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권-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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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메켈린 스콧라이어 대통령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라온 보고서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말 어리석군. 눈앞의 이득에 이성이 마비되기라도 한 건가? 그는 한국 국적자이기 전에 우리 미국의 명예 시민권자야. 우리가 그의 뒤에 있는 걸 알 텐데도 이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이에 보좌관들 중 누군가가 답했다.
“어떻게든 선점할 수만 있다면 지구의 패권을 단숨에 뒤바꿀 수 있으니 앞뒤 가리지 않겠다는 거겠죠.”
“하긴 잽(Jap)이나, 칭크(Chink)들은 본래 탐욕스러운 놈들이었지. 이럴수록 냉정해야 하는데 말이야.”
인종차별적인 말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 점을 탓하지 못했다. 그만큼 유태진을 노리는 그들의 행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놈들에겐 그가 아직도 일개 한국인으로 생각되나 보지? 중일 두 국가도 문제지만 한국정부의 행태는 정말로 어이가 없군. 자국민을 타국에 팔아먹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현재 한국 정계는 두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문광식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친 진보 여당 인사들과, 그에 사사건건 맞서서 부딪치는 우익 야당이 바로 그들이었다.
보수를 자청하고 있는 우익 야당은 그 근간부터가 친일파로 시작되었던 만큼 친일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번에도 일본에게 사주를 받은 것인지, KM사의 기술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으며 이왕 공유하려면 한국과 가장 인접해 있으면서 일본을 가장 우선해야 한다는 논지를 주장하고 있었다.
반면 오래 전부터 북한 친화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진보 여당은 중국과 매우 가까웠다. 이번에도 중국 쪽으로부터 은밀히 제안을 받은 모양인지, 야당과는 반대로 중국을 기술 공유 대상 국가로 받아들이기 위해 다양하게 손을 쓰고 것이 확인되었다.
물론 국민들에게는 여론을 통해 슬쩍 운을 떼보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미 수면 아래에서는 두 국가들과 수많은 협의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그런 동태들을 죄다 파악하고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굳이 손쓰지 않고 있는 건 유태진이 그런 수작질에 당해줄리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한심한 일입니다. 이미 그는 일개 국가가 관여할 범주를 넘어선 개인입니다. 아니 지구권 국가들 전부를 합쳐도 그의 비중과 비교하면 부족하죠. 그의 국적이 한국으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한국정부가 그에게 관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결국 그 뒷감당은 그들 스스로 치르게 되겠지. 꽤나 뼈아플 거야. 아무튼 우리는 그의 반감을 사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하게. 괜히 밉보였다간 우리 조국이 피해를 보게 될 테니 말이야. 하긴 그가 구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 미합중국도 결국 세계연방에 속한 일개 지역에 지나지 않게 될 테니 결국 국가란 의미도 없어지려나?”
위대한 조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인류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세계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라면 국가의 소멸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래도 착잡한 마음에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있던 메켈린 대통령은 보좌관에게 물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첩보에 의하면 저희와 비슷한 방침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비슷한 방침이라면 일단 방관적인 태세로 지켜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마도 어떤 큰 변화가 있기 전에는 섣불리 나서지 않겠다는 의미겠지.
“하긴 불곰 녀석들도 아무에게나 뻗댈 놈들은 아니지.”
평소 러시아가 주변국들에게 앞뒤 가리지 않고 막나가는 것 같지만, 그것도 다 상대를 봐가면서 하는 짓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미국과 전쟁이 나도 벌써 몇 번이나 났을 것이다.
그때였다. 보좌관이 가진 스마트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받아든 보좌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것을 심상치 않게 여긴 메켈린 대통령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런가?”
“지금 러시아의 고위직 인사가 유태진 씨가 머무는 보육원에 도착했다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메켈린 대통령이 당혹성을 내질렀다.
“뭐야? 그런데 왜 지금에야 보고를 올리는 건가?”
“KGB에서 정보를 철저히 은폐하는 바람에 저희가 눈치 채는 게 늦고 말았습니다.”
“이런!”
러시아 정보단체들이 가진 능력도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었다. 그들이 전력을 집중했다면 제아무리 CIA나 미국의 정보단체들도 그들의 정보은폐를 파악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메켈린 대통령은 질책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와 접촉한 인물은?”
“이번에 새로 부임한 러시아 대사라고 하는데, 확실치가 않습니다. 심지어 한국 정부에서도 이 상황을 모르고 있습니다.”
한국에 파견된 러시아 대사는 아직 임기조차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떤 실책도 저지른 적 없는 인물인데, 그를 대신할 새로운 대사가 부임한다는 것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새로 부임한 대사라는 건 핑계고, 그걸로 정체를 감추려는 모양이군.”
신임 대사라는 신분을 가장한 채 유태진에게 접근한 인물도 보통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철저히 비밀에 붙이진 않았을 테니까.
“CIA에서는? 거기서는 누구로 짐작하고 있나?”
메켈린 대통령이 그렇게 묻자, 보좌관이 방금 전 보고받은 내용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신임 대사의 정체가 바로 푸튼 대통령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뭐!?”
* * *
노을 보육원에 방문한 이들이 차에서 내렸다. 그들의 외형은 전형적인 슬라브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태진은 이곳을 찾은 사내들에게 호위를 받는 한 사내와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유태진 씨. 저는 이번 한국에 파견된 신임 대사인 빅토르 카렐린이라고 합니다.”
“예, 유태진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군요.”
