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43화 (244/448)

10권-18화

* * *

서일태 부회장의 허락을 받은 서상훈은 곧바로 신화 호텔로 향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 중에는 기자들도 있었고, 이번 TPU와 관련된 산업에 종사하는 거물들도 적지 않았다.

서상훈을 보좌하던 자들도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깜짝 놀라 외쳤다.

“허, 엄청나잖아? 이게 다 그 TPU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란 거야?”

“그럴 수밖에. TPU는 대체할 수 있는 게 전혀 없잖아.”

“저긴 인텔이고, IBM에 구글, 록히드 마틴? 세계적인 기업들이 죄다 모였네.”

“근데 록히드 마틴 같은 회사들은 뭐야? 반도체나 컴퓨터와는 관련도 없는 곳인데.”

“멍청하긴. 전투기나 항공기의 항법장치에는 반도체 안 들어가?”

“아, 그렇군.”

그들의 면모를 확인하게 된 서상훈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한국에서는 세화 그룹이 수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저런 국제적인 기업들과 비교하면 한끝 발 쳐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계약이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반도체 산업과 관련된 기업들이 몰릴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을 했었다. 하지만 이건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평소에는 보기조차 힘든 거물들이 직접 나서지 않았는가. 적어도 아버지인 서일태 부회장이 직접 나서야 겨우 급이 맞을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일단 왔으니 시도는 해 봐야겠지.”

각오를 다진 서상훈은 입술을 깨물며 다른 기업의 임원들과 마찬가지로 신화 호텔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이번 TPU를 세계에 내놓은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다.

‘상당히 젊군.’

이진운이란 자는 상상 이상으로 어렸다. 많이 쳐준다 해도 30대 초반이라 짐작되는 얼굴이었다.

‘내가 듣기로는 20대 중반 쯤이라고 했는데, 이런 거물들을 앞에 두고도 저리도 여유로운 모습이라니. 보통 내기는 아니야.’

솔직히 말해 그동안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온 서상훈이라 해도 저런 거물들을 앞에 두고 태연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진운이란 자는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우연찮게 기술 하나 개발해서 순식간에 신분향상을 이룬 자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의미였다.

“우선 저 하나를 보고자 이 먼 곳까지 와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수십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오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평이한 첫 인사를 시작으로 이진운은 본격적으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잘한 미사여구 따윈 끊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지요. 여러분들이 절 찾아오신 이유는 잘 압니다. 아마도 위탁생산이나 라이선스 계약 때문이겠죠?”

“그렇소.”

“물론이오.”

사람들의 대답이 들려오자, 이진운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 KM사는 TPU라는 희대의 반도체를 개발했지만, 이걸 굳이 독점할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전 세계가 필요로 하는 물량을 대량 생산할 설비도 없고 말이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대하신 것처럼 위탁 생산을 하고자 합니다.”

“오!”

기대했던 말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일부는 불만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럼 라이선스 계약은 불가능합니까?”

“이것도 저희 쪽에서 많이 양보한 겁니다. 그 이상은 어렵군요. 기술 자체가 특수하다 보니 저희 쪽에서도 어느 정도 관리를 해 줘야 합니다.”

누군가가 던진 물음에, 이진운은 딱 잘라 말했다. 위탁 생산은 말 그대로 생산을 위탁하는 계약이니만큼 여러모로 간섭할 여지가 있지만, 라이선스는 한번 계약하고 나면 통제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라이선스 계약 자체를 배제해버린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위탁 계약을 원하시는 분들과 상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상담은 방문하신 순서대로 할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그 뒤부터 각 기업의 임원들은 이진운과와 면담을 거친 뒤 절차대로 계약을 맺어 위탁생산을 위임받았다.

기존의 전자나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이 한꺼번에 도산하는 걸 막고자 하는 건지, KM사는 제법 인도적인 차원에서 계약을 맺어준 것이다.

계약 조건도 생각보다 괜찮아서, 자체 개발하던 때보다 오히려 더 큰 수익이 날지도 모른다고 기대감을 높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세화 그룹은 그 대열에서 제외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의 전자, 반도체 기업들 중 유일하게 위탁생산에서 배제된 회사가 세화 전자였던 것이다.

서상훈은 표정 관리하는 것조차 잊고 불쾌하다는 듯 따지기 시작했다.

“대체 이유가 뭡니까? 왜 우리 기업만 배제된 겁니까?”

“회사의 불안정 때문입니다. 세화 그룹이 요즘 위태롭다지요? 자금 흐름도 막히고, 심지어 대출상환 연기도 취소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병환 중인 유문택 회장님께서도 실종됐다고 하니, 어떻게 위탁생산을 맡기겠습니까?”

“그걸 어떻게···?”

서상훈은 상대방이 던진 그 말에 허를 찔린 표정이 되었다. 유문택 회장의 실종 소식은 세화 그룹 내에서도 자신과 서일태 부회장, 그리고 몇몇 측근들만 아는 기밀이었다.

헌데 그것이 어떻게 KM사의 이진운의 귀에까지 들어갔단 말인가?

“계약을 하고 싶다면 일단 회사부터 안정화시키세요. 계약은 그 다음입니다. 위태로운 회사에 저희 TPU를 생산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 회사는 KM사의 이름으로 불량품이 쏟아져 나오는 걸 바라지 않으니까요.”

