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08화
그가 자신의 광대와 코를 매만지자, 무언가가 훌렁 벗겨졌다.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특수제작 된 면구가 벗겨진 것이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푸튼 본연의 모습이었다.
“러시아 대통령께서 방문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라고 해야 할까요?”
웃으면서 던진 유태진의 그 말에, 푸튼은 쓴웃음을 지으며 화답했다.
“···짓궂은 농담이오. 이미 당신은 러시아 대통령인 나 못지않은 유명인사가 되었으니 말이오. 오히려 영광이란 말은 이쪽이 해야겠지.”
그렇게 농담을 받은 푸튼 대통령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 우리 러시아의 정보 분석가들 사이에서는 당신에 대해 여러 말들이 돌았소. 최근 외계인 관련 이야기까지 떠돌면서 온갖 가설들이 생겼지. 그 중에서 몇 가지는 당신이 지구를 침공한다는 외계인과 반대 세력에 속하는 외계인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소. 그 외에도 여럿 있었는데··· 당신이 외계인들의 기술을 훔치는 바람에 그것에 분노한 외계인들이 지구로 침공해 오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그 중 하나였소.”
“하하, 그랬군요.”
유태진은 픽 웃고 말았다.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대충 짐작은 했지만, 러시아 대통령인 푸튼의 입을 통해 직접 듣게 되니 색다른 기분이 들어서였다.
“헌데 푸튼 대통령께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도 비슷한 의견이오. 당신이 내놓은 기술들은 현재 지구의 어떤 국가들도 재현이 불가능한 것들이지. 그렇다면 지구 외의 기술이라는 말밖에 더 되겠소? 훔친 거든 아니면 당신이 그 외계인들과 친분이 있든, 뭔가 관련성이 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보오. 아니면 당신 또한 외계인일 수도 있고.”
“혹시 이런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지금 현 인류보다 더 까마득히 오래 전에 살았던 인류가 존재했고, 그때의 문명이 지금보다 더 고도로 발달되었을 경우 말입니다.”
“그럴 리는 없을 거요. 그런 문명이 실제 존재했다면 자그마한 오파츠라도 남아 있을 테고, 러시아 대통령인 내 귀에 들려오지 않을 리 없으니 말이오.”
푸튼 대통령은 아예 단정 짓듯 답했다. 하긴 러시아 대통령 쯤 되면 세상의 이면 속에 숨겨진 사실들에 대해 많이 접했을 터.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것도 납득이 갔다.
“그렇군요. 고대 문명은 농담이고···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좀 전까지와 달리 웃음기를 지운 그 모습에, 푸튼 대통령도 한층 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러시아가 내놓은 예측도 아주 틀린 건 아닙니다. 저와 KM사가 내놓은 기술들은 짐작하신 대로 지구상에 현존했던 것들과는 그 궤를 전혀 달리하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외계인의?”
두 눈을 크게 뜨며 묻는 그에게, 유태진은 일단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이제부터 진짜 자기소개를 하지요. 내 이름은 유태진. 아르탈 행성 연합의 이능관리국 소속 독립함대 인피니티 킹덤의 사령관입니다.”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생소한 이름들의 나열에 푸튼의 얼굴이 경악과 혼란에 휩싸였다.
“아르탈··· 행성 연합? 설마 외계인과 연관이 있었던 게 아니라 당신 본인이 외계인이었소?”
“그런 건 아닙니다. 난 엄연히 지구 태생이니 말입니다. 단지 당신이 말한 외계 행성에서 직위를 얻었을 뿐이죠.”
유태진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푸튼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지금 눈앞에 있는 유태진은 무슨 함대의 사령관이라고 했다. 그 말은 외계 세력 내에서도 비교적 높은 직위에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스스로 지구 출신이라 밝힌 만큼, 어떻게 된 것인지부터 물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외계인과 접촉하게 된 거요?”
“푸튼 대통령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던 대규모 실종 사건을. 그것도 12년 동안 수십 차례 발생했었죠.”
“알고 있소. 전 세계적으로 도합 수십만 명이 실종된 사건이었으니까.”
그 사건은 너무도 유명해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세계 각국이 수년 동안 신경을 곤두세웠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수사를 해도 작은 단서조차 나오지 않아서, 이젠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제가 그 실종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 말은··· 그 실종자들이 바로 외계인들에게 납치되었던 거란 말이오?”