자신을 한국에 파견된 신임 대사라 소개한 빅토르 카렐린과 인사를 나누면서, 유태진은 미심쩍은 사실을 눈치 챘다. 그의 안색이 자연스럽지 않아서였다.
‘신임 대사라. 그런 핑계로 나와 접촉시키기 위해 한국으로 보낸 메신저인가?’
말로는 신임 대사라 했어도 평범한 인물은 결코 아닐 것이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선 그럴 만한 권한과 직분이 있어야 할 테니까.
지금 보이는 이 자의 얼굴만 봐도 그러했다.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기 위해 꽤나 분장에 공을 들인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얼굴이 많이 알려진 인물일 터였다.
어지간한 자라면 그가 분장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 테지만, 유태진의 예리한 눈까지 속이진 못했다.
그래도 일부로 자신을 찾아 한국까지 수고스럽게 와주었으니, 일단 그에 대해선 내색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러시아 대사께서 제게 무슨 용무가 있으신지요? 혹시 저희 KM사의 기술 때문에 오신 겁니까?”
“물론 KM사가 이번에 발표한 기술들은 저희 러시아도 상당히 탐낼만한 기술이긴 합니다만, 그것 때문에 유태진 씨를 찾아온 건 아닙니다. 단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죠.”
“묻고 싶다면 무엇을 말입니까?”
다른 국가들처럼 기술을 요구하기 보다는, 뭔가를 묻고 싶다는 그 말에 유태진은 오히려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이 자는 어디까지 짐작하고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KM사의 행보는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기술들을 여럿 내놓았지요.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앞선 기술인만큼 위화감이 들었습니다. 이런 기술들이 과연 현재 과학력으로 만들어 질수 있는 것들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근본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찾아 조심스럽게 거슬러 올라가보다 보니 믿기 힘들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지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는지요?”
“현재 미 정재계에서는 외계인 침공 설이 떠돌고 있더군요. 그걸 대비한답시고 제법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고요. 처음에는 그냥 우스갯소리쯤으로 치부했지만, 이번에 발표한 세 가지 기술을 확인하면서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외계인 침공설과 KM사의 설립의 근간에는 유태진 씨를 지원하고 있는 로스차일드 가가 연관되었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의문은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유태진은 내심 감탄하고 말았다.
역시 러시아는 러시아였다. 한때 미국과 쌍벽을 이뤘던 강국인 만큼, 아직도 이 정도 저력은 남아 있다는 건가?
거기까지 알아냈다면, 이미 대부분의 사실을 손에 넣은 것과 다름없었다. 너무 허황된 나머지 심증을 확신으로 굳히지 못해 이곳을 직접 찾아온 것이리라.
중국과 일본 등 여러 선진국들도 외계인 운운하는 첩보를 접하게 된 정황을 확인했지만, KM사가 로스차일드 가의 지원 하에 세워지고, 외계인 침공설이 로스차일드 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곳은 단 하나도 없었다.
“혹시 KM사는, 아니 유태진 씨는 정말로 외계인과 연관이 있는 겁니까?”
이어진 빅토르 카렐린의 직설적인 질문에, 유태진은 유쾌한 나머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후후후··· 하하하!”
갑작스런 유태진의 폭소에, 빅토르 카렐린이 당혹을 금치 못했다.
“으음, 물론 저도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할 만큼 이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다시 묻겠습니다. 대체 당신과 소문의 외계인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물론 그도 자신을 앞에 두고 웃는 유태진의 모습에 불쾌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손님을, 그것도 러시아의 대사를 앞두고 이렇듯 웃어대는 건 너무도 무례한 행위였지만, 그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은 건 방금 전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듣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곧 웃음을 그친 유태진이 사죄의 말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 이거 생각지 못한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대사. 하지만 비웃을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다만 러시아가 너무 훌륭하게 핵심을 꿰뚫어봤기에 놀라서 웃었던 겁니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그밖에 여러 나라들도 우리 KM사가 발표한 신기술이란 떡밥에 끌려 탐욕만 드러내고 있는데, 뜻밖에도 러시아는 이 사태의 본질을 보고 계시군요.”
“본질이라면?”
빅토르 카렐린은 자신과 정보부의 분석이 들어맞았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유태진의 말에, 그 전율은 곧 당혹감으로 변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진짜 신분으로 이야기 하시죠. 빅토르 카렐린 대사. 아니 푸튼 대통령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그걸 어떻게?”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선 빅토르 카렐린, 아니 푸튼 대통령의 모습에 유태진은 웃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러 정황이 당신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푸튼 대통령. 아직 임기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새로 파견된 신임 대사라는 것부터가 의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일개 신임 대사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데다, 이렇게 제게 대놓고 러시아 정보부에서 분석한 기밀들을 서슴없이 입에 담을 정도면 그만한 권한을 가진 분이라는 뜻이지요. 게다가 지금의 분장은 당신이 가진 본연의 모습을 다 감추지 못했죠. 물론 전문가의 손길이 닿아 있긴 하지만, 제 눈을 속일 정도는 아닙니다.”
“허···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드러나 버렸군.”
푸튼 대통령은 기막혀 하면서도, 상대의 분석력에 감탄하고 말았다. 설마 저 정도 단서로 자신의 정체를 바로 추론해낼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물론 의도대로 됐다면 좀 더 뒤에 정체를 드러낼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러시아 대통령의 입장에서 제대로 이야기 해보는 게 나을 듯싶었다.
“맞소, 유태진. 당신의 추측대로 내가 그 푸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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