가라앉히는 걸 보면 꽤나 궁금한 모양이군. 내가 어떻게 인베이더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는 아주 간단해.”
랜슬롯은 지금까지 보였던 태도와 달리 진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바로 내가, 아니 우리 원탁의 기사들과 카멜롯이 너희의 선배 격이 되기 때문이지.”
“선배라니··· 그건 또 무슨 의미로 하는 소리지? 내가 알아듣게 설명을 해.”
뜻 모를 소리에 유태진이 다시 한 번 캐묻자, 랜슬롯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답해주었다.
“말 그대로 들으면 되니까 여기서 더 설명을 붙이고 말고도 없어. 우린 이미 너희들보다 훨씬 앞선 1500년 전부터 인베이더와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 있다는 소리다.”
“그럴 리가! 그런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어.”
유태진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인베이더의 침공 가시권이 태양계에 미치기까지 이제 1년 10개월 남짓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랜슬롯의 말대로라면 이미 1500년 전에 지구를 침범한 적이 있었다는 건데···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뭐, 그렇겠지, 죄다 오랜 세월 속에 묻혀버린 사실이니까. 아마 연합이란 곳에서도 이 사실만큼은 모르고 있을 테지.”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납득이 안 가. 그럼 1500년 전에 브리튼은 인베이더의 침공을 물리친 건가?”
“물론. 우리도 상당히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지.”
랜슬롯이 가진 실력을 생각하면 아주 납득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신화 급 이상의 인베이더가 직접 나서지 않았다면 어지간한 함대쯤은 랜슬롯 혼자서도 감당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너무도 이해되지 않는 점이 너무 많았다.
“그럼 왜 1500년 동안 지구가 멀쩡할 수 있었던 거지? 한번 점령에 실패했다고 해서 가만있을 녀석들이 아니야. 여러 차례에 걸쳐 꾸준히 재침공을 시도했을 텐데, 지난 1500년 동안 인베이더가 지구를 침공해온 흔적은 전혀 없었어.”
랜슬롯 같은 강자도 원탁의 기사 중 일원일 만큼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카멜롯도 많은 희생을 치렀을 정도라면, 지구로 파견된 인베이더의 전력도 만만치 않았었다는 뜻이다.
그 정도로 수고를 들여가며 침공했던 지구를, 인베이더들은 왜 브리튼이 멸망한 이후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냥 방치해 두고 있었던 것일까? 이젠 카멜롯과 원탁의 기사들도 사라지고 없어서 언제든 손쉽게 박살낼 수 있는 지구를 1500년 동안 그냥 놔뒀다는 사실이 미심쩍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마냥 방치해두고 있다가, 최근 태양계 방면 쪽으로 야금야금 침공영역을 넓혀오고 있는 인베이더의 행보를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의문이었다.
“이제부터 설명해주지. 1500년 전 당시, 우리는 원탁을 결의했다. 너희들이 아는 것처럼 외세로부터 브리튼을 지키기 위해 결의한 게 아니야. 바로 인베이더의 침공으로부터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였지.
그 직후 큰 전쟁이 벌어졌다. 인베이더와 우리 브리튼이 격돌할 수밖에 없었던 거대한 전쟁이. 전설에서 말하는 열두 차례의 회전은 바로 이것을 말함이지. 단지 그것을 당시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각색해서 전래된 게 바로 지금의 전설인 거고.”
그렇지만 오랜 옛일을 언급하는 그의 표정에서는 조금도 자랑스러워하는 감정이 엿보이지 않았다. 과거에 달성했던 영광과 위업을 입에 담는 자 치고는 지나치게 무거워 보였다.
“하지만 전쟁에는 끝이 없었다. 싸울수록 우린 피폐해졌고, 전력도 약화되었지. 그에 반해 인베이더 놈들은 조금도 쇠하질 않았다. 눈앞의 녀석을 쓰러뜨리고 나면 또 새로운 녀석이 나타났지. 그 결과 우리의 전력은 지속적으로 깎여나가기만 했다.”
그 당시의 암담했던 기억을 재삼 떠올린 건지 랜슬롯의 눈빛이 암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홀로 열세에 처한 상황에서도 도움을 청할 곳조차 없었어.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로마는 호시탐탐 우리의 뒤를 노리고 있었고,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지. 평소라면 상대도 안됐을 녀석들이지만, 인베이더와 전쟁 중인 상황에서는 놈들의 견제를 막는 거조차 벅찼어. 그야말로 사면초가였지.”
유태진은 그때의 일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랜슬롯의 설명만으로도 대략적인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자신의 전생 시절, 마교와의 전쟁도 그랬다. 단독으로 중원무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마교는 자연재해나 버금가는 괴물이었다. 그런 강대한 세력을 적으로 둔 상황에서도, 무림맹 내부의 분열은 언제나 있어왔었으니··· 이곳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당시 지구에는 우리 브리튼을 가호하던 성계신이 건재했지만, 그도 어쩔 수가 없었지. 인베이더의 성좌들까지 직접 개입하면서 더 이상 우릴 도울 여력마저 사라져 버렸으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유태진이 그 말에 깜짝 놀라 외쳤다. 설마 여기서 성좌가 언급될 줄은 상상도 못해서였다.
“지구에 성계신이? 아니, 성계신의 존재 여부는 제쳐둔다 쳐도 인베이더의 성좌들이 직접 나섰었다니?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그 정도 되는 존재들이 직접 개입하려면 막대한 간섭력은 필수불가결이었을 텐데.”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지구에는 인류를 등진 배신자들이 있었다. 브리튼의 존재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로마의 황제 루키우스와, 같은 원탁의 기사였으면서도 배덕자로 전락한 모드레드. 그들의 술수로 성좌들은 지구에 개입할 수 있는 필요한 간섭력을 얻었고, 결과적으로 카멜롯이 멸망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버렸지.”
