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23화
“서일태! 당신을 살인 교사 혐의로 체포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서일태 부회장은 일순 어이가 없어져 버렸다.
“뭐라고? 이 멍청한 것들이 공소시효가 한참 지난 사건으로 어떻게 날 체포하겠다는 거냐? 제정신이야?”
하지만 그의 반박은, 즉각 검사에 의해 되받아쳐졌다.
“그 사건이 아니라 바로 어제 일어난 사건을 말하고 있는 거다. 당신은 이진운 사장을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할 의도로 그룹 내의 비밀보안 요원을 움직였다. 이미 증거도 다 확보해 놨어!”
“뭐라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어제 지시했던 건 어디까지나 위탁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가한 압박 정도였다. 언제 자신이 살인 교사를 지시했단 말인가?
‘아니, 그 전에 그 사실이 어떻게 알려졌고, 그 증거는 또 어떻게 확보한 거지? 대포폰을 사용해 지시할 정도로 보안도 철저히 했는데?’
“제아무리 큰 로펌을 동원해도 소용없다고 해두지. 너는 평범한 일개 시민을 죽이려 한 게 아니야. 무려 미국 명예 시민권을 소유한 자를 죽이려 한 거다.”
“미국··· 명예 시민권자라고? 누가?”
일순 의식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들리지 말아야 할 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린 것 같았다. 미국 명예 시민권자라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그때, 동양인과 서양인의 혼혈로 보이는 한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품속에서 자신의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서늘하게 말했다.
“미합중국 FBI본부에서 왔다! 당신이 죽이려 했던 이진운 씨는 바로 우리 미국의 자랑스러운 명예 시민권자였다. 네놈은 선을 넘었어. 감방에서 평생을 보내게 해 주지. 아마 죽는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울 거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그리고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주가 조작을 조장한 혐의도 있지. 지금까지 저지른 숨겨온 죄들을 철저히 찾아내서 그 죗값을 전부 치르게 해주마.”
유문택의 손자가 미국 명예시민권자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새로운 미국 명예 시민권자가 탄생했단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유문택의 손자라고?
하지만 생각해보니 아주 집히는 부분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애당초 TPU라는 믿기지 않는 기술을 개발한 KM사를 어느 누구도 노리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세계 유수의 대기업들은 그들과 위탁생산 계약만 맺었을 뿐, 별다른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그건 호랑이가 코앞에 놓인 고기를 마다한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허, 내가 어리석었구나.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런 부분을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었다니···.’
어떻게든 지분율을 높여 세화 그룹을 차지하기에 급급했던 나머지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게 원인이었다. 수십 년 동안 목표해 왔던 대업의 달성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미처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서일태 부회장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유문택 회장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승리자의 입장에 서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문택 회장의 얼굴 위로 드러난 감정은 무겁고 씁쓸해 보이기만 했다.
“서일태. 나는 널 믿었건만, 너는 날 배신했구나. 차라리 그냥 배신이었다면 이렇게도 고통스럽진 않았겠지. 왜 그랬던 거냐? 왜 내 아들과 며느리를 그렇게 만든 거야? 대체 왜?”
“뭘 그렇게 새삼스럽게 묻소?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뭐가 당연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뻔뻔하기 짝이 없는 그 태도에 유문택 회장은 화가 치밀어 소리를 질렀다.
“큭큭··· 당신의 유일한 후계자가 바로 진영이 아니오? 그 녀석만 없어지면 후계구도가 엉망이 되어 내게도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 계획대로 난 부회장이 되었고.”
“고작 회장 자리가 탐나서 이따위 짓을 한 거냐? 네놈의 욕심 하나로 나는 아들과 며느리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어!”
유문택 회장은 자식과 며느리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서일태의 행태에 너무도 분하고 억울했다.
