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16화
“정말로 완치가 됐구나. 태진아, 네가 말한 대로 완치가 됐어.”
눈시울마저 붉어진 유문택 회장은 유태진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만큼 자신의 회복이 경이롭고 놀라웠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난 것보다는 손자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크게 늘어났다는 사실이 더욱 기꺼웠다.
“그래, 이제 여한이 없다. 이제 앞으로 우리 손자가 장가가고 자식 낳는 것까지 보고 죽을 수 있겠구나.”
“그런 말씀 마시고 편히 쉬세요. 회복은 됐지만 기력까지 다 회복된 건 아니니까요.”
“오냐, 그러마.”
고개를 끄덕거리는 유문택 회장의 얼굴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잃어버렸던 손자가 돌아오고, 시한부 인생에서 완전히 해방되면서 수십 년 만에 심적인 안정을 되찾게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문택 회장은 깊이 잠이 들었다. 몸은 회복되었지만 치료되는 과정 중에 생긴 기력 손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분간은 수면과 휴식, 그리고 적절한 영양분 섭취를 통해 체력을 회복해 나가야 할 것이다.
잠든 유문택 회장을 방에 남겨두고 나온 유태진은 먼저 엘레나와 리스티를 찾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엘레나는 이미 가문으로부터 유태진과 관련된 세화 그룹의 사정에 대해 미리 들은 바가 있었는지 별반 놀란 기색이 없었고, 리스티는 유태진의 가정사보다는 다른 것에 흥미를 내보였다.
“흐음, 그러니까 그 서씨 일가를 응징하자 이거네요.”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놈들을 망하게 하는 게 내가 바라는 거지.”
“그와 동시에 세화 그룹도 아저씨 손에 넣는 거겠죠?”
“그래. 우주적인 기업들을 소유한 네 기준에서 보면 중소기업만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지구에서는 그럭저럭 행세하는 기업이야. 손에 넣어서 나쁠 것 없지.”
그렇게 결정 나자마자 리스티는 세화 그룹이 가진 분야와 회사 상황, 그리고 보유하고 있는 기술과 제품군에 대해 살피기 시작했다. 기업을 공략하려면 그 정도 조사는 필수였다.
“음, 아저씨 말대로 나쁘지 않네요. 어차피 지구권에 기술 이전을 하려면 적어도 최소한의 기반은 있어야 하니, 세화 그룹이 가진 기반들을 활용하는 것도 괜찮겠어요.”
그래봐야 리스티의 눈에는 크게 차지 않았지만, 어차피 지구에 이전해줄 기술들은 연합의 최신 기술들이 아니었다. 지구에서 사용하는 설비를 일부 업그레이드 하고, 일부만 새로 제작하면 그럭저럭 생산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우린 지구에 아무런 기반도 없잖아요?”
리스티의 말대로였다. 기업을 공략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자금과 재계에 대한 영향력이 필요했다. 이제 막 지구에 온 유태진 일행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엘레나의 도움이 필요한 거지.”
그렇게 말하면서 유태진이 엘레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녀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희 가문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얼마든지요. 가문에서도 스승님께 적극 협력해드리라고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려울 것 없겠군. 그럼 시작하도록 하지. 기업 사냥이란 걸 말이야.”
이진운은 서씨 일가를 떠올리면서 차갑게 웃었다. 로스차일드 가의 재력과 영향력, 그리고 지금까지 우주적인 기업들을 운영해온 리스티의 능력이라면 크게 어려울 것도 없었다.
* * *
서씨 일가는 최근 지분을 매입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유문택 회장이 병환으로 쓰러지면서 세화 그룹의 주가가 폭락했고, 그 틈을 노려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동안 제법 많이 매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완전히 장악하기엔 아직도 부족했다.
그만큼 유문택 회장의 영향력이 크게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화 그룹의 건립시초는 바로 유씨 가문이었고, 현재의 회장인 유문택이 3대째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서씨 일가가 회사를 장악한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해왔다. 유문택 회장의 하나뿐인 아들과 며느리를 교통사고로 위장해 죽이고, 그가 방황하는 사이 야금야금 그룹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금은 세화 그룹의 상당수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걸로도 부족했다.
그래서 입원 중인 유문택 회장의 병세에 대한 정보까지 외부로 퍼뜨렸다. 안그래도 폭락했던 주가는 더욱 폭락했고, 덕분에 서씨 일가는 지분율을 대폭 늘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술술 풀린다고 여겼던 이때,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00병원에 입원 중인 유문택 회장이 사라졌다는 소식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다 죽어가던 노인네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서씨 가문의 가주라 할 수 있는 서일태 부회장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비서가 송구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예, 목격자도 없고, CCTV에도 찍힌 게 없었답니다. 말 그대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무슨···.”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병세가 심각해 화장실조차 제 발로 가지 못하는 노인네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아무튼 샅샅이 뒤져봐. 그 노인네가 갈만한 곳은 전부 수색해보고, 혹시 모르니까 공항이나 배편도 조사해 봐. 해외로 나갈 생각인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회장이 실종된 건 철저히 함구시켜. 외부로 알려지면 곤란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비서가 나가자, 서일태 부회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다 잘되어가는 통에 그 노인네가 실종이라니. 혹시 이럴 경우를 대비해 손을 써뒀던 건가?”
유문택 회장이 시한부 인생이라 해도, 그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혹시라도 외부 세력과 손을 잡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다른 놈들이 다 죽어가는 노인네를 빼돌렸을 수도 있어.”
서일태 부회장은 그럴 경우조차 염두에 두기로 했다. 최악의 경우 세화 그룹의 지분을 쥐고 있는 외국 자본가 세력이 세화 그룹을 먹어치우기 위해 움직였을 수도 있었으니까.
