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40화 (241/448)

10권-15화

한동안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를 내보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때는 설마 했었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의심이었지, 아무리 찾아도 별다른 증거가 나오지를 않아서 결국 의심에 그치고 말았었다. 헌데 그 의심이 전부 사실이었다는 게냐?”

“예, 로스차일드 가에서 조사한 내용이 그렇더군요.”

유태진은 모듈밴더의 홀로그램 창을 열어 조사 내용을 보여주었다.

서씨 일가의 사주를 받아 교통사고를 일으켰던 사람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태진을 노을 보육원에 버린 뒤, 출국 금지가 내려지기도 전에 가족과 함께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리곤 신분까지 완벽히 세탁한 채 지금까지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

결국 외국으로 도주한 범인을 잡을 수 없게 된 경찰은 이 사건을 뺑소니로 단정 지어 종결시켰다. 외국으로 나가 신분 세탁까지 끝낸 범인을 찾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아들과 며느리, 손자까지 휘말린 참사에 충격이 커서 상황을 냉정히 살필 겨를조차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여러 모로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았다.

사고가 벌어진 이후, 서씨 일가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회사를 장악하는 데에 전념했다.

뺑소니 사건으로 세화 그룹의 주가가 폭락한 것을 기회로 주식시장에 쏟아진 매물들을 쓸어 담아 지분율을 높였으며, 본사는 물론 계열사의 각 요직에 자신의 측근들을 박아 넣었다.

그런 식으로 그룹을 야금야금 장악해나갔고, 지금에 와선 서씨 일가의 영향력이 유문택 회장을 넘어서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솔직히 말해 회사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물려줄 후손도 없는데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 하지만 너도 돌아왔고, 그 죽일 놈의 서씨 일가가 저지른 짓을 생각해서라도 이대로 가만있을 순 없겠구나.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할아버지께 죄송한 말이지만 세화 그룹 따윈 지금의 제겐 별 의미가 없어요. 지금 제가 벌어들이고 있는 재화만 해도 지구 하나를 사고도 남을 정도니 말 다한 셈이죠.”

“허어··· 그 정도더냐?”

유문택은 입을 쩍 벌리며 놀라워했다. 손자가 연합에서도 수위에 드는 강자임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헌데 재력까지 그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더 놀라운 건 손자가 연합에서 활동한 기간은 고작 2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유태진의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제게 별 것 아니라 해서 그자들의 손에 넘어가게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니 조만간 손을 쓰도록 하지요.”

“그래, 잘 생각했다. 네 부모가 원통하게 세상을 떠나게 된 걸 생각하면 그 고약한 것들을 가만 놔둘 수 없는 일이고말고.”

유문택은 손자의 결정에 기뻐하면서 분개했다. 서씨 일가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다.

“그보다는 할아버지 건강부터 찾는 게 좋겠군요. 서씨 일가 따윈 제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처리할 수 있지만, 할아버지는 아니니까요.”

“내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이대로 무리하지 않고 몸조리 하다 보면 그럭저럭 일 년은 살 수 있겠지. 그보다는 죽기 전에 그놈들이 패망하는 꼴을 보고 싶구나.”

“그건 걱정 마시고 일단 병부터 치료하도록 하죠. 이제야 겨우 만났는데 앞으로 오래 사셔야죠.”

유태진의 그 말에 유문택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말해 이 할아비 오래 못산다. 대외적으로는 간암 2기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 말기에 이르렀지. 게다가 전이까지 되서 연명 치료를 해도 쉽지 않은 상황이야. 워낙 전이가 많이 돼서 간이식도 힘들어.”

“병세가 그 정도로 심각하셨군요.”

“그래서 다 포기하고 있었지. 그런데 네가 찾아온 거란다. 휴우···.”

