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75화 (276/448)

11권-25화

* * *

세계 정상들의 성명 발표 후 보름 뒤, 세화 그룹은 충격적인 신제품을 출시하게 되었다.

그 이름은 모듈 밴더. 스마트폰을 몇 차원 뛰어넘는 새로운 종합통신기기였다.

처음에는 과대광고인줄 알았던 사람들은 언론매체들을 통해 그 실체를 알고 나서는 가히 폭발적이다 싶을 만큼 열광하게 되었다.

물론 가격은 최신형 스마트폰의 2배가량 비쌌지만, 스마트폰과 모듈 밴더의 기능과 성능차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만 했다.

평소 IT 분야에 관심이 많던 김신영도 마찬가지였다. 신형 스마트폰이 나올 때마다 새로 바꿀 만큼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도 모듈밴더가 시판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적금까지 깨가면서 구입한 것이다.

사자마자 몇 가지 기능을 사용해본 김신영은 감동의 물결에 젖어들었다. 이건 그야말로 혁신 그 자체였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친구에게 달려갔다.

“야, 이번에 세화 그룹에서 나왔던 모듈 밴더 사용해 봤어?”

“그건 또 뭐야? 무슨 신형 스마트 폰이라도 나온 거야?”

“이런 시대에 뒤떨어진 원시인 같은 놈을 보게? 넌 무슨 산골 오지에 틀어박혀 있다 왔냐? 어떻게 모듈 밴더를 몰라? 온 세상이 그것 때문에 난리인데 말이야.”

“임마, 모르니까 묻지. 대체 뭔데? 뭔데 이 난리야?”

“하긴 넌 IT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 모바일 게임이 싫다고 무조건 콘솔게임만 붙잡고 집에 틀어박혀 사는 녀석은 이 세상에 너밖에 없을 거다.”

친구에게 그렇게 핀잔을 준 김신영은 자신의 손목을 자랑스럽게 내밀어보였다. 거기에는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을 한 가느다란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그게 뭔데?”

“이게 바로 모듈밴더다. 홀로그램기술이 적용된 새로운 통신기기잖아.”

“뭐야, 그게 스마트 폰이었어?”

친구가 깜작 놀라서 묻자, 김신영은 이를 단호하게 부정하며 말했다.

“아니, 스마트 폰이 아니라고! 이것 봐. 손목에 차는 팔찌 형태잖아.”

“허, 그러네. 이건 무슨 스마트 워치 같이 생겼네.”

“야, 스마트 워치 따위하고 비교하지 마라. 내 모듈 밴더를 모욕하는 소리니까.”

그는 무지한 친구 녀석을 위해 모듈 밴더가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기로 했다.

“팔찌 중앙에 있는 이 손톱만한 액정을 누르면 말이야. 바로 이렇게 되지.”

김신영이 팔찌 한가운데에 있는 손톱만한 크기의 액정을 누르자, 눈앞에 홀로그램 창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을 본 친구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헉! 뭐야? 홀로그램 창이 튀어나와?”

“그때 발표회 때 나왔잖아. 홀로그램 기술. 그게 사용된 거야.”

“이게 벌써 상용화가 되었다고?”

친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발표회를 보긴 했었지만, 그냥 실험실 개발 단계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헌데 이게 벌써 시판상용화까지 되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이걸로 정말 많은 걸 할 수 있지. 이게 대단한 건 홀로그램뿐만이 아니라고.”

김신영은 그렇게 자랑하고는 대뜸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레이나, 나와 봐.”

“뭐, 누구?”

갑자기 뜬금없이 누굴 부르나 했는데, 갑자기 뭔가가 또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홀로그램으로 전개된 스크린이 아니었다. 홀로그램 자체로 어떤 또렷한 형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길게 늘어진 금발에 푸른 눈동자, 그리고 잘빠진 오피스 룩을 입고 있는 금발 미녀가 갑자기 허공에 출현한 것이다.

김신영의 친구가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이···이분은 누구시냐? 너 분명 엊그제까지도 여친 없는 만년 솔로였잖아. 그래, 맞아. 너 같은 녀석에게 금발 미녀 여친이 있을 리가 없어! 설마 며칠 사이에 사귀게 되었다는 헛소리를 할 생각은 아니겠지?”

“이 자식이 같은 솔로 주제에 아주 급소를 푹푹 찌르네! 그래, 여친 아니다. 내 전용 인공지능 비서지. 이름도 내가 붙였어. 정말 쩔지?”

여친 없는 만년 솔로라는 친구의 통렬한 지적에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만의 비서를 자랑하면서 아픈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홀로그램으로 형상화 된 레이나가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신영님의 비서 레이나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 아, 예! 전 신영이 녀석의 친구 이문수라고 합니다. 저도 반갑네요, 레이나 씨.”

“예, 이문수 씨.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이문수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인공지능 비서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저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건, 진짜 사람 같네.”