세화 그룹을 키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사가 혈육보다 중요했던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아들과 며느리가 되살아날 수만 있다면, 그까짓 회사쯤은 서슴없이 포기해 버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번 죽은 자는 다시 되돌아올 수 없었다. 그 점이 안타깝고도 원통했다.
그런 유문택 회장에게, FBI에서 왔다는 사내가 말을 건네 왔다.
“유 회장님. 이런 더러운 범죄자와 굳이 말 섞으실 필요 없습니다. 대개가 그렇듯이 이런 놈들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법이 없지요. 괜히 기분만 더러워지실 겁니다.”
“후우··· 알겠소.”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한발 물러서는 유문택 회장. 그도 서일태 같은 작자에게 더 말해봐야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이놈은 곧 통곡을 하며 후회할 겁니다. 미국 명예시민권자를 건드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톡톡히 알게 될 테니 말이죠. 아마 살아도 산 게 아닐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선 제가 아닌, 미 연방정부의 이름을 걸고 보장해 드리지요.”
FBI출신 사내는 그렇게 장담하면서 서일태 부회장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곤 발로 그의 종아리를 세게 걷어차 바닥을 나뒹굴게 만들었다.
“컥! 으으···”
전신에 밀려든 격통에 서일태는 정신마저 혼미해졌다. 이제 노년에 이른 그의 육신은 걷어차여 바닥을 나뒹구는 정도만으로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FBI출신 사내는 어지간한 사내 허벅지만한 굵기의 팔로 서일태의 멱살을 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졸지에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 들려 올려진 서일태는 목이 죄어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사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리곤 자신과 정면으로 시선을 맞추면서 으르렁대듯 말했다.
“너도 그렇고, 네 아들도··· 그리고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자들을 철저히 색출해 처벌할 거다. 대한민국 정부의 심판이 아니라, 우리 미합중국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기대해도 좋을 거야. 그리고 이거 하나만큼은 마음에 드는군. 당신이 한국과 미국의 이중국적자라는 사실 말이야.”
“으으···.”
서일태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상대의 광포하기까지 한 눈빛에 숨이 막힌다는 것조차 잊을 만큼 압도되어서였다.
적어도 사람을 죽여 본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눈빛임이 분명했다.
콰당!
사내는 겁에 질린 서일태의 멱살을 그대로 놔 버렸다. 졸지에 또 한 번 바닥을 나뒹굴게 된 서일태는 끙끙거리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 그래, 너 같은 놈이라도 잡아가기 전에 미란다 원칙 정도는 말해 줘야겠지. 잘 들어.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법정에서······.”
그렇게 절차대로 미란다 원칙을 읊어준 사내는 곧 한국의 경찰들과 함께 서일태를 끌고 가 버렸다. 평범한 범죄자도 아니고 무려 미국 명예시민권자를 살해하려 했던 범인이었다. 그는 곧 미국으로 인도되어 그곳의 법에 의해 심판받게 될 것이다.
짐승처럼 끌려가는 그 모습을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던 유문택 회장을, 유태진이 조용히 불렀다.
“할아버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손자의 시선에, 유문택 회장은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다. 괜찮아. 이 할아비 그 정도로 어떻게 되지 않으니 걱정 마라. 우리 손주가 바로 옆에 있는데 내 무슨 걱정을 하겠니.”
“예. 할아버지.”
유태진은 무척이나 서글퍼 보이는 유문택 회장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꼭 붙잡아 주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 * *
그 이후, 주주총회는 그걸로 끝을 맺게 되었다. 어차피 이번 주주 총회는 그동안 수많은 실책을 저질러온 서일태 부회장을 그 자리에서 쫓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런 그가 공교롭게도 미국의 FBI에게 체포되어 끌려가고 말았으니, 이번 주주총회를 더 지속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주총회에서 있었던 일은 대서특필 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일태 부회장이 수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어떤 죄들을 저질러 왔으며, 그 피해자였던 시한부 인생인 유문택 회장이 주주총회에 참석해 건재함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그리고 실종되었다고 알려졌던 유문택 회장의 손자가 다시 나타난 것도 모자라,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KM사의 사장이 그 손자였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그 파급력은 더욱 크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덕분에 무지막지한 폭락세를 이어나가던 세화 그룹의 주가는 곧바로 폭등으로 반전하게 되었다. KM사의 사장을 손자로 둔 세화 그룹이 설마 TPU의 위탁생산 계약을 따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문택 회장은 그 소식에 껄껄 웃었다.