“크··· 지금까지 반도체 분야를 주도해 온 세화 그룹에 불량품이라니요! 지금 우리 세화 그룹을 비웃으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저희는 좀 더 냉정하게, 저희 제품을 좀 더 확실하게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을 원할 뿐입니다. 그게 전붑니다. 세화 그룹에 대해선 어떠한 감정도 없으니 이만 돌아가시지요.”

그렇게까지 딱 자르는 이진운의 태도에, 서상훈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씁쓸한 감정을 뒤로한 채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인 서일태 부회장 앞에 와서 그 일을 일일이 털어놓았다.

“그래서 너만 맨손으로 돌아왔다?”

“도무지 말이 먹힐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무능한 놈. 지금까지 후계자 교육 받은 게 다 쓸데없었구나.”

서일태 부회장은 아들을 한심스럽다는 듯 바라보면서 혀를 차고 말았다. 다른 기업들은 죄다 계약한 위탁생산을 세화 그룹만 받아오지 못한 게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직접 나서마.”

그렇게 결정을 내린 서일태 회장은 곧바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화를 마친 서일태 부회장은 그 즉시 신화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그 정문에서 두 거물을 맞이하게 되었다.

“오, 서 부회장. 어서 오시게나.”

“역시 제시간에 도착했구먼. 반갑네.”

그들은 바로 현 정부의 정책을 이끌어나가는 미래과학부장관과 경제부 장관이었다. 서일태 부회장은 이들을 앞세워서 이진운을 설득할 셈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먹은 돈이 있어서인지, 그들은 서일태 부회장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상황이었다.

그 두 사람을 대동한 서일태 부회장은 이진운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는 이진운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되자마자 일단 두 장관부터 소개했다.

“세화 그룹의 서일태라고 하네. 부회장 직을 맡고 있지. 그리고 이 두 분은 현 정부의 경제부 장관님과 미래과학부 장관님이시지.”

“대단하이. 그 TPU하나로 세상이 깜짝 놀라더군. 자네 덕분에 한국인의 저력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어 기뻤네.”

“우리 한국에서 이런 인재가 났다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러웠네. 자넨 이 나라 국민들의 영웅이야.”

두 장관은 과장된 말투로 이진운을 추켜세웠다. 일단은 애국심을 고조시키기 위해서는 이 정도 밑밥은 필수였다.

물론 그가 보통 젊은이였다면 그런 칭찬에 어쩔 줄 몰라 그 의도대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진운은 절대 평범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부족한 제게 너무 과분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렇게 겸양하면서 여전히 냉정한 모습을 유지하는 상대의 모습에, 오히려 두 장관이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들도 산전수전 다 겪은 자들인 만큼 금세 안색을 회복했다.

그리고 미리 약속했던 대로 이진운을 설득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야기는 들었네. 자네가 세화 그룹과의 계약을 거절했다고?”

“그렇습니다. 지금의 세화 그룹은 자금 사정도 불안하고, 주가도 위태롭습니다. 심지어 회장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죠. 저희 KM사는 그런 기업에 위탁 생산을 맡길 순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 계약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주가야 세화 그룹이 TPU 위탁생산 계약만 하면 금세 회복할 수 있는 문제일세. 그리고 유문택 회장이 실종되었어도 여기 서일태 부회장은 세화 그룹을 훌륭하게 이끌어 나가고 있네. 잠시 위기가 오긴 했지만 자네만 협조해 준다면 얼마든지 호조로 만들 수 있어.”

하지만 그런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진운의 반응은 사뭇 냉정했다.

“흐음, 제가 왜 그래야 하는 겁니까? 저희 KM사는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죠. 굳이 세화 그룹의 사정을 봐줘가며 계약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허어··· 자네도 우리와 같은 한국인 아닌가. 한국을 위해 세화 그룹을 좀 도와주게. 세화 그룹은 한국 내에서도 수위에 드는 대기업일세. 세화 그룹이 위태로워지면 한국 경제가 흔들려. 그리고 민생도 불안해지지. 그걸 막기 위해 우리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일세.”

“그렇네. 한국에서 세화 그룹의 위치는 꽤 중요한 편이지. 자네가 도와준다면 이 일 잊지 않겠네.”

두 장관은 경제와 민생까지 들먹여가며 이진운을 꼬드겼지만,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한국의 경제나 민생 안정은 저희 관심사가 아닙니다. 정 그러시다면 저도 한 가지 제안을 하지요.”

한국의 경제나 민생 따윈 관심 없다는 그 말에 일순 발끈 할 뻔했던 두 장관은 그 뒤에 흘러나온 제안이란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 제안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세화 그룹이 반도체 부문을 저희 KM사에 매각하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자금 유동성 문제는 물론, 대출상환 연장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텐데요.”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도체 부문 매각 제안에 두 장관과 서일태 부회장은 말 그대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뭣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매각이라니!”

“세화 그룹에서 반도체가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

두 장관은 기가 막힌다는 듯 그렇게 내뱉었다. 그렇게 세화 그룹을 도와달라고 이야기 했더니, 이건 세화 그룹을 집어삼키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서일태 부회장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반도체 부문은 세화 그룹에서 무려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네. 그걸 매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 말에 서늘한 미소를 지은 이진운은 단언하듯 말했다.

“해야 할 겁니다. 매각하지 않으면 세화 전자의 주식은 곧 휴지조각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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