성좌 급의 존재가 직접 개입했다면 카멜롯이 멸망한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그들의 강대함은 일찍이 유태진도 한번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라인트라에서 루클라의 육신을 통해 강림했던 투쟁의 좌 오르쿤은 그 존재감만으로도 연합과 제국의 대 함대를 홀로 압도해 보였다.
그 앞에선 다수의 그랜드 급 강자가 모여도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성좌들을 어떻게 브리튼 하나의 멸망만으로 물리칠 수 있었던 건지 궁금할 정도다.
“···이해할 수가 없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모드레드야 원래 전설에서도 반역자로 알려지긴 했지만, 루키우스 황제는 왜지? 브리튼이 인베이더에게 멸망하고 나면 다음에는 로마는 물론이고 인류 전체가 그 대상이 될 게 뻔한데.”
“우리가 서로 공멸하길 바란 거겠지. 사람의 욕심이란 그런 법이니까. 멸망이 코앞에 닥쳐도 당장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게 인간 아닌가?”
“그건 그렇지.”
냉소 섞인 그 대답 속에서 유태진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모멸의 감정을 느꼈다. 그만큼 그때의 일이 사무쳤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성좌들은 왜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지구를 집요하게 노렸던 거지? 성좌들까지 직접 나선 걸 보면 상당히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유태진이 던진 질문에 이번엔 랜슬롯이 뜻밖이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모르고 있었나?”
“모르다니 뭘?”
“지구가 우주에서도 아주 특별한 행성이란 걸 말이야.”
“그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가진 행성이란 점 때문인가?”
유태진의 말을 들은 랜슬롯은 일순 기가 막힌다는 얼굴이 되었다.
“허··· 정말 모르고 있었군. 멀린 이 작자가 이렇게까지 개판을 칠 줄이야.”
잠시 한숨을 내쉰 그는 유태진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갖춘 행성이 드문 편이긴 해도 특별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 그리고 과학이나 영능이 발전된 곳들은 테라포밍으로 그 정도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도 있고.”
“하긴··· 그 정도로 지구를 특별하다 하긴 그렇군.”
랜슬롯의 말이 옳았다. 지구처럼 생명체가 살기 적합한 환경을 완벽히 갖춘 곳은 넓은 우주에서도 극히 드물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특별함을 주장하긴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내가 말했던 지구가 특별하단 이유는 바로 이곳이 [유니버스 테라 코어]이기 때문이다.”
“유니버스 테라 코어?”
처음 듣는 명칭에 유태진이 고개를 기웃거리자, 랜슬롯이 가볍게 풀이해주었다.
“그냥 줄여서 유니버스 코어라고 부르기도 하지. 바로 우주의 중심이란 뜻이다.”
“우주의 중심.”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유태진에게 있어 지구는 은하계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아주 작은 행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구에 유니버스 테라 코어(우주의 중심)라는 거창한 명칭이 왜 붙게 된 건지, 참으로 영문 모를 일이었다.
“네가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우주는 한 존재에 의에 창조되었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바로 창조주 데이마 디그 브라이드, 그분이 만든 작품이지.”
“음, 들어 본 적은 있는 것 같아.”
연합에서 교육받을 때 언뜻 들어본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허황된 창세신화 같은 이야기라서 그냥 듣고 넘겼었다.
헌데 그게 지금 랜슬롯을 통해 다시 언급될 줄이야.
“그분은 거대한 우주를 펴고 일곱 개의 대차원을 만드셨다. 물론 평행세계나 병행우주까지 포함한다면 더 많을 테지만, 큰 범주로만 분류한다면 그 일곱 개의 대차원이 전부라 할 수 있지.”
“그래서?”
여기까지는 유태진도 익히 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랜슬롯의 이야기는 그가 상상하던 바를 넘어섰다.
“그렇게 만들어진 각 일곱 개의 차원마다 하나씩 존재하는 것이 바로 유니버스 테라 코어. 태초에 발생한 빅뱅의 시작점이자, 해당 차원의 운명을 좌우하는 분기점이다. 그 일곱 개의 유니버스 테라 코어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인 거지.”
랜슬롯의 말에 따르면 인베이더들은 유니버스 테라 코어를 장악함으로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을 작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집요할 만큼 지구를 침략하려 했던 것이다.
“인베이더는 말 그대로 순수한 악이야. 지성체를 멸망시킴으로서 얻는 악업을 통해 진정한 완성으로 다가가길 바라지. 그런데 그런 놈들이 유니버스 테라 코어를 장악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나로선 짐작이 안가. 뭐라 말을 못하겠어.”
“말 그대로 놈들에겐 우주적인 행운이 따를 거다. 차원의 섭리 자체가 놈들에게 죄다 유리하게 흘러갈 테니까. 물론 당장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을 테지만,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엄청나게 큰 차이지. 놈들에게 이길 전쟁도 아슬아슬하게 지게 될 것이고, 가벼운 손실만 입고 패할 전쟁도 몇 가지 요소가 우연찮게 뒤틀리면서 돌이킬 수 없는 참패로 변할 테니 말이야. 그런 게 우주적인 규모에서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지는 대충 상상이 가겠지?”
“···그렇게 된다면 말 그대로 재앙이나 다름없겠어.”
안 그래도 인베이더의 세력은 우주에서도 단독으로 대적할 곳이 없을 정도로 강성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런 행운적인 요소까지 더해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연합을 비롯한 3대 세력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멸망할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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