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45화 (246/448)

10권-20화

두 눈으로 직접 보고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미국 명예 시민권은 미국 국적이 없는 외국인중 특별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부여한 최고의 영예를 말한다. 지금까지 미국이 세워진 이래 7명이 받았으며, 그들은 하나같이 역사에 남을만한 인물들이었다.

이를 위해선 대통령과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으니, 이 영광을 누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헌데 지금 눈앞에 있는 한국 국적을 가진 사내가 여덟 번째 미국 명예시민이라니!

이곳에 들이닥쳤던 검찰과 경찰들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건 돌이킬 수도 없는 대사건이었다! 별다른 근거도 없이 미국의 명예 시민권자를 체포하느니 마느니 운운한 것 자체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시비를 건 거나 다름없었다.

엘레나가 아연실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비웃듯 물었다.

“이래도 이분을 체포해 가실 건가요? 당신들로선 뒷감당하기 어려울 텐데요?”

“지··· 지금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미국 대사관에 전화로 문의했다. 그리고 곧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정말이었어!”

그들은 전신의 맥이 풀리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도 절감했다.

‘대체 상부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지시를 내린 거지?’

‘미국 명예 시민권자를 상대로 억지를 부려서 구금수사 하라고? 제정신인가?’

오만 생각이 다 들었지만, 일단은 이 자리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게 중요했다. 이게 만약 국제 문제로 대두되기라도 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발칵 뒤집힐 수도 있었다.

그들은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사죄의 뜻을 표했다.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상부에서 어떤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머리를 처박을 듯 사죄하는 모습은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허나 되돌아온 유태진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

“착오가 아니라 사주를 받았겠지. 세화 그룹 서일태 부회장의 부탁이었을 텐데. 안 그런가?”

“···저희도 그저 지시만 받았을 뿐이라, 그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모른다고 발뺌하긴 했지만 내심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이런 억지에 가까운 죄목으로 강압적인 구속수사로 상대방을 압박하는 건 권력과 결탁한 대기업들이 잘 써먹는 방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중소기업을 옥죔으로서 최종적으로 그들이 보유한 핵심 기술이나 회사 자체를 강탈해 왔던 것이다.

세화 그룹이란 이름을 듣고 나니 그들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짐작이 갔다.

‘서일태 부회장 이 미친 작자 같으니! 나이가 들더니 벌써부터 치매가 들었나? 수작을 부려도 상대방을 봐 가면서 부렸어야지! 어디 미국 명예 시민권자를 상대로 무슨!?’

자신들이 이 지경에 처하게 만든 서일태 부회장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가슴 속에서 크게 불타올랐지만, 지금은 표정관리를 해야 할 때다.

최대한 비굴한 모습으로 용서를 구했지만, 상대방의 냉담함은 변하지 않는다. 특히 엘레나는 그들을 거듭 궁지로 몰아넣었다.

“당신들은 지금 마약밀수혐의라는 되지도 않는 혐의로 우리 미합중국의 명예 시민권자를 모욕하려 했어요. 이 대가 톡톡히 치를 겁니다.”

“저희도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가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하지만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지 않고 따른 건 어디까지나 당신들의 선택이었죠. 그리고 지금까지 그에 대한 대가로 많은 걸 누렸을 테고요.”

“······.”

“이번에도 권력을 앞세워 개인을 짓밟을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당신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짓밟혀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그들의 얼굴은 말 그대로 사색이 되었다. 지금까지 부당한 지시를 이행해 오면서 권력의 무정함은 그 누구보다도 몸서리치게 절감하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자신들은 분명 토사구팽을 당하게 될 게 분명했다.

“제발 용서를···.”

이젠 정말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이마를 찧기 시작했다. 얼마나 세게 찧었던지 정말로 이마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무심할 정도로 내려다보던 유태진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만하면 됐다. 너저분한 짓 그만 두고 다들 머리를 들어 봐.”

“그러면?”

머리를 들라는 그 말에 모두가 간절한 표정으로 유태진을 바라보았다.

“용서를 구한다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겠지?”

“진심입니다! 저희 말을 믿어주십쇼!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깊게 뉘우치고 있으니 부디 용서를······.”

유태진은 그들 눈에 서린 혼란을 엿보았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어느 정도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그럼 내 지시에 얼마나 따라주느냐에 따라 한번 생각을 해보지.”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성심을 다해 완수하겠습니다.”

유태진이 용서해 줄 수도 있다는 태도를 보이자, 그들은 목청이 터져라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의 친자식이라도 갖다 바칠 기세였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판단한 유태진이 엘레나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그녀가 대신 나서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간단합니다. 오늘 일에 대해선 세화 그룹에 알리지 마세요. 이분이 미국 명예시민권자란 사실도 마찬가지고요. 이 정보가 그들에게 흘러가선 절대 안 됩니다.”

“예? 그건 왜···?”

경찰들 중 누군가가 눈치 없이 되물었지만, 옆에 있던 자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쳐서 그 입을 막아버렸다. 지금은 궁금해 할 때가 아니었다. 무슨 지시를 내리든 이유 막론하고 무조건 완수해 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일을 무마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들 상관에게도 확실하게 전하세요. 만약 이분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가면 백악관에서도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요.”

“예!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내심 경악했다. 미국 명예 시민권자란 사실을 들었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 여겼지만, 설마 백악관까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줄이야.

