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42화 (243/448)

10권-17화

“제기랄!”

화가 치민 서일태 부회장은 손에 집히는 대로 집기들을 죄다 집어던졌다. 그렇게 방을 한바탕 쑥대밭을 만들고서야 겨우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모든 게 엉망이로군.”

계획했던 모든 게 망가져 버렸다. 세화 그룹을 차지하려고 주가를 떨어뜨리자마자, 대출상환 연장이 죄다 막혀버렸고, 투자용으로 예비해 두었던 사내유보금까지 사용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덕분에 그룹의 자금 흐름에 경색이 생겨났고, 이젠 회장 자리는커녕, 주주들의 비난을 무마하는 것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헌데 이번에는 세화 그룹의 주력을 박살내는 신기술 제품의 등장이라고?

이건 뭘 어떻게 해볼 도리조차 없는 물건이었다.

기술력 차이도 어느 정도여야지, 적어도 수십 년 미래에나 나올 법한 물건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 나왔단 말인가.

그래서 전문 연구인력들을 동원해 기술력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분석해 보게 했지만, 현재 세화 전자가 가진 기술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다는 답만 전해 듣고 말았다.

이래서는 세화 그룹의 주력 산업인 전자 쪽은 망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어떻게 차지하고자 했던 회사인데!”

그래서 고민 끝에 간신히 결론을 내놓았다.

“정 안된다면 저 TPU의 위탁생산 계약이라도 성사 시켜야 해!”

지금의 세화 전자의 기술력으론 도저히 따라 갈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항할만한 기술을 개발하거나, 전자 산업을 포기하고 새로운 업종으로 전환 할 시간을 최대한 벌어야 했다.

그러니 그 전까지 세화 전자가 보유한 공장과 설비가 가동을 멈추게 할 순 없었다.

“일단 저 KM인가 뭔가 하는 회사부터 조사해 봐야겠군.”

서일태 회장은 저 KM이란 회사가 의심스러웠다.

지금까지 전자나 반도체 계통에서는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던 회사였다. 어떻게 저만한 제품을 개발해낼 수 있는 저력을 가진 회사가 지금까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 그 점도 도통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이해가 가든 안가든, TPU란 반도체 기술 자체는 실존하고 있으니 KM사의 존재 여부 자체는 부정할 수 없었다.

“휴우, 엎친 데 덮친 격이라더니··· 오랜 숙원이 이뤄지려는 이때 하필 이런 재앙 같은 일들이 연거푸 발생할 줄이야.”

한숨을 내쉰 서일태 회장은 곧바로 KM사의 연락처부터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저 TPU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될 회사들은 전 세계에 걸쳐 무수히 존재할 터.

어떻게든 위탁생산 계약을 따내려면 최소한 그들보다 앞서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서일태 회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TPU라는 희대의 신개념 반도체가 지구상에 탄생하게 된 계기는 바로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 * *

TPU가 전 세계에 발표된 이후, 세상은 크게 들썩거렸다. 이건 단순한 신기술 정도가 아니었다. 컴퓨터와 스마트 폰 등 디지털 기기들이 사람들의 일상 속에 널리 대중화가 된 지금의 21세기 사회에서 TPU는 수십 년 이상 지나야 당도할 미래의 발전상을 현재로 앞당겨올 수도 있는 진화의 키워드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TPU가 세상에 좋은 영향만 미친 건 아니었다. TPU의 출현은 수많은 파장을 남겼고, 그 중에는 기존의 전자나 반도체 등 그에 관련된 업종들에 대한 피해도 적잖았다. 기술에서 뒤쳐진 기업은 자연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KM사를 향해 수많은 문의와 제안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문서화 되어 엘레나 앞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다.

“대단한 기술인 줄은 알았지만 파급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이건 상상 이상이에요.”

엘레나는 자신이 느낀 놀라움을 솔직하게 표현했지만, 리스티는 별것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해줬다.

“솔직히 말해 시시하기 짝이 없는 기술이야. 연합이 시작됐던 1000년 전에도 구닥다리로 취급받던 개념의 기술인걸. 지구같이 5레벨 문명에도 들지 못한 곳이 아니면 거들떠 볼만한 물건이 못 돼.”

그랬다. 지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TPU를 만든 주인공은 바로 다름아닌 리스티였다. 아주 오래 전 연합에서 사용했었던 TPU의 개념을 지구의 기술력에 맞게 적당히 어레인지 해낸 것이 지금의 TPU였던 것이다.

리스티는 급조해서 만들어낸 TPU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유태진이 의도한 상황을 이끌어내기엔 충분했다.

“어쨌든 그 덕분에 세화 그룹의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어. 이제 서일태 부회장도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 됐겠지.”

“하긴 경영 위기라 할 만한 상황이니까요. 의도적으로 주가를 폭락시켰던 상황에서 대출상환 연장이 막혀버린 것도 모자라, 그룹의 주력 산업이 초토화 될 지경이니 말 다했죠. 이제 그 사람이 선택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진운의 말에 리스티도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이제 세화 그룹이 위기를 벗어날 길은 단 둘 뿐이다. 주력이었던 전자와 반도체 산업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위탁생산 계약을 따내 업종 변환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일태 부회장에게 선택지는 그 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 회장 자리를 노리고 지금까지 온갖 수작질을 다 부려온 작자지. 회장 자리를 차지하려면 주주들에게 신임을 얻어야 할 테니 어떻게든 계약을 따내려 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놔둘 순 없죠.”

“당연하지.”

