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권-01화
어기비행술로 상공을 가로질러간 유태진은 어느새 영국 상공에 도착했다. 귀찮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 배틀 슈트에 내장된 스텔스 기능과 몇 가지 기척차단 술식을 전개한 덕분에 그가 영국군의 레이더망에 걸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여긴가?”
유태진은 인적이 없는 장소를 찾아 내려섰다.
이곳이 바로 솔즈베리 평원. 유명한 유적 중 하나인 스톤헨지가 보존되고 있는 장소였다.
요즘 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인지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전혀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스톤헨지 코앞에는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과 몇 가지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어 사람의 인적이 아주 없진 않았다.
유태진은 괜한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숨겼다. 기척을 지우고 배틀 슈트의 비가시화 기능을 전개해서 완전히 투명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음?”
스톤헨지를 향해 가까이 접근하던 유태진은 일순 멈칫하고 말았다.
그곳을 중심으로 심상치 않은 영력의 파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워낙 잘 갈무리 된 터라, 이렇게 근접할 때까지 눈치 챌 수 없었던 것이다.
“내 기감마저 속일 정도만 아주 특수한 은폐 술식인가 본데··· 지구에 이런 곳이 있었나?”
허나 이런 고도의 은폐 술식조차 스톤헨지에 숨겨진 진짜 모습을 숨기기 위한 한 가지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군. 이런 형태라면··· 위상공간의 일종이군. 은폐 술식은 이걸 감추려는 거였어.”
보는 순간 유태진은 은폐술식은 물론 그 너머에 숨겨진 특수한 위상공간의 존재까지 단번에 읽어내었다.
“멀린 그 작자가 가보라 한 이유가 있었군.”
이미 오래 전부터 영능을 금제 당해온 지구였다. 헌데도 아직까지 이런 수준의 유적이 남아있다는 사실부터가 뭔가 범상치 않았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야겠지?”
유태진은 손을 뻗어 위상공간의 표면을 뒤틀었다. 그러자 다른 차원의 위상공간과 현실을 잇는 접점이 타원 형태로 생겨났다.
그 면적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한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서슴없이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저 위상공간 안에 무엇이 숨겨져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음?”
들어선 순간, 유태진은 살짝 놀란 얼굴이 되고 말았다. 위상공간이라 함은 흔히 현실공간의 반대되는 위상을 말함이었다.
그렇기에 대부분 현실과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게 대부분인데, 이곳은 판이할 정도로 달라 보였다.
위상공간 내부는 꽃과 수풀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사이로 유태진조차 처음 보는 환상종들도 더러 보였다.
환상종이란 전설이나 신화에서 등장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종들을 일컫는 의미였다. 설마 유태진도 이런 곳에서 환상종을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역시··· 평범한 위상 공간은 아니라는 건가?”
스톤헨지의 이면에 이런 곳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이건 위상공간이란 차원을 넘어섰다. 이건 이면에 숨겨진 또 하나의 작은 세계였다.
이미 지구에서 오래 전에 잊혀진 신화와 환상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낯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이곳은 아바론, 오래전에 봉인되었던 신의 성지니까.”
“뭣!?”
깜짝 놀란 유태진이 경계 태세를 취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설마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자가 있을 줄이야.
하지만 상대방은 그를 적대할 의사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유태진을 위아래로 한 차례 훑어본 사내는 툭 던지듯 물었다.
“외부인이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무려 527년 만이군. 혹시 멀린이 보냈나?”
유태진은 상대방의 입에서 멀린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멀린이 보내서 온 건 맞는데··· 이곳이 아바론이라고? 그리고 봉인되었던 성지?”
“···역시 그렇군. 그 빌어먹을 작자가 아무것도 말 안 해주고 보낸 거였나?”
유태진의 던진 질문에서 뭔가를 깨달은 사내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어쩔 수 없지. 이제부터 내 뒤를 잘 따라와. 멀린 그 작자가 당신에게 해주지 않은 이야기를 알려줄 테니까.
“그러지.”