사람과 다름없는 생김새에, 목소리의 톤과 억양까지 실제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표정 변화조차 자연스러워서, 만일 레이나의 머리 위에 AI라는 홀로그램 글자가 떠 있지 않았다면 진짜 사람과 착각할 정도로 현실감 높았다.

홀로그램 기술도 놀라운데, 이젠 인공지능마저 거의 사람과 다름없다니··· 참으로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아주 편해. 내가 해야 할 일도 여러모로 보조해 줄 수 있기도 하고. 심지어 이거 유질량 홀로그램이라고. 무거운 물건을 들 수는 없지만, 1kg이내의 물건이라면 들어 올릴 수도 있어.”

그 사실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레이나는 허리를 굽혀 거리에 떨어져 있는 찌그러진 음료수 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정말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걸어가 근처의 분리수거함에 집어넣었다.

저걸 두고 누가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인공지능 비서라고 생각하겠는가? 진짜 사람과 똑같았다.

“미쳤네. 이런 게 구현 가능하다고? 진짜로 KM사는 외계인이었구나.”

그제야 새삼 실감이 들었다. 몇 주 전에 세계 정상들이 모여서 발표했던 사실에 대해 솔직히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오늘 모듈밴더를 보고나니 이건 진짜로 외계인이 아니고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지구의 과학기술로는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오버 테크놀러지였다.

“이게 전부가 아니야. 심지어 외국어도 실시간으로 번역해 준다고. 눈에 보이는 글자나 문장을 증강현실 형태로 실시간으로 번역해 보여주고, 대화도 레이나가 즉각적으로 번역해 들려줘.”

“허, 그럼 이제 번역가들은 다 망했네. 통역도 그렇고.”

“그렇지! 게다가 이제 그놈의 빌어먹을 우경화수월 발 번역은 안 봐도 된다는 게 너무 좋아! 이젠 그냥 원서를 직수입으로 사서 봐야지. 영화도 더 이상 자막 나오는 건 필요 없어!”

그동안 엉터리 번역에 사무쳤던 모양인지, 김신영은 그렇게 격한 기세로 말을 토해냈다. 오역 때문에 영화나 만화, 소설 등의 내용이 이해되지 않은 경우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오역사태를 만든 해당 번역가를 자르지 않는 수입사들의 행태를 보면, 무슨 인맥이나 비리 같은 뒷거래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무튼 나도 이건 꼭 사야겠다.”

“지금 가서 바로 사. 안 그래도 살 사람 넘쳐서 물량 부족할지도 모르는데. 이번에 못 사면 두고두고 후회한다.”

“그래. 지금 바로 달려가마.”

이문수는 방금 친구 옆에서 웃고 있던 인공지능비서 레이나의 아름다운 자태를 떠올리면서 그 즉시 모듈밴더를 구입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 * *

모듈밴더의 등장은 세상의 일상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다. 그렇게 되기까지 불과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사양직종이 된 것은 바로 번역가와 통역가였다. 모듈밴더의 인공지능이 그들보다 더 완벽하게 번역을 해주는데, 굳이 그들을 비싼 돈 줘가며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애완동물 관련 사업이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결혼에 연연하지 않고 혼자 사는 1인가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은 본디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애완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최근 부쩍 늘어났다.

하지만 이제 이것도 하루아침에 사양산업이 되고 말았다. 바로 모듈밴더 때문이었다.

사람과 다름없는 감성을 지닌 인공지능 비서가 자신을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는데, 더 이상 외로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물론 개중에는 사람보다 동물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듈밴더는 이마저도 해결해 주었다.

이제 더 이상 애완동물이 필요가 없었다. KM사가 만든 애완동물 구현 앱을 다운로드 받으면 자신이 원하는 어떤 동물이든 그대로 구현이 가능했으니까.

게다가 먹이를 줄 필요도 없고, 싸지도 않으며, 심지어 무분별하게 아무에게나 사납게 으르렁대거나 물지도 않는다. 이보다 더 좋은 애완동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병에 걸릴 일도 없고, 예방접종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심지어 털을 날리지도 않고 병원균 하나 없이 청결하기까지 하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개중에는 실제 살아있는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애완동물의 수발을 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제 거리에 나가보면 실제 살아있는 애완동물보다는, 유질량 홀로그램으로 구현화 된 애완동물의 수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모듈밴더가 바꾼 것들은 그 외에도 많았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음주운전이나 대리운전이었다.

