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22화
곧 주주총회가 시작되었다.
이번 회의 안건은 바로 주가폭락과, 위탁계약의 실패에 대한 책임 여부였다.
그래서인지 서일태 부회장을 비난하는 무리와, 그를 옹호하는 무리가 서로 치열하게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서일태 부회장은 안이한 그룹 운영으로 세화 그룹을 재정 위기에 빠뜨렸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얼토당토 않는 소릴 하는 거요?”
“최근 금융사로부터 대출상환연장조차 거부당한 걸로 압니다. 여기에도 서일태 부회장이 연관되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로인해 그룹 내의 자금 흐름이 경색되었고, 내년 연구투자비용으로 책정되어 있던 사내유보금까지 대부분 빚 갚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내년 투자는 말 그대로 물 건너 간 셈이죠.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나가는데, 그 일 년을 허송세월로 보내게 되면 어떻게 시대의 변화에 따라갈 겁니까?”
정곡을 찌르는 그 말에 서일태 부회장의 지지자들이 당황하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서일태 부회장의 잘못이라기 보단 은행들이 일방적으로 연장을 안 해준 것 아닙니까? 어째서 그 문제가 서일태 부회장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다고 허튼 소릴 하는 겁니까? 그도 피해자인데.”
표면적인 상황만 보면 은행의 일방적인 거절에 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내막은 전혀 달랐다.
“뭘 모르시는군요. 은행에서 상환연장을 거부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세화 그룹을 신용할 수 없어서랍니다. 유문택 회장님이 병환을 앓게 된 이후, 그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서일태 부회장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뭐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서일태 부회장이 유 회장님 병환사실을 유포했다니!”
서일태 부회장의 지지자들도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들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주가 폭락을 이용한 주식 매입이 목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서일태 부회장과 그 일가의 지분율이 요 근래 매우 높아졌죠. 아마도 서일태 부회장은 자신이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면 폭락한 주가는 얼마든지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을 겁니다. 하지만 금융업계도 바보는 아니죠. 다들 고의적으로 주가 폭락을 일으킨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세화 그룹 자체를 신뢰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아시겠어요?”
“허어··· ”
지지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서일태 부회장에게로 모였다. 저게 정말 사실이냐는 표정들이었다.
‘젠장! 그래서 상환연장을 거부한 거였나?’
서일태 부회장은 이제야 은행들이 상환연장을 거부한 이유를 깨닫고는 이를 갈았다. 일방적으로 상환 연장만 거부한다는 말을 들은 탓에,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서일태 부회장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물론 평소라면 서일태 부회장이 의도한 대로 되었겠죠. 지분율을 높이고 유 회장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가능했을 겁니다. 그분 사후에 회장 자리를 물려받을 마땅한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하필이면 이때에 KM사가 TPU라는 희대의 반도체를 들고 나왔죠. 그 때문에 서일태 부회장의 계획이 완전히 무너진 겁니다.”
“그랬군.”
“그래서 최근 우리 그룹의 주가가 그 모양이었던 거였어?”
“빌어먹을 서일태!”
“이 개자식아! 내 주식 물어내!”
이젠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일태의 적으로 돌아섰다. 그를 옹호하는 백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서일태 부회장과 손을 잡은 거도 자신들에게 득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지, 개인적인 친분이나 의리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특히 개미주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 재산을 죄다 쏟아 가며 세화 전자의 주식을 사들인 사람들이었다. 주가가 폭락할 때마다 얼마나 피눈물을 쏟았는지를 생각하면, 서일태 부회장을 산 채로 씹어 먹어도 시원찮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서일태 부회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하듯 외쳤다.
“오해요! 그럴 리가 없소! 주가가 폭락하게 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란 말이오! 게다가 KM사가 TPU를 개발한 게 내 탓은 아니잖소! 심지어 주가폭락의 원흉인 KM사의 사장은 바로 저기 있소! 바로 유 회장의 휠체어를 끌고 온 저 젊은이 말이오!”
그의 손가락이 이진운을 가리켰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히 그를 향하게 되었다.
“뭐?”
“KM사의 사장?”
“지, 진짜다! TV에서 본 적이 있어!”
“어째 낯익은 얼굴이다 싶었는데, 저 사람이 그 사람이었어?”
서일태 부회장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이진운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미 언론에 몇 차례 노출되었던 이진운이었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그의 이름을 들은 이상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유 회장과 KM사 사장이 같이 있지?”
“혹시 유 회장하고 이진운 사장이 가까운 사이였나?”
“그럴 리가! 세화 그룹의 위탁생산 계약을 거절했다고 했잖아.”
