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24화
유태진이 빙긋 웃으면서 조부에게 감상을 물었다.
“며칠 사이에 세계 최대의 기업이 되신 소감은요?”
“이젠 별 감흥도 없더구나. 연합이란 곳의 기술을 가장 먼저 도입한단 이유만으로 이렇게 뛰어버리니 키워내는 성취감이 없어.”
자그마하던 세화상회를 세화 그룹으로까지 키워낸 유문택 회장다운 말이었다. 툴툴거리는 조부의 모습에 유태진은 평소의 점잖던 태도와 너무 달라 웃고 말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조부가 의욕을 잃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좀 더 멀리 생각해 보세요. 이제 세화 그룹도 지구에만 국한될 게 아니라, 저 우주로 나가서 성계의 대기업들과 경쟁을 해봐야지요.”
“···그렇구나. 저 넓은 우주에도 우리가 모르던 수많은 기업들이 있었지. 그동안 내가 너무 좁은 우물에만 갇혀 있었어.”
유태진의 그 말을 듣고 난 유문택 회장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마냥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눈빛이었다.
그리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이가 들어 쭈글쭈글해졌지만, 그 의욕만큼은 젊은이들 못지않았다.
“그래, 손주야. 나도 이제 새로운 목표를 찾은 것 같구나. 태진이 다 네 덕분이다.”
그 덕분일까? 유문택 회장의 얼굴은 이전보다 10년은 더 젊어 보였다. 하긴 이제 연합의 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면, 지구인들의 수명도 대폭 늘어날 터.
그렇게 보면 유문택 회장의 남은 수명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보다 오히려 더 길지도 모른다.
‘하긴 앞으로 한 100년 이상 더 사실 테니 그 정도 목표쯤은 갖고 사셔도 괜찮겠지.’
새삼 의욕에 불타오르는 조부의 모습을 보면서 유태진은 픽 웃고 말았다.
* * *
전 세계에 지구연방의 성립을 선포한 순간부터, 세화그룹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준비는 이전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동안 준비해온 것들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말 지긋지긋하군. 이렇게까지 고생할 줄은 정말 몰랐다.”
“예, 쉽진 않았죠.”
유태진이 푸념처럼 내뱉은 그 말에 리스티도 공감한다는 얼굴로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지구의 설비를 기준으로 연합의 기술을 적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 기술들을 설비에 적용할 수 있는 지식과 실력을 갖춘 사람은 이곳에서 유태진과 리스티 단 둘 뿐이어서 더욱 그러했다.
듀렌 박사라도 있었다면 좀 더 편했을 테지만, 그는 지금 전 세계에서 모인 과학자들을 상대로 교육을 진행하느라 여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가진 지식의 깊이는 리스티나 유태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연합의 석학에 비견되는 만큼 그들에게 연합의 기초 지식들을 가르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생도 이제 다 끝났다. 설비는 다 갖춰졌으니까.”
그렇게 내뱉는 유태진의 눈앞에는 거대한 기계 설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공장 규모보다 더 큰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마더 머신 메인 프레임]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지구의 3D프린터와 비슷했지만, 이건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제조하고자 하는 물건의 설계도를 입력하고, 그에 필요한 재료를 투입하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형태 그대로 생산이 가능한 그런 제조기기였다.
물론 연합의 최신형에 비한다면 매우 조악한 수준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어지간한 물건은 못 만드는 게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지구에 전수해줄 기술에 관련된 물건들을 제조하는 데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하지만 제아무리 구형이라 해도 이걸 만들기까지 유태진과 리스티는 적잖은 노고를 쏟아야 했다. 왜냐면 연합에서 만드는 방식과 똑같이 제조할 경우, 지구인들 능력으로는 재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구에서 구할 수 있는 물질과 장비만으로도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와 재료부분에서 많은 부분을 독자적으로 대체해야 했다.
“다음에 또 이렇게 하라면 나 그만둘래요. 차라리 그냥 평범하게 연구를 하는 게 낫지, 하위 문명에 맞게 어레인지 하는 건 너무 피곤하다고요. 재미도 없고.”
