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44화 (245/448)

10권-19화

“뭐라고? 자네 지금 날 협박하고 있는 건가?”

“협박이 아니라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약육강식은 세상의 진리 중 하나지요.”

이젠 대놓고 세화 그룹의 전자 부문을 집어삼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진운의 여과 없는 선언에, 서일태 부회장은 기가 막히다 못해 이젠 의문마저 느꼈다. KM사와 위탁생산 계약한 기업들의 수는 상당했으며, 그 중에는 회사 사정이 좋지 못한 곳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왜 우리 세화 그룹에만 그런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지···. 우리 그룹이 자네와 KM사에 어떤 해라도 끼쳤었나?”

전자 반도체가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렇지, 세화 그룹이 취급하는 분야들은 상당히 방대했다. 서일태 부회장조차 그룹 소속의 계열사 전부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 중 하나가 저 이진운이란 사내와 우연찮게 악연으로 얽혔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상대방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여전히 의뭉스런 얼굴로 대답할 뿐이다.

“글쎄요. 전 엄연히 비즈니스 차원에서 그렇게 판단한 겁니다. 세화 그룹의 전자 반도체 부문을 인수할 수 있다면 저희 KM사의 성장에 큰 보탬이 되겠지요. 물론 그에 합당한 대가는 치르겠습니다.”

순간 서일태 부회장은 물론, 두 장관도 할 말을 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화 그룹의 전자 반도체 부문은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TPU의 등장만 없었더라면 세화 전자의 가치는 감히 돈으로 인수한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겨우 신제품 하나 내놓은 신생 기업 따위가 반도체의 공룡인 세화 전자를 인수하겠다고?

경제부 장관이 분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세화 그룹은 엄연히 한국 기업일세.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도 이루 말할 수 없지. 그런데 그런 기업이 조금 흔들렸다고 해서 그걸 강탈하겠다는 건가?”

“흐음, 전 세화 그룹이 민간 기업인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장관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무슨 국영 기업이라도 되는 것 같군요.”

민간 기업 문제를 왜 국가 관료가 간섭 하냐는 말을 완곡히 돌려서 지적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경제부 장관은 그 말을 듣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 세화 그룹은 민간 기업이지.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대부분 한국인들이야. 세화 그룹 하나에 무려 수만 명, 아니 그 이상의 한국인들의 생계가 달려 있어!”

“제가 인수한다고 해서 한국인 근로자들을 내쫓을 생각은 없습니다. 배임이나 횡령 등의 문제가 없다면 고용승계는 확실히 보장하지요. 그리고 세금도 착실히 낼 테니 걱정 안하셔도 될 겁니다.”

세금은 물론 고용승계까지 보장한다고 하니 경제부 장관도 더 이상 한국 근로자의 생계나 경제 문제를 들먹이기 어려워졌다.

‘이놈! 진짜로 세화 전자를 먹어치울 생각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철저히 나올 리가 없어.’

이젠 더 이상 세화 전자 인수를 막을 핑계나 명분이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서일태 부회장이 으르렁대듯 입을 열었다.

“KM사가 미국에 있다고 그렇게 나오는 모양인데, 자네는 한국인일세. 미국인이 아니야.”

“그거 무슨 협박처럼 들리는군요.”

이진운이 한국 국적을 가진 것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에 적을 둔 기업이라고 해도 미국 국적이 아닌 이상 미국이 그를 지켜주지 않을 거란 뜻이었으니까.

“글쎄,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우리 세화 그룹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하지만 오늘 계약이 불발됐다는 이야기가 나가면 상황은 좀 달라지겠죠.”

“감히!”

서일태 부회장은 두 눈을 부릅뜨며 핏발을 세웠다. 오늘 계약이 틀어진 일이 알려진다면, 세화 그룹과 전자의 주가는 더욱 폭락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 더 박한 인수가가 책정될 겁니다. 그 점은 고려하셨으면 좋겠군요.”

그 말을 끝으로 이진운과의 만남은 끝을 맺었다. 상대가 계약을 맺을 마음이 없는 이상 더 얼굴을 마주할 이유가 없었다.

호텔을 나선 두 장관과 서일태 부회장은 분개를 터뜨렸다.

“저런 건방진 놈이 있나!”

“서회장, 심려가 크겠군. 하필 저런 작자의 손에 신기술이 개발되다니 말이야.”