유태진은 앞서 걸어가는 사내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낯선 사내였지만, 멀린과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 걸로 보아 크게 경계할 필요는 없을 듯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저 사내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도 대충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군, 지금 이 자의 육체는 이면의 위상과 동화된 거나 다름없어. 그래서 내가 감지하지 못했던 거였나?’
쉽게 말하자면, 정물화 속에 그려진 물체와 다름없는 상태라는 뜻이었다. 저 사내는 위상 공간의 일부나 다름없어서, 유태진의 기감조차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 원리가 파악된 이상, 감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건 좀 놀랍군. 현경 급의 고수라니. 영능이 봉인된 지구에 이 정도의 강자가 숨어 있었다고?’
상대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게 된 순간, 유태진은 사내의 격이 어느 정도인지를 깨닫고는 내심 경악하고 말았다.
‘지구에도 은거고수 같은 자들이 있다는 건가?’
그렇지만 아직 단정 지을 순 없었다. 자신이 본 건 눈앞의 사내 하나뿐이었고, 이런 자가 또 있으란 법은 없으니까.
연합에서도 그 수가 많지 않다는 그랜드 마스터 급의 강자가 그리 흔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바론에 봉인된 신의 성지라.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꽤 많은 모양이야, 이 지구도.’
사내를 뒤따라간 끝에 보게 된 것은 거대한 성이었다. 성벽부터 해서 그 안의 건물들 모든 것이 희디흰 백악의 성. 그것이 주변 풍경과 어우러지면서 정말 아름다운 정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런 곳에 성이라니···.”
유태진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위상공간에 신화의 환상이 간직된 작은 세상이 존재하는 것도 모자라, 성까지 갖춰져 있을 줄이야.
그런 유태진의 반응을 들은 사내가 등 뒤를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너도 아바론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이미 짐작했을 텐데, 아닌가?”
사내의 말 대로였다. 이곳의 이름이 아바론이고, 성까지 있다면 생각나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럼 저 성의 이름이 혹시 카멜롯 맞나?”
“그래, 저곳이 바로 카멜롯이지.”
이쯤 되니 아서 왕의 전설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눈앞에 카멜롯이라는 성의 실물까지 등장하고 나니, 허구의 산물로 여겨졌던 그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아졌다.
‘아니, 그러면 날 이곳으로 보낸 멀린은 뭐지? 그냥 자칭한 게 아니라 정말로 그 멀린이 맞다는 건가?’
이젠 멀린의 정체조차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다른 천외오천들처럼 코스프레 컨셉으로 멀린을 흉내 내는 줄 알고 있었다.
헌데 이런 비밀스런 곳까지 알고 있을 정도면··· 그가 실제 전설에 등장하던 진짜 멀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설명은 거기서 해주지.”
유태진은 사내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섰다.
카멜롯 성은 그 내부도 고풍스러우면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카멜롯의 전설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1500년 이상 전에 지어진 건축물일 텐데도, 그 완성도나 예술적인 감각은 시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건축 기술이나 예술적인 감각이 시대의 차이를 훨씬 뛰어넘었어. 영능을 잃지 않은 그 시대엔 이런 게 가능했다는 건가?’
어느덧 응접실에 이르렀다. 외부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장소에 도착하자 그는 유태진에게 앉기를 권했다.
원탁 테이블을 중심으로 배치된 의자들 중 하나씩 골라 앉은 두 사람은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갔다.
“일단 내 소개부터 하지. 내 이름은 랜슬롯, 랜슬롯 듀 락이다.”
“랜슬롯이라면··· 아서왕의 전설에 나오는 호수의 기사!?”
“그래, 맞아. 내가 바로 그 호수의 기사지.”
담담할 정도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사내의 모습에 유태진은 경악보다는 당혹의 감정이 앞섰다.
쓰고 있던 두건을 벗은 사내의 얼굴은 2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젊은 모습이었다.
“내가 알기로 아서왕의 전설은 무려 1500년 전이라던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건가?”