헌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박차며 안으로 들이닥쳤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 사내는 다름아닌 서일태 부회장의 아들인 서상훈이었다. 그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외쳤다.
“아버지, 큰일 났어요!”
“이놈아! 갑자기 뭔 난리야? 그리고 아버지라니! 회사에서는 부회장님이라고 부르랬잖아! 아직도 공사 구분을 못하고 있어?”
서일태 부회장이 자식의 경솔함을 다그쳤지만, 서상훈은 그 말을 듣고 있을 정신이 아니었다.
“아버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지금 은행들이 우리 그룹 대출상환을 독촉하고 있다고요!”
“뭐야!?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상환 기간을 유예시켜준다고 해놓고는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서일태 부회장이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어느 기업이나 그렇듯, 세화 그룹도 막대한 대출을 받아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도 자금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때라면 별 탈 없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일부러 서씨 일가의 보유 지분율을 높이기 위해 소문을 퍼뜨려 주가를 폭락시킨 상황이었다. 자금의 흐름도 좋지 않은 지금, 대출금의 상환 유예가 막힌다면 그룹의 자금 흐름이 경색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부도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건 세화 그룹을 장악하려는 서씨 일가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은행장들은 뭐래? 왜 안 된다고 튕기는 건데?”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랍니다. 저희 그룹에 문제가 있어서 대출 상환을 연장해 줄 수 없다고 했어요.”
“이 미친 것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벌벌 기던 것들이,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서일태 부회장은 이를 갈아붙였다. 며칠 전에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세화 그룹의 이름 앞에서 간 쓸개 다 내줄 것처럼 굴던 작자들이었다.
헌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하루아침에 등을 돌려버린단 말인가?
그래서 서일태 회장은 즉시 전화를 걸었다. 세화 그룹과 거래하고 있는 은행장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건 일방적으로 외면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것들이 다 미쳤나! 내 전화를 거부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뭔가 우리 그룹을 노리고 작전에 들어간 느낌이에요.”
“이래선 곤란해. 사내 유보금이 제법 있지만, 대출상환을 하고 나면 올해 계획해둔 투자를 할 여력이 없게 되어버려.”
그룹이 계속 성장해 나가려면 지속적인 투자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 자금을 대출 상환에 써버리면 뒤쳐져 있던 동종의 기업들이 치고 올라올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씨 일가에게 치명적인 결과로 되돌아올 게 분명했다.
현재 병환으로 몸져 누운 유문택 회장 대신 그룹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은 서일태 부회장이었다. 그 말은 현재 그룹의 운영에서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서일태 부회장이 지게 된다는 의미였다.
‘위기로군. 이러다간 주주들이 날 회장으로 밀어주지 않을 수도 있어.’
서씨 일가의 지분 비율이 많이 높아지긴 했지만 그래봐야 20%도 못 되었다. 외국계 자본이 30%정도였고, 유문택 회장이 20%, 그리고 나머지 30%가 국민연금과 여러 국가 기관, 그리고 개미주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주가가 폭락하고 있는 지금 주주들이 난리인 상황인데, 여기에 대출상환마저 어려워지면 주주들은 회장대리를 맡고 있는 서일태 부회장을 문책할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알아봐! 뭣 때문에 연장을 안 해 주는 건지,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확실히 알아와! 누군가가 우리 그룹을 말려 죽일 생각인 것 같다!”
“예!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조사해 보겠습니다.”
서상훈은 비장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그 자리를 나섰다.
하지만 그들에게 닥친 재앙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새로운 소식이 세계를 강타한 것이다.
[새로운 반도체 탄생! 기존의 반도체들을 통합한 신기원의 통합반도체!]
“이건 또 무슨!?”
서일태 부회장은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소식에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세화 그룹은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지만 주력은 전자 산업이었다. 그 중에서도 메모리 반도체는 세화 그룹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어떠한 조짐도 없이 튀어나온 저 괴물 같은 반도체는 뭐란 말인가? TV에서 그에 관련된 프로가 방송되고 있었다.
[이번 KM에서 나온 새로운 반도체 TPU라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겁니까?]
[뭐, 지금까지 컴퓨터에는 CPU, 램, 그래픽 카드, 메인보드 다양한 장비들이 조립된 형태였죠. 하지만 TPU(종합처리장치)는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컴퓨터의 주요 기능들이 이 작은 카드만한 칩 안에 다 들어간 셈이죠.]
[놀랍군요. 하지만 그렇게 하나에 다 우겨 넣으면 성능이 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하하 그럴 리가요. 지금 인텔에서 최신형으로 나온 CPU나 램에 비해 적어도 5배 이상 뛰어납니다. 그래픽 연산도 그에 버금가죠. 그리고 발열량은 기존의 1/10에 불과하고요. 오히려 지금 시대에 비해 너무 오버스펙이 아닌가 걱정될 정돕니다.]
[그야말로 오버 테크놀러지군요. 어떻게 그런 기술이 가능한 겁니까?]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럴만한 기술지원이 있었다고 이야기 해드리지요. 당장은 밝히기가 어렵군요.]
[하하··· 정말로 외계인이라도 가둬두고 고문이라도 하고 계신 겁니까?]
[오, 고문은요. 아주 융숭하게 대접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이런저런 기술들도 전수받고 있지요.]
마지막엔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서일태 부화장은 그 농담이 결코 유쾌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는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저 TPU라는 것은 세화 그룹이 가진 전자 산업의 기반을 망가뜨리고도 남는다. 저것 하나만으로도 세화 전자가 주력으로 내놓고 있는 메모리와 AP까지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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