“확실히 젊어서 그런지 방자하기 짝이 없더군요. 좀 뛰어난 기술 하나 개발해서 세계가 좀 떠받들어주니까 기고만장해서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두 장관은 물론 서일태 부회장도 지금까지 한국에서 하지 못할 게 없던 정재계의 거물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고작 기술 하나로 팔자 고치게 된 이진운 따위에게 이렇게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 것이다.

“아무튼 그 어린 것에게 쓴 맛을 보여줘야겠습니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서일태 부회장의 모습에, 두 장관도 두 눈을 빛냈다.

“뭔가 방도가 있는 모양이군.”

“저 녀석이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놈은 미국인이 아니고, 심지어 이곳은 한국이지요. 저희의 홈그라운드라 이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자들이었다.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과정을 거쳐본 그들이 서일태 부회장이 말하고 있는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하게.”

“우리 한국에 보탬이 되려면 녀석을 조금은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두는 것도 좋겠지.”

두 장관이 협조 의사를 보이자, 서일태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용히 웃었다.

“그럼 때가 되면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사람의 청각으로서는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자신들의 대화를 누군가가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호텔 안에서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던 리스티는 조소를 머금었다. 저 아래로 자신들끼리 음모를 꾸미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말 멍청한 것들이네요. 머리는 자기들만 쓸 줄 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지금까지 법 위에서 놀던 자들이야. 그런 착각을 하고 살아도 이상하지 않지.”

“보아하니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할 모양이네요. 그 외에도 법과 제도를 악용해서 안 좋은 짓을 할 것 같고요.”

“그런 놈들이 선택할 수단이야 뻔하지.”

그렇게 내뱉은 유태진은 이번엔 엘레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엘레나.”

“예.”

“넌 가문에 말해서 장관 놈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해. 찍 소리도 못하게 말이야.”

“예, 그 정도야 간단하죠.”

KM사가 한국 기업이었다면 제아무리 미국이라 해도 함부로 관여하기 어려웠겠지만, KM사는 엄연히 미국 기업이다. 미국 기업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한국의 기업을 인수하겠다고 하는데, 그걸 방해한다면 얼마든지 치워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장관의 행동을 묶는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고 세화 그룹과 거래하는 자들을 은밀히 포섭해라. 어떻게든 세화 그룹을 압박해 달라고 해. 가능하겠지?”

“세화 그룹과 거래하는 기업들 중 저희 로스차일드 가와 연관 있는 곳이 적지 않아요. 그들에게 말을 넣어두면 될 거에요.”

유태진의 지시에 엘레나는 충분히 가능하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재 세화 그룹은 여러 모로 문제를 떠안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명분 삼으면 세화 그룹을 전 방위로 압박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 계약 불발 사실까지 널리 퍼뜨림으로서 주주들의 압박을 받게 만들 생각이었다.

유태진은 서늘한 시선으로 창밖을 향했다. 이제야 두 장관과 서일태 부회장이 각자 차에 탑승해 호텔을 벗어나고 있었다.

“어디 수작 부릴 테면 부려 봐. 나도 확실히 보여줄 테니까.”

이제부터 서씨 일가에게는 악몽이 시작될 것이다. 지금까지 상상도 못했을 그런 악몽이.

* * *

본사로 돌아온 서일태 부회장은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계약이 불발됐다는 소식이 퍼지기 전에 어떻게든 놈을 압박해서 계약을 다시 성사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룹 내에 존재하고 있던 비밀 보안요원들을 움직였다. 이름은 보안요원이었지만, 그들은 그룹에서 더러운 일들을 떠맡아 처리하는 해결사들이나 다름없었다.

“철저히 감시하라고 해. 그리고 확실한 두려움을 새겨줘! 교통사고든 뭐든 자신이 직접적으로 위협을 당한다고 느끼도록 말이야.”

[알겠습니다. 곧 조치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연락을 마친 서일태 부회장은 연락을 끊었다. 혹시 자신과 연관성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연락도 대포폰으로 취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서일태 부회장은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다. 이젠 이진운과 KM사를 압박하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서일태 부회장이 전화를 붙들고 있던 결과물 중 하나가 곧 유태진 일행이 머물고 있던 호텔로 들이닥쳤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한 무더기의 경찰들이었다.

“마약 밀수가 의심되어서 조사 나왔다고?”

“정말 치졸하네요.”

유태진과 리스티는 기도 안찬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나 했더니 고작 마약 밀수 혐의를 씌운단 말인가? 심지어 무슨 짓을 한 건지 법원이 영장까지 가지고 나오기까지 했다.