“그런 셈이지요. 그들도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크게 놀라 반응하는 푸튼에게 그렇게 대답해준 유태진은 슬슬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실종된 사람들이 아르탈 행성 연합에 어째서 소환되었으며, 그들이 대적하고 있는 인베이더란 세력이 어떤 놈들인지를.
다 듣고 난 푸튼 대통령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무슨 영화의 내용 같군. 그게 정말 사실이오?”
“믿기 어려운 심정은 이해 갑니다만, 전부 다 사실입니다. KM사가 내놓은 기술들이 그 증거지요. 지구의 과학 수준으로는 최소한 수십, 아니 백년 이상은 지나야 가능한 결과물들이니 말입니다.”
그 말에는 푸튼도 부정하지 못했다. 그 기술들이 그만큼 앞선 것들이 아니었다면 미국에서 떠도는 외계인 설 따윈 그냥 무시해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질문의 방향을 바꿨다.
“그거야 그렇지만··· 한데 그 이능이란 건 어떤 거요?”
“흔히 영화 속에 나오는 초인들을 상상하시면 맞을 겁니다. 요즘 그런 영화들 많을 텐데요. 마블의 어벤저스 같은 거 말입니다. 아주 똑같진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시면 거의 비슷할 겁니다.”
“으음, 그런 게 정말로 현실로 존재한다니··· 혹시 내게도 보여 줄 수 있소?”
푸튼이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고 하자, 유태진은 그 전에 한 가지 당부를 해 두었다.
“뭐, 보여드릴 순 있지만 눈속임이라고 하진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보여 줘도 무슨 마술 같은 취급을 하더군요.”
“알겠소.”
“그럼 간단한 것부터 보여드리죠.”
유태진은 그 즉시 진기를 일으켰다. 그가 기운을 외부로 뻗자 저 멀리 있던 피아노가 서서히 들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어···!?”
“피아노가 저절로 떠오르고 있어?”
푸튼을 경호하던 인물들이 하나같이 경악성을 토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가 들어 올린 것도 아닌데도 피아노가 마치 헬륨 가스가 들어간 풍선처럼 둥실 떠오른 것이다.
혹시 무슨 비밀스런 장치가 되어 있는 것 아닌가 해서 직접 확인해보기도 했지만, 그런 장치 따윈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게 염동력(念動力)이란 것이죠. 초능력 중에서는 꽤 흔한 편입니다만, 그래도 활용하기에 따라선 굉장한 무기가 될 수 있죠.”
물론 지금 유태진이 발휘한 건 염동력이라기보다는 내공에 기반을 둔 허공섭물의 일종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런 사실까진 말하지 않았다. 무공은 아르탈 행성 연합 내에서도 이질적인 부류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드러난 결과물은 염동력과 크게 다를 바 없으니, 이렇게 둘러대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이건 마법이란 겁니다.”
그가 이번에 보여준 것은 진짜 마법이었다. 그가 오른손을 들어 올린 순간, 손끝에서 작은 불길이 치솟았다.
화아악!
그가 손끝을 탁자에 갖다 대자, 나무로 만들어진 탁자 위에 문양이 새겨졌다. 나무 재질의 탁자 표면을 태우면서 어떤 문양이 만들어 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만 봐도 거짓이 아니란 사실을 알겠지요?”
“···확실히 놀랍소.”
푸튼 대통령은 탁자 위의 흔적을 자신의 손으로 매만졌다. 거기에 남아 있는 흔적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손끝에 묻어나오는 그을음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래도 믿기 어려우시다면 더 재밌는 걸 보여드리죠.”
푸튼 대통령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유태진이 먼저 손을 뻗었다. 벼락처럼 뻗은 그의 우수가 검지를 세운 채 푸튼 대통령의 전신 구석구석을 찔러온 것이다.
너무 빠르고 갑작스런 행동이라서 미처 대응할 새조차 없었다.
“이놈!”
“무슨 짓이냐?”
그제야 푸튼 대통령을 경호하던 자들이 깜작 놀라 나섰지만, 그들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새 유태진이 펼친 기막이 그들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 것이다.
“뭐야?”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게 우릴 막고 있어!”
그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장벽으로 가로막힌 느낌이었다. 경호원들 중 일부는 급기야 총까지 꺼내들고 말았다.