유질량 홀로그램으로 비서를 구현할 수 있게 된 이상, 음주 때문에 운전할 상황이 못 되더라도 인공지능 비서에게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공지능 비서는 현재 자동차 회사들이 연구 중인 자율주행 자동차의 시스템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성능이라서, 그 어떤 사고도 일으키지 않았다. 아르탈 행성 연합에서는 아주 오랫동안 사용되면서 다양한 검증까지 거친 주행 데이터가 입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 지구의 자율주행 시스템과 비교한다면 말 그대로 봉황과 닭을 비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더 이상 손님을 받지 못하게 된 대리운전기사들만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이것도 문명이 발전할수록 생겨날 수밖에 없는 시대의 변화들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사라진 직종 때문에 시위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변화에 순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KM사의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기존의 원자력 발전소에 핵융합 발전 시스템을 제공함으로서 시민들이 값싼 전기를 거의 무제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준 것이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핵융합 발전 시스템이 아니었다. 여기에 추가로 도입한 에너지 원격무선송출 시스템이었다. 각 개인에게 매겨지는 특정 코드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전력을 전송받을 수 있는 손실률 0.01%의 새로운 전력 공급망 시스템인 것이다.

사람들이 모듈 밴더로 상시 홀로그램을 구현하면서도 배터리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헌데 이 시스템은 본의 아니게도 자동차 시장까지 매우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전기만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다면 석유자동차가 전기자동차에 비해 우위를 차지할 요소가 전혀 없어서였다. 게다가 전기자동차는 친환경적이기도 했다.

환경운동가들로서는 두 손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파급력이 상상 이상으로 크군. 우리가 일부로 의도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여러 직종과 산업들이 몰락한다는 소식에, 유태진은 조금 안타깝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리스티는 이에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과학이 발전하면 우리가 아니어도 조만간 자연스럽게 도태될 산업이었어요. 괜히 죄책감 느끼실 필요 없어요.”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석유산업 쪽은 좀 타격이 커. 애당초 지구가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경제였던 만큼 더더욱 그렇지.”

석유사업은 현대의 산업경제를 지탱해준 기반이라 할 수 있었다. 헌데 이것이 핵융합과 원격무선송출시스템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하자, 세계 경제가 위태롭게 요동치고 있었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칫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정 안되면 우리가 인수해 버리죠. 물론 적당한 헐값에 넘겨받는 조건으로요. 그럼 문제 없겠죠?”

“뭐, 그렇지.”

석유산업은 기업들 중에서도 가히 천문학적인 기업 가치를 부여받고 있었다. 특히 세계적인 석유기업인 아람코 같은 회사는 시가총액만 수천조원에 달했을 만큼 대단했다.

물론 지금이야 걷잡을 수 없이 폭락하고 있다지만, 그 무형적 가치가 전부 날아가려면 아무래도 조금 시간이 걸릴 거라 보았다.

하지만 리스티는 그 가치를 다 쳐줄 생각이 없었다.

“전 그 돈을 다 주고 살 생각 없어요. 그냥 놔두면 망할 회사인데 뭐하러 많은 돈을 줘요? 그냥 망하게 놔두지. 정 안되면 석유사업을 대체할만한 기술이나 회사를 만들어서 경제를 다시 안정시키면 되죠.”

“···그렇구나.”

유태진은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역시 리스티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스케일이 차원이 달랐다. 우주적인 기업들을 소유한 만큼 사업에 있어서도 철두철미하고 계획적이었다.

이럴 땐 흥미에만 꽂혀 일을 벌이던 연구자적인 면모하고는 전혀 달라 보였다.

“아무튼 이 문제에 대해서는 너에게 맡기마. 난 좀 가볼 데가 있으니까. 당분간은 일을 하기 힘들 것 같아.”

“가다니요? 이 와중에 어디로요?”

갑자기 자리를 떠야 한다는 그 말에 리스티가 두 눈을 부릅뜨며 따지고 들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이걸 전부 자신에게 떠맡기고 도망친다는 소리로 들려서였다.

“영국. 솔즈베리 평원에 갈 일이 생겼어.”

“왜죠?”

“멀린이 그러더군. 지구에 가면 스톤헨지에 방문하라고.”

“스톤헨지?”

“그곳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했다. 그 녀석 말대로라면 오래 전 옛날, 지구에는 영능이 존재했었다더군. 그런데 지금은 지구인들 중 어느 누구도 영능을 사용할 수 있는 이가 없어. 멀린이 준 단서가 사실이라면 아무래도 그 비밀이 그곳에 있는 모양이야.”

어지간한 일이었다면 그냥 무시했을 테지만, 천외오천 중 일인인 멀린의 말이었다. 심지어 지구의 영능과 관련된 만큼,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사안이 너무나 중요해 보였다.

사정을 알게 된 리스티도 하는 수 없다는 듯 체념조로 허락하고 말았다.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다녀오세요.”

“그래, 되도록 빨리 돌아오도록 하마.”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뜨려던 그때, 유태진의 등 뒤로 리스티의 경고성 엄포가 뒤따랐다.

“아저씨, 혹시라도 일부러 늦으면 저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유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곳을 재빨리 벗어났다. 그냥 말만 앞서는 녀석이 아닌 만큼, 조금만 늦으면 영국까지 쫒아오고도 남을 것이다.

“스톤헨지라··· 그곳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거지?”

그는 작게 중얼거리면서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리곤 어기비행술로 영국이 존재하는 방향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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