사람들은 이진운과 유문택 회장이 함께 주주총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했다. 계약이 불발된 결과만 보면 이진운 사장이 세화 그룹 적대하는 게 아닌 가 싶었는데, 지금 저 모습은 뭐란 말인가?
유문택 회장과 아주 가까운 사이처럼 친근하게 있지 않은가?
결국 참다 못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하고 나섰다.
“혹시 유 회장님. 그 옆의 젊은 분은 혹시 KM사 사장인 이진운 사장 아닙니까?”
“그래, 맞네. 이 녀석이 바로 그 TPU인가 뭔가를 개발한 KM사의 사장이지.”
“허억!”
혹시나 했던 게 정말로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워낙 신뢰할 수 없는 서일태 부회장의 말이라서 반신반의했었는데, 그게 정말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유 회장님께서 그 이진운 사장님과 함께 주주총회에 참석하시게 된 겁니까?”
“왜냐고? 하긴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 계약 불발 건 때문에 세화 그룹과 KM그룹이 사이가 좋지 않다고 말이야.”
피식 웃으며 말하는 유문택 회장의 모습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게 아니었습니까?”
“아니지, 아니고말고. 이 녀석이 적대하는 건 세화 그룹이 아니라 바로, 저 파렴치하고 후안무치한 작자 때문일세. 바로 서일태 부회장 말일세.”
“아니, 그게 무슨!?”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분노를 내보이는 유문택 회장의 모습에 서일태 부회장이 깜짝 놀라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유 회장이 자신에게 뜬금없이 이 정도의 적대감을 보이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건 마치 부모를 죽인 철천지 원수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 아닌가.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유문택 회장의 성난 일갈은 그의 심장을 떨리게 만들었다.
“서일태! 네놈이 부린 수작질을 내가 계속 모를 거라 생각했나? 24년 전 내 아들과 며느리가 탄 차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 것도 네가 사주해서 그랬다는 걸 이미 확인한 바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화 그룹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모로 수작을 부려왔었지.”
“뭣? 세상에!”
“그때 그 사건이 서일태 부회장이 저지른 짓이라고?”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이 새어 나왔다. 그때 그 사건을 기억 못할 리 없었다.
유문택 회장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유진영은 아버지를 뛰어넘는 뛰어난 수완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아쉬움을 금치 못했었는데, 그게 서일태 부회장의 사주로 벌어진 살인사건이었다니!
일이 이렇게 되자 수많은 의혹과 불신의 시선이 서일태 부회장에게 쏟아졌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유 회장, 당신 죽을 때가 다 되어 이젠 노망이 든 건가? 대체 누구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고 있나? 증거도 없이!”
서일태 부회장은 악을 쓰며 부정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정말로 살인교사범으로 낙인이 찍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문택 회장의 눈빛은 만년한빙마냥 차갑기만 했다.
“누명? 웃기는군. 네놈의 그 뻔뻔한 낯짝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이가 갈린다. 지금까지 속아서 산 세월을 생각하면 네놈을 단매에 쳐 죽여도 성이 안 풀려! 그래, 증거 운운했단 말이지? 그 증거 똑똑히 봐라!”
그 순간, 회의장 전면에 있던 프로젝터 화면에 뭔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한 사람의 증언이었다.
세파에 찌들어 늙수그레한 50대 중반의 사내. 그가 바로 서일태 회장의 사주를 받고 교통사고를 일으켰던 트럭 운전수였다.
영상 속에 등장한 그는 죄책감에 젖은 눈으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예, 맞습니다. 제가 그때 교통사고로 두 분을 돌아가시게 만들었습니다. 서일태 부회장, 아니 그 때는 이사였었죠. 그 분이 제게 거금을 약속하시면서 교통사고를 지시하셨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당장 수술할 돈조차 없었거든요. 그래서 그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그 뒤 운전수는 자신이 어떻게 교통사고를 일으켰고, 어떻게 수술비를 받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했는지도 일일이 나열해 나갔다. 그리곤 자신이 어떤 대처를 했는지도 설명했다.
[솔직히 말해 어머니의 수술비는 받는다 쳐도, 그 뒤에 저와 어머니가 무사하리란 보장이 없었습니다. 무려 유 회장님의 아드님과 며느님을 교통사고로 죽인 일이니까요. 그리고 서일태 이사가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절 가만 둘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수술 후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으신 뒤 즉시 도망쳤습니다. 중국으로 밀항을 했죠. 다행히 수술하고도 남은 돈이 있어서 중국에서 정착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요.]