“허허허··· 손자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그룹이 순풍을 달았구나.”
“별말씀을요. 애당초 그 작자들만 아니었으면 할아버지도 얼마든지 그룹을 더 크게 키우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잖아요.”
“뭐, 그렇긴 하다만, 그래도 우리 손주만은 못하지. 참으로 네가 자랑스럽구나.”
수십 년 동안 잃었던 손자를 되찾은 게 기꺼웠던 유문택 회장은 연신 칭찬만 했다. 뭘 하든 손자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옆에서 그 모습을 뚱하니 쳐다보던 리스티가 자신의 팔을 벅벅 긁으며 투덜거렸다.
“아, 진짜···. 이 나라에서 오그라든다는 말을 잘 쓰던데, 그게 무슨 소린지 오늘 아주 잘 알 것 같네.”
“이 녀석이···!”
유태진도 나름 민망하던 차였다. 할아버지와 단 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행이 있는 곳에서 이렇게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으니 낯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허나 유문택 회장은 그런 말을 듣고도 그저 웃어 보였다.
“허허··· 이거 남들 앞에서 보기 민망한 모습을 보였구먼. 리스티 양. 하도 오랜만에 만나게 된 손자라서 이 늙은이가 주책을 좀 부렸네.”
“아니에요. 가족끼리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게 나쁠 건 없죠. 그냥 제가 좀 배가 아파서 그랬어요.”
프론사이드 가에서 서자란 이유로 차별 받으면서 별로 좋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리스티였다. 화기애애한 두 조손간의 모습에 약간 부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어온 유문택도 그 점을 어렴풋이 눈치 챘다.
“일단 계약부터 체결하죠. 세화 그룹과의 위탁 생산 계약서에요.”
리스티는 그렇게 말하면서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 내용은 다른 회사들과 동등해요. 유태진 아저씨의 할아버지라고 해서 특별 취급을 해 드릴 순 없거든요.”
“그건 이해하네. 태진이가 내 손자라 해도 KM사는 엄연히 다른 기업이니까. 미국 기업이니 타 국가의 기업에 특혜를 주긴 어렵겠지.”
유문택 회장은 그다지 서운해 하지 않았다. 그는 유태진의 조부이기에 앞서 냉철한 사업가였다. 손자가 세운 회사에서 자신의 그룹에게 특혜를 주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해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어드밴티지를 제공할 순 있죠.”
“어드밴티지라면?”
그래도 어드밴티지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말에 두 눈빛을 빛내는 유문택 회장.
리스티는 그에 대해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앞으로 개발할 신제품을 이곳에서 테스트 할 생각이에요. 이곳에는 연구 설비들도 갖춰져 있고, 다른 기반들도 충실한 편이니까요.”
“그 대가로 우리 세화 그룹에 약간의 계약적 편의를 봐 주겠다 이거구먼.”
“예. 아저씨에게 이미 들으셨겠지만, 저희는 지구 전체를 고려해서 움직여야 해요. 그래야 전 세계를 하나로 뭉칠 수 있으니까요. 확실한 Give&Take가 아니면 반대급부를 제공할 수가 없어요. 누군가에게 특혜를 제공해준다면 그건 결국 불화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커요.”
“일리 있는 말이군.”
그 말에 납득한 유문택 회장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애당초 자신의 손자가 무사히 돌아온 이상, 굳이 큰 욕심 부릴 생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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