탕! 탕탕!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제아무리 총기의 위력이 강하다 해도, 영력이 담기지 않은 총탄 따위가 유태진의 기막을 뚫는다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튕겨 나오는 총탄의 모습에 그들은 또 한 번 경악하고 말았다.
“미친! 총탄이 튕겨 나와?”
“이럴 수가! 초능력이 정말로 있다는 건가?”
좀 전까진 무슨 속임수가 있지 않을까 했던 경호원들은 초능력의 존재를 이젠 믿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었다.
그런 경호원들에게 유태진이 입을 열었다.
“다들 총을 거두고 진정 좀 하시죠.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전 푸튼 대통령을 해할 생각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그래도 여전히 총구를 겨누는 그들의 모습에, 유태진은 다시 한 번 태연히 말했다. 그들이 겨누는 총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모습이었다.
“믿든 말든 당신들에게 달린 일이죠. 전 설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총구를 겨누기 전에 푸튼 대통령부터 살펴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들은 그제야 시선을 옮겨 푸튼 대통령을 살폈다. 푸튼 대통령이 위해를 당한다는 생각에 당황한 나머지, 그가 어떤 상태인지 확인조차 못했던 것이다.
헌데 공격을 당했다고 생각했던 푸튼 대통령은 뜻밖에도 멀쩡해 보였다. 아니, 무언가에 놀란 듯 자신의 두 손과 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이건!?”
“아마 온 몸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울 겁니다.”
유태진이 문득 던진 그 말에, 푸튼 대통령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 말 대로였다. 지금 그의 몸은 전례가 없을 만큼 상쾌한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컨디션이 좋은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가벼웠다.
마치 한창 젊었던 20대의 나이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뭘 어떻게 한 거요? 내 몸이 이렇게 좋아지다니··· 무슨 마약이라도 주입한 건가?”
하지만 푸튼 대통령은 마약을 언급하면서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는 마약에 의해 느끼는 반응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마약이라면 증상이 어떤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그냥 순수하게 당신의 몸 상태가 좋아진 겁니다. 제가 가진 이능으로 당신이 지닌 자잘한 지병이나, 장기에 쌓인 안 좋은 것들을 치료한 거죠. 한번 검진을 받아보면 알 겁니다.”
“고작 손가락으로 몇 번 찌른 걸로···?”
“그러니까 이능인 겁니다. 기존의 상식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도 이해되는 게 없을 테죠.”
“허어···.”
이젠 더 이상 이능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것과, KM사의 기술을 생각하면 믿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 많은 사실을 알게 된 나머지 한숨을 내쉰 푸튼 대통령은 다시금 물음을 던졌다.
“지금까지 들은 게 다 사실이라면··· 당신은 정말로 그 인베이더란 것들로부터 지구를 지킬 생각이오?”
“그러기 위해 제가 돌아온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구가 어느 정도 스스로를 지킬 최소한의 무력을 지닐 수 있도록 지원하러 온 거지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태여선 곤란합니다.”
“···지구권 통합.”
푸튼은 좀 전에 상대가 말했던 조건을 떠올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지구의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수많은 위인과 영웅들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나섰지만, 그 위업을 이룬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상상할 수 없이 거대한 제국은 세웠을지언정, 진정한 세계통일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문명이 발달하고, 무기가 더욱 발전하면서 그 세계통합은 더더욱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고 있는데, 그것이 조건이라니.
암담해하는 그에게 유태진은 딱 부러지게 말했다.
“그게 연합이 제시한 선결 조건입니다. 고작 의사조차 하나로 통일 되지 않은 행성 따윈 아르탈 행성연합도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거지요. 솔직히 저나 지구 출신의 천외오천들이 가진 명성이 아니었다면 연합에서도 지구가 망하든 말든 신경도 안 썼을 겁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푸튼 대통령이 무겁게 입술을 떼었다.
“휴··· 불가능한 일이오. 세계통일이 가당키나 한 거요? 그랬다간 당장 핵전쟁이 벌어질 거요. 그러면 인베이더가 오기도 전에 멸망하겠지. 설령 가능하다 해도 수많은 피를 봐야 할 터. 인류의 절반 이상이 사라질 공산이 크다고 보오.”
무척이나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는 푸튼 대통령에게, 유태진은 조용히 제안을 던졌다.
“물론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푸튼 대통령, 당신만 협력해 준다면 그런 위기 없이도 통합이 가능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