“그래, 그래. 이번처럼 하는 건 이걸로 끝이야. 나머지는 이곳 연구자들에게 맡겨야지.”
유태진은 힘들다고 칭얼대는 리스티를 달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도 리스티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에 알지 못하던 새로운 무언가를 연구하는 것을 좋아할 뿐, 기존의 것을 다시 재해석해서 적용하는 일에 대해선 별반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게 완성된 이상 그녀도 흥미 없는 일에 매달려 있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위이이잉!
마더 머신 메인 프레임에서 작은 가동 소리와 함께 곧 무언가가 완성되어 튀어나왔다. 그것은 작은 팔찌 형태의 물건이었다.
“음, 일단 외형은 그럴 듯하게 만들어 졌네.”
“문제는 성능이죠.”
팔찌를 들어 확인하는 유태진에게 그렇게 내뱉은 리스티는 그와 함께 몇 가지 성능 테스트에 들어갔다.
그들이 마더 머신에서 생산해낸 물건은 다름 아닌 모듈 밴더였다.
물론 성능 자체로는 연합의 기본형 밴더 만도 못했지만, 지구에서는 가히 파격이라 할 만한 물건일 것이다.
전에 발표회 때 선보였던 홀로그램 기능에, 현재 스마트폰이 사용할 수 있는 통신, 인터넷 등 모든 것들을 다 집어넣었으니까. 그리고 지구의 인공지능을 월등히 앞선 바텀-업 인공지능 AI는 사람들의 일상은 물론 다양한 업무 방면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여기에 사용자의 반응이나, 주변의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고성능의 센서가 내장되었다. 여기에 AI의 판단과 분석력까지 더해지면 대응하지 못할 일이 거의 없게 될 것이다.
“이거 하나 때문에 파산할 지구의 회사들이 엄청나게 늘어나겠네요.”
“디스플레이는 물론 컴퓨터와 스마트폰 관련 회사들까지 아주 많겠지. 하지만 그걸 다 우리가 책임질 수는 없는 일이잖아.”
유태진은 리스티의 우려에 그렇게 말했지만, 그 회사들을 무작정 망하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우선은 위기에 처할 거라 예상되는 회사들의 명단을 확보한 뒤, 그들 중에서 일부를 선별하기로 했다. 지독한 악덕기업이거나 혹은 부실기업들을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선별한 회사들에게는 일단 부품의 위탁생산을 맡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차차 기술을 전수해 나가면서, 독자적으로 연구 생산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지원을 단계적으로 진행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둘 밴더 뿐만 아니라, 지구에 전수할 모든 기술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런 식으로 기술을 전하려면 2년이란 시간조차 턱없이 부족할 테지만, 그런 부분들도 다 감안하고 짠 계획이었다. 현재 듀렌 박사가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이 기초적인 학습을 끝내고 각 회사의 연구진과 합류하게 되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테니까.
‘적어도 1년 안에 기초적인 기술은 습득할 수 있어야 해. 그 전까지는 우리 쪽에서 생산에 전념할 수밖에.’
유태진은 우선 1년의 시간을 기술 습득 기간으로 잡았다. 그리고 나머지 1년은 그 기술들을 바탕으로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물자들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할 생각이었다.
솔직히 말해 유태진 입장에서 이런 진행 방식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해야 할 일도 많은, 무척이나 번거로운 짓이었다.
단순히 2년 뒤에 있을 인베이더의 침공만 생각한다면 적당히 싸울 수 있는 함대만 만들어 줘도 충분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구가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이루려면 이런 과정은 반드시 필요했다. 완성된 전함 몇 척만 덜렁 던져 줘봐야, 그것을 분해하고 연구해석해서 완전히 자신들의 기술로 소화하기까지는 최소한으로 잡는다 해도 수십 년 이상의 긴 세월이 걸릴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프로토 타입에는 아무 문제없네요. 이대로 찍어내도 될 것 같은데요?”