애당초 유태진과 리스티가 TPU란 신개념 반도체를 내놓은 것도 세화 그룹과 서일태 부회장을 궁지로 몰기 위해서였다.

유문택 회장의 병세로 인한 주가 폭락에 이은 TPU에 의한 주가 폭락. 그리고 대출상환 연장 거부에 그룹의 반도체와 전자 산업의 위기.

이런 악재들이 겹친 이상 서일태 부회장이 회생할 길은 KM사의 위탁협력업체로 거듭나는 길 뿐이다.

* * *

TPU는 혁신이란 차원마저 넘어선 신개념의 반도체였다. CPU와 램, 메인보드 그래픽 카드를 통합해 명함 하나 크기만 하게 줄일 수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터무니없는 일인 것이다.

스마트폰만 해도 그렇지 않던가? 손바닥만 한 작은 핸드폰 안에 수많은 기능이 첨가되면서 무수한 가능성들을 만들어냈다. 하물며 TPU를 통해 기존의 부품들을 통합하여 더욱 소형화를 거친다면 얼마나 고성능의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 여파는 일상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과학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 고루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 중에서 특히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우주와 병기 관련 분야였다. 예를 들면 기존의 것보다 더 작으면서도 월등한 성능의 슈퍼컴퓨터를 만들 수도 있었고, 지금보다 더 정묘한 탄도 미사일도 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전자에 관련된 기업들은 물론 각 국가기관까지 TPU에 주목하게 되었다.

“대체 KM사 어떤 곳이야?”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기업에서 이런 신기술이라니? 믿을 수가 없어!”

“기업은 미국에 있는데, 회사의 주인이 한국 출신이군.”

“사장이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엄연히 미국 기업이야. 이거 함부로 손쓰기 곤란하겠는데?”

“그러게 말이야. 젠장, 미국 정부에서도 적극 보호하는 것 같아.”

“하긴 이만한 신기술을 미국에서 그냥 방치해 둘리 만무하지. 사장도 조만간 시민권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드러난 KM사는 자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작은 회사였지만, 어느 누구도 섣불리 건들지 못했다. 미국의 자국 산업 보호정책은 철저했기 때문이다. 특히 TPU만큼 파급력이 큰 신기술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허? 그곳 사장이 한국인이라고?”

“예, 이진운이라는 사람이더군요.”

아들이 전해온 소식에, 서일태 부회장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뜻밖이군. 우리와 같은 한국 출신이 그런 기술을 개발해낼 줄이야.”

지금까지 과학이나 의학 부문에서는 제대로 된 노벨상 하나 받아보지 못한 한국이었다. 그런데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TPU를 개발한 장본인이 한국 출신일 거라곤 미처 상상도 못했다.

허나 놀람도 잠시 뿐. 서일태 부회장은 다른 것들보단 일단 회사의 주인이 한국 출신이란 사실에 주목했다.

“미국 기업으로 등록되긴 했어도, 사장이 한국 사람이면 이야기가 다르지. 애국심을 들먹여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그러니까. 같은 한국인이란 점을 내세워서 계약을 따내라 이거군요. 하지만 요즘 시대에 그게 먹힐까요?”

서상훈이 우려하는 바도 일견 타당했다. 젊은 세대일수록 국가나 민족에 대한 애국심이 희박해지고 있는 시대였다. 애국심에 호소한다 해도 그게 얼마나 통할 것인가?

하지만 서일태 부회장은 아들의 생각과 달랐다.

“먹힐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한국인 대부분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애착 같은 게 많은 편이니까. 이 자도 그럴 게 틀림없어. 아직까지 국적이 한국인 것만 봐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지.”

TPU같은 기술을 개발할 정도의 능력자라면 제아무리 자존심이 대단한 미국이라 하더라도 언제든 시민권을 발급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한국에 어떤 애착이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럼 제가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애국심을 강조해 보죠.”

“그래. 잘 성사시켜 봐라. 이번 계약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킬 수만 있다면 이 세화 그룹을 완전히 우리 손에 넣을 수 있을 게다.”

서일태 부회장은 이번 위탁계약 협상의 전권을 아들인 서상훈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후계자 교육을 받은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후에 세화 그룹을 장악하고, 회장 자리를 물려받으려면 이런 큰 계약도 경험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기회를 준 것이다.

물론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때는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아들이 실패한 다음에 나서도 늦지 않으리란 계산이 있어서였다.

물론 한번 계약에 실패한 이상, 그 다음 계약은 조건이 더 불리하게 작용하게 될 테지만 그 정도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그런데 이진운이란 녀석은 대체 어디 있지? 역시 미국에 있나?”

“뜻밖에도 현재 서울의 신화 호텔에 머물고 있다고 하더군요. 간신히 알아냈습니다.”

“흐음, 한국에 들어와 있다 이거지? 그렇다면 대화를 해보기가 한결 더 수월하겠군.”

한국인 출신에, 한국 땅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면 이쪽에 어드밴티지가 더 크다. 주요 정부기관이나 고위 관료들을 그 이진운이란 자를 설득하는 데에 동원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들이 국가를 위해 위탁계약이 필요하다고 한 마디씩만 해줘도 보다 설득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진운이란 자가 한국출신인 만큼 어느 정도 압박도 좀 될 것이다.

‘뭐, 그 탐욕스런 작자들에게 박스 하나씩 돌려야 할 테지만, 그 정도면 전자산업을 포기하는 것보다야 싸게 먹히는 셈이지.’

서일태 부회장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꾸준히 뇌물을 먹여온 정관계 인사들의 명단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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