지금까지 이름조차 알려진 바 없었던 저 사내는 말 그대로 상상 이상의 거물이었던 것이다.

“그럼 다들 돌아가. 어지럽힌 건 깨끗하게 정리해 두고.”

“아··· 알겠습니다.”

그들은 수색한답시고 어지럽힌 호텔방을 말끔하게 정리해둔 뒤 도망치듯 그곳을 떠나갔다.

그런 뒷모습을 지켜보던 리스티가 유태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신기한 수법이네요. 영기로 상대를 압박해 정신을 조작하는 건가요?”

“천마군림보라는 수법이다. 물론 정식으로 익힌 건 아니고 누군가가 사용하는 걸 눈대중으로 겨우 흉내 내는 수준이지만. 이럴 땐 그럭저럭 쓸 만하지.”

그랬다. 검사와 경찰들이 저렇게 유태진과 엘레나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반응한 것도 바로 이진운이 은연중에 시전한 천마군림보 때문이었다.

전생 시절 천마가 사용하던 수법의 원리를 약간 차용했을 뿐이지만, 그 효과는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지대했다.

“정신계열의 마법도 아닌데 저런 식으로 작용한다니··· 원리가 정확히 뭐에요? 대충 짐작은 가지만요.”

“너희 연합의 분석하는 방식대로 설명한다면 기세를 특정 주파수 형태로 가공해서 상대방의 아스트랄 사이드(정신세계)에 간섭하는 형태라고 보면 될 거다. 마법하고 다른 점은, 정신을 직접적으로 조작한다기보다는, 기세로 정신 자체를 압박해서 혼을 빼놓은 뒤에 원하는 명령을 간접적으로 각인하는 형태라는 거겠지. 그래서 직접 조작하는 정신계열 마법에 비한다면 부작용은 덜해.”

“흐음, 기세를 그런 식으로도 응용이 가능한 거였군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리스티는 금세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것을 어떻게 달리 활용해 볼지 이리저리 머릿속으로 분석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엘레나는 유태진의 수법에는 별달리 관심이 없었다. 지금 그녀가 궁금한 것은 다른 것이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스승님은 언제까지 예전 이름을 쓰실 건데요? 그 서일태라는 사람은 눈치 못 챘나요?”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전혀 반응이 없더군.”

서일태 부회장도 모를 리가 없었다. 노을 보육원에서 이진운이란 이름으로 자라난 사람이 유문택 회장의 친손자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는 KM사의 사장의 이름이 이진운이란 걸 듣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름만 같은 동명이인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실종됐다고 알려진 지 벌써 2년이나 됐으니 눈치 못 챌 만도 하지. 대규모 실종사건의 명단에 오른 사람 중 돌아온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으니 더더욱 그랬을 테고.’

그래도 혹시나 싶어 되찾은 진짜 이름 대신 예전 이름을 사용했지만, 서일태 부회장은 전혀 짐작조차 못했다.

“그렇군요. 하긴 눈치 챘다면 저런 멍청한 짓을 하고 있을 리가 없죠.”

“그래도 지금 당장은 내 본명을 사용할 순 없어. 내 성씨가 유 씨라는 걸 알면 의심할 테니까. 거기에 이름까지 할아버지 손자와 똑같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

게다가 유문택 회장이 병원에서 사라진 사실을 그들도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의 이름까지 유태진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서일태 부회장이 둔감하다 해도 그 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제 슬슬 돌아가 보자. 할아버지가 기다리시겠다.”

“예.”

그들 세 사람은 호텔을 나섰다. 어차피 그들이 머물고 있던 호텔은 위탁 생산 계약을 위해 특실 한 곳을 잠시 빌렸을 뿐이었다. 일행이 전부 다 노을 보육원에서 머물고 있는데, 자신들만 이곳에서 따로 묵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차를 타고 돌아가던 그때,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유태진의 눈매가 돌연 가늘어졌다.

“멍청이들이 따라 붙었군.”

“아, 우리 차를 졸졸 따라오는 저 차들 말인가요?”

리스티가 창밖으로 보이는 몇 대의 차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딱 봐도 수상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차들이었다. 물론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지만, 아까부터 계속 죽어라 뒤쫓아 오는데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엘레나가 물었다.

“우릴 미행할 생각인 걸까요?”

“아니 미행은 아니야. 우릴 미행할 생각이라면 좀 더 은밀하게 거리를 두고 접근해 왔겠지.”

“그럼 혹시 교통사고를?”

“그래. 우릴 위협하겠다는 뜻일 거다. 언제 어디서든 너흴 사고를 가장해서 죽일 수 있으니, 그렇게 되기 싫으면 계약을 맺어 달라는 요구가 틀림없어.”

“정말 악질적인 작자군요.”

유태진이 내놓은 추론에 엘레나는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협상이 통하지 않는다고 공권력을 동원한 것도 모자라 이젠 교통사고 같은 수법으로 물리적인 위협까지 하겠다고?

“하지만 수작 부릴 상대를 잘못 만났지. 날 상대로 이딴 너저분한 짓거릴 해오다니···.”

이진운은 섬뜩한 표정과 함께 기운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저 편에서 브레이크 고장을 가장해서 이쪽을 향해 빠르게 미끄러져 오는 차가 보였다.

끼이이이익!

콰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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