지구인용 모듈 밴더에 대한 검수작업을 마친 리스티가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래? 그럼 일단 양산 설비부터 찍어내도록 하자. 그게 순서겠지.”
그들이 제작한 마더 머신은 어디까지나 기반 생산설비들을 제조하기 위한 물건이었다. 앞으로 생산하게 될 모듈밴더 같은 완성품을 직접 찍어내는 경우는 프로토 타입을 제조할 때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이게 그 완성품이라고?”
“예, 첫 시제품이죠.”
유태진에게 지구인용 모듈밴더 프로토 타입을 받아본 유문택 회장은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상태를 확인했다. 이미 손자에게 연합용 모듈밴더에 대한 사용법을 숙지해둔 상황이었다.
그보다 훨씬 수준이 낮은 지구용 모듈밴더를 사용하는 것은 더 간단하고 쉬웠다. 하지만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었다.
“그런데 유질량 홀로그램이라니. 이거 연합에서 생산되는 밴더에도 적용되는 기술이던데, 이런 걸 도입해도 괜찮은 게냐?”
연합이 제공하기로 한 것은 어디까지나 현재 사용되지 않는 구시대 기술들이었다. 유질량 홀로그램은 현재에도 사용되는 기술인만큼, 이걸 지구에 이전해줘도 괜찮으냐는 말이었다.
할아버지의 걱정스런 그 말에, 유태진은 상관없다며 말했다.
“유질량 홀로그램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니죠. 연합에서 사용하는 유질량 홀로그램은 그보다 몇 차원 높은 기술입니다. 굳이 지구의 기술 중에서 비슷한 걸 찾자면 영화관의 4D에 가깝다고 해야겠군요.”
4D란 영상에 입체감을 더한 3D를 넘어, 상영관과 좌석에 설치한 여러 장비를 통해서 역동적인 장면이 나올 때마다 좌석이 흔들리거나 바람, 눈, 비, 향기 등의 특수효과를 부여하는 영화 상영 방식이었다.
하지만 특수효과라고 하기엔 여러모로 조잡했다. 영화 속에서 물방울이 날아들거나 어떤 향기가 나는 장면을 실제로 물을 뿌리거나 준비된 향수를 뿌려서 체감하게 하는 원시적인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연합의 최신 유질량 홀로그램 기술은 그와 차원이 달랐다. 실제로 인간의 감각 자체에 간섭함으로서 가상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실제와 다름없이 체감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건 즉···가상현실이나 다름없는 몰입감이나, 현실감을 재현할 수 있다는 말이구나.”
“예.”
가상현실과 다른 점은 그것이 현실 생활 중에서 재현된다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인간의 오감까지 포함된 홀로그램 형 증강현실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이것은 사용자 사익을 위해 악용될 여지가 큰 만큼, 연합에서는 모듈밴더에 기본적으로 탑재된 AI를 통해서 범죄에 사용되지 않도록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아.”
유문택 회장은 연합의 터무니없는 기술 수준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현재의 모듈 밴더의 성능에 충분히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이 제품이 세상에 출시되어 나간다면 엄청난 파급력을 만들어낼 것이다. 스마트폰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완 비교도 안 되는 변화가 찾아올 게 분명했다.
유문택 회장이 다시 물음을 던졌다.
“그럼 양산 준비는 다 끝난 게냐?”
“예, 말씀만 하시면 언제든지 가능하지요.”
모든 준비를 끝내놨다는 그 말에 유문택 회장은 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결정을 내렸다.
“그럼 시작하자꾸나. 이제 사람들에게도 슬슬 보여줘야지.”
그날 정상들의 성명발표 이후, 외계 기술에 대한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들이 느끼고 있을 궁금증과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첫 제품만큼은 무엇보다 가장 신속하게 출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도 체감하게 되겠지. 예전과는 다른 시대가 왔음을 말이야.’
연합의 기술을 일상생활에서 접함으로서, 그들도 조금씩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우주에는 지구 이외에도 지성체들이 살고 있는 수많은 행성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정말로 지구를 위협할 수 있는 인베이더 같은 괴물들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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