유태진은 방안을 수색하는 경찰들을 통제하고 있던 검찰에게 다가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가 마약을 밀수했다고 수색하는 겁니까? 영장까지 가져왔으면 그만한 근거를 제시하시죠?”

“신고자가 있었습니다.”

“신고자? 누굽니까, 그게?”

“신고자의 신변안전을 위해 비밀에 붙이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선 알려드릴 수가 없군요. 그리고 여러분들도 지금 저희와 함께 가서 조사를 받으셔야겠습니다.”

말이 조사지, 결국 마약 밀수 혐의로 강제로 구속수사 하겠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냉담하게 말했다.

“대체 미국 시민권자를 체포하겠다는 건 어느 나라 법인가요? 그걸 원하면 우리 미합중국 대사관에 연락하세요. 당신들에게 우릴 체포할 권한은 없으니까요.”

“미 시민권자?”

그러자 검찰이 당황한 반응을 보이며 즉시 신분 조회에 들어갔다. 그리곤 엘레나와 리스티가 미합중국의 시민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가 받은 지시는 KM사의 사장을 구속 수사해서 정신적 압박을 가하란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인이란 말만 들었을 뿐, 그들 일행에 대해선 들은 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검찰은 즉시 잘못은 인정하고 사과하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측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됐어요. 사과는 됐고, 어서 이 사람들이나 물리시죠? 언제까지 저희 방을 뒤질 생각이죠? 정 수색하고 싶으면 증거를 갖고 와요. 지금처럼 신고자가 있다는, 확실치도 않은 허울 좋은 핑계를 대지 말고.”

엘레나가 뾰족한 말로 쏘아붙였지만, 검찰도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온 이상 미국 시민권자가 있다 하더라도 얌전히 돌아갈 순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진짜 목표는 두 여성처럼 미 시민권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쪽에 계신 분은 한국 국적이시군요. 저희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일단 가서 조사를 받고 혐의를 벗게 되면 곧바로 풀려나실 겁니다.”

이진운만큼은 어떻게든 끌고 가겠다고 우기는 검찰의 모습에 엘레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논리도 근거도 없는 이들의 구속수사 방식에 하도 기가 막혀서였다.

“정말 어이가 없군요. 제대로 된 혐의도 밝히지 않으면서 무조건 구속수사하겠다고요? 그것도 미 시민권자가 아니고, 한국 국적을 가졌다고 해서 법도 뭐고 없이 당신들 맘대로요?”

“······.”

검찰도 자신들이 억지를 부린다는 걸 알고는 있는지,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물러서지 않는 걸 보면 구속수사의 뜻을 접진 않은 듯했다.

그래서 엘레나는 한발 앞으로 나서서 유태진 앞을 가로막듯 섰다. 그리고는 검찰과 주변의 경찰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 나라가 어떻게 민주주의 위에 성립된 법치주의 국가인지 의심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군요. 만일 지금 이분을 데려갈 생각이라면 대사관을 통해 확실히 따질 겁니다.”

그러자 검찰과 경찰들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엘레나가 대사관까지 언급하며 따져오니 자신들 입장이 곤혹스러워서였다.

“엘레나 씨, 여긴 한국입니다. 엘레나 씨는 미국 시민권자라서 이번 구속 수사에서 제외됐지만, 이진운 씨는 아닙니다. 그는 엄연히 한국 국적을 갖고 있죠. 대사관을 통해 항의하신다고 하셨는데, 검찰의 구속 수사에 타국 대사관이 간여하는 건 내정간섭입니다.”

그들은 이곳이 한국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구속수사의 합당함을 주장했지만, 그 정도로 엘레나는 코웃음으로 되돌려 주었다.

“결국 내정 간섭까지 나왔네요. 법도 무시한 강압수사 주제에 참 변명도 많아요.”

정곡을 찌르는 그 말에, 검찰과 경찰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금까지 부당한 수사를 수없이 저질러왔던 자신들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지적당하는 일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미국 시민권자이니 뭐라 압박하기도 어려웠다.

엘레나는 그들이 그런 비겁한 모습에 차가운 조소를 짓고는,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보란 듯 내밀었다.

“물론 이분이 평범한 한국 국적의 사람이라면 그렇겠죠. 이걸 좀 보시죠?”

그것은 한 장의 서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의 연방정부가 한 사람의 신분을 보증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이를 본 검찰과 경찰들의 얼굴 위로 경악의 감정이 떠올랐다. 심지어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이 넘어갈 듯한 반응을 보인 자들도 있었다.

“허억, 이건!?”

“며··· 명예 시민권자라고!?”

“이런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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