“뭐,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래 살긴 했지. 제대로 세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마 그쯤은 된 것 같군.”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그 말에 유태진이 물었다.
“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어.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는 거지?”
“너희들에겐 전설로 알려진 아바론과 카멜롯도 이렇게 실제하고 있는데 내가 1500년 이상 살아온 게 이상할 리 없잖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랜슬롯의 그 말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태진은 현경을 넘어 생사경까지 도달해 봤던 존재였다. 저 말이 얼마나 허튼 소리인지는 누구보다도 그가 더 잘 알았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방의 허튼 소리에 반박했다.
“웃기는 소리! 인간의 최대 수명을 내가 모를 것 같나? 나도 경지에 든 사람이다. 그런 허튼 소린 집어치워!”
인간이 환골탈태로 화경에 접어들면 300세에 버금가는 수명을 얻게 되고, 현경에 이르면 500년에서 600년의 세월을 살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생사경은 이미 반선의 경지로 사실상 죽음을 초월한 존재가 되지만, 대략 700세가 되는 기점으로 섭리에 따라 지상을 떠나야 했다.
그것이 세상의 순리였다. 헌데 1500년이라고? 그건 절대 불가능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애당초 기본 수명부터가 격이 다른 이종족이어야 가능했다.
하지만 랜슬롯에게서 느껴지는 본연의 영적 기실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한 말이 거짓인 걸까? 이에 랜슬롯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 잘 알고 있지. 너도 나 못지않은 강자라는 걸 말이야.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막대한 존재감이 느껴지더군. 하지만 네가 아는 상식이 전부는 아니지. 예외란 어디든 존재하는 법이니까.”
“···그 예외가 바로 너다, 이건가?”
“그렇지. 나로선 원치 않던 예외지만 말이야. 그 덕분에 난 수명을 한참 뛰어넘는 긴 세월동안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지.”
“유배라고?”
생각지도 못한 표현에 유태진이 되묻자, 랜슬롯을 입매를 비틀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래, 유배지. 아주 몸서리칠 만큼 끔찍한···.”
“······.”
“답을 이야기 해 주기 전에 한 가지만 묻지. 너는 여기까지 들오는 동안 사람의 기척을 느껴 봤나?”
“전혀. 이렇게 큰 성에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었지.”
유태진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넓은 성 안에 느껴지는 사람이라고는 랜슬롯 혼자뿐이라니.
전설이 사실이라면 원탁의 기사들이나 그들의 수하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하지 않는가.
물론 전설에서는 나라가 패망하면서 대부분 죽음을 맞이했다곤 하나, 랜슬롯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걸 보면 다른 이들도 살아있지 말란 법은 없었다.
“왜 그런지 아나?”
쓰디쓴 감정이 베어 나오는 그 모습에 유태진은 그 사정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너 뿐인 건가?”
“그래, 다 죽었기 때문이야. 1500년 전 브리튼이 멸망하던 그때, 다들 죽어버렸지. 카멜롯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나와 멀린 단 둘 뿐. 그 이후로 난 이곳에서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지. 여긴 내 수명을 구차할 정도로 길게 유지시켜 주거든.”
아서왕의 전설에서 나오는 마지막 내용이 브리튼의 멸망이었던 만큼, 실제 결과가 어땠을지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납득되질 않았다. 눈앞의 랜슬롯만 하더라도 무려 천외오천과 동급이라는 그랜드 급의 절대강자였다.
이런 강자가 원탁의 일원이었는데도 브리튼의 멸망을 왜 막지 못했고, 전부 죽게 되었단 말인가?
유태진은 떠오르는 의문을 하나씩 차근차근 묻기로 했다.
“브리튼의 멸망이 당신 정도의 강자도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나?”
“나? 나 따윈 별 거 아니었지. 이곳에서야 대단했을지 몰라도,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개 조무래기 수준이었으니까. 너도 우주로 나가봤을 테니 잘 알 텐데? 인베이더들과 싸워보니 어떻던가. 상대할 만하던가?”
“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