그 운전수는 생각 이상으로 용의주도하고 신중했다. 혹시 모를 일을 위해 몰래 여러 가지 사진을 찍어두었고, 녹취도 해 두었다.
그 증거들이 지금 영상을 통해 세화 그룹의 모든 주주들을 향해 공개되고 있었다.
“으으···.”
이젠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증거를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서일태 부회장도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대체 중국으로 도망쳐서 자신조차 찾을 길이 없었던 저 운전수를 어떻게 찾아낸 건지, 그리고 놈에게 어떻게 자기 입으로 증언을 하게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알 리가 없었다. 저 운전수를 찾아낸 건 유문택 회장이 아니라 로스차일드 가의 정보요원들이었고, 그를 증언하게 만든 것도 그들의 협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유문택 회장이 가진 게 많다 하더라도, 중국에 숨어서 이름까지 바꾸고 살아왔던 운전수를 찾아내진 못했을 것이다.
“저 놈이 노린 건 바로 세화 그룹이었소. 내 유일한 후계자인 진영이만 죽는다면 자신이 이 회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리고 실제로 놈의 의도대로 그렇게 되어갔고.”
사람들은 그 말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문택 회장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또 다른 자식도 친척도 없었다. 유진영만이 유일한 후계자였던 것이다.
때문에 유 회장의 사후 가장 유력하다고 평가받던 다음 대 회장은 서일태 부회장이었다. 그 사실을 생각한다면 범행 동기는 충분하고도 넘친다.
“나는 지난 세월 동안 죽어가고 있었소. 아들도, 손자도 잃고 내가 더 이상 살아갈 낙이 없었지. 그래서 죽을병마저 걸리고 얼마 남지 않았다 싶었는데, 바로 이 녀석이 찾아온 거요.”
그렇게 말하면서 유문택 회장은 이진운의 손을 꼭 잡았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의문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럼 이진운 사장님과 유 회장님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바로 내 손자요. 그때 교통사고로 잃어버린 내 손자, 유태진이오.”
이진운을 자신의 손자라고 공표한 그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크게 외쳤다.
“소, 손자!? 이진운 사장님이 유 회장님의?”
“예에? 회장님 손자는 그때 죽지 않았던 겁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실종이었지. 교통사고 당시 내 아들과 며느리의 시신은 발견되었지만, 손자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소. 그 이유는 바로 저 운전수 때문이고.”
정지된 화면에 비친 운전수를 가리킨 유문택 회장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주를 받은 운전수도 교통사고 직후 간신히 살아남은 저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꼈던 모양이오. 그래서 노을 보육원이란 곳에 아이를 몰래 남기고 도망쳐 버렸지.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게 된 거요.”
“그럴 수가!”
“그런데 이 녀석이 죽을 날 받아놓고 병원에 있던 날 찾아왔더군.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지. 정말로 내 손자인가 하고···. 그런데 전부 사실이었소.”
정말이지 듣고서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손자가 살아 돌아오고, 심지어 그 손자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TPU를 개발한 KM사의 사장이었다니!
그리고 KM사가 어째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화 그룹만 위탁생산 계약에서 배제시켰는지도 납득이 갔다. 괜히 계약을 맺어서 원수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이제 모두의 시선이 서일태 부회장을 향했다. 세화 그룹의 부회장이 아니라 범죄자를 보는 시선들이었다.
유문택 회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다 끝났다. 서일태! 이제 순순히 그 죄 값을 치러라.”
그렇지만 서일태 부회장은 조금도 뉘우침이 없었다. 오히려 발악하고 나섰다.
“웃기는 소리! 아직 안 끝났어! 안 끝났단 말이야! 살인교사? 이미 공소시효 지난 지 오래된 사건으로 날 어쩌겠다고? 그래 세화 그룹을 차지한다는 계획은 철회하지. 하지만
그걸로 날 어찌할 수는 없어!”
그랬다. 서일태 부회장이 믿고 있던 건 바로 공소시효의 소멸이었다. 이미 그의 죄가 밝혀져도 처벌할 수 없게 된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문택 회장은 분개하지 않았다. 여전히 차가운 이성을 유지한 채 서일태 부회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 그 건에 대해선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건 사실이다. 그걸로 널 법으로 처벌할 순 없겠지. 하지만 네가 저지른 죄가 어디 그뿐일까?”
“뭐?”
의미심장한 그 말에 서일태 부회장은 불길함을 느꼈다. 등골에 오한이 달릴 만큼 섬뜩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회의장 안으로 일단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경찰과 형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검사도 끼어 있었다.
“서일태! 당신을 살인 교사 혐의로 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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