유문택은 저도 모르게 탄식하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어도 상관없다고 여겼었다. 자식도 죽고, 손자까지 잃어버려 되찾을 길조차 보이지 않는 삶 따윈 그만 끝내는 것이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적이 일어났다. 잃어버렸던 손자가 스스로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기쁘면서도 안타까웠다. 이제 자신의 수명은 최대한 연명해봐야 1년 남짓. 다시 만난 손자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도 짧았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은데··· 적어도 이 녀석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것까진 보고 가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건 불가능하겠구나.’

새삼 치솟는 삶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려던 그때, 이진운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놓았다.

“할아버지, 병에 대해선 더 이상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암 정도는 얼마든지 치료 할 수 있으니까요.”

“뭐?”

“지구 기준에서야 치료가 어렵지만, 우주에서 보면 크게 어려울 것도 없죠. 지구와는 과학 기술은 물론 의학 수준도 차원이 다르니까요.”

“그··· 그렇구나.”

유문택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받았다.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다.

워낙 상태가 심해서 간이식조차 불가능한 자신이 회복될 수 있다니···.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진운이 몸담은 연합이란 곳은 수천수만 광년의 우주를 자유롭게 누비고, 지구보다 더 큰 행성들조차 박살낼 수 있는 과학력을 가진 거대한 우주 세력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곳의 의학은 얼마나 더 대단할 것인가?

그제야 삶의 희망이 보였다. 이제 겨우 만난 손자를 남겨두고 죽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허허허···.”

유문택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던 자신이, 이젠 삶을 갈구하게 될 줄이야.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꿈이라면 차라리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싶었다.

* * *

할아버지와 대면한 유태진은 그를 보육원으로 모셨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윤재민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암을 제거하는 건 내공의 힘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암을 제거하면서 남는 장기의 손상은 내공으로는 바로 회복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냥 모셔간 건 아니었다. 이미 서씨 일가는 유문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상황. 이대로 모셔갔다가 행적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직접 손을 썼다. CCTV를 조작해 자신이 온 흔적을 지우고, 마법으로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해서 오늘 면회 자체를 없던 걸로 만든 것이다.

병원 원장은 물론 이사장에게까지 손을 썼기 때문에, 오늘 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보육원에 도착한 뒤 유태진은 윤재민에게 바로 할아버지를 보였다. 그러자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흐음, 확실히 지구에서는 손도 못 댈 상황이었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났겠는데?”

“그 정도로 심각했던 거냐?”

“전이가 좀 많이 심각해. CT나 MRI따위엔 발견이 되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퍼져 있어. 내가 볼 때 연명치료를 했다 해도 아마 1개월도 살기 힘드셨을 거야.”

“······.”

유태진은 일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지구에 도착하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영원히 할아버지를 보지 못할 뻔했다.

“먼저 전이된 암부터 제거할게. 그 다음에 간암을 손보자고.”

“그래.”

유태진은 윤재민과 함께 치료에 들어갔다. 윤재민 혼자서도 이 정도 병은 치료할 수 있지만, 유태진이 내공으로 돕는다면 훨씬 안전하고 수월하게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먼저 유태진은 할아버지의 몸에 진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는 윤재민이 알려주는 대로 암세포가 전이된 부분을 찾아 일일이 진기로 감쌌다. 그리고는 삼매진화의 원리로 암세포들을 태워 없앴다.

그렇게 하길 수십 차례. 무려 다섯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전이된 암세포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유태진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정말 쉽지가 않구나.”

“모함의 의료시설이 있었으면 간단했겠지만, 여기선 이런 방법이 최선이야. 그렇다고 병 때문에 달 뒤에서 대기 중인 전함을 부를 수도 없고.”

신성력으로도 암을 치료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이편이 더 깔끔했다. 그리고 암세포가 제거된 상태에서 신성력을 사용하면 그 즉시 회복시킬 수 있었다.

우우웅!

윤재민의 손에서 일어난 빛이 온화하게 유문택을 휘감았다. 그러자 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전이된 세포를 제거하느라 손상된 부위들이 빠르게 재생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번엔 간이야. 전이된 세포를 제거하고 체력까지 회복시켰으니, 충분히 치료할 수 있어.”

“그래.”

이번에도 유태진이 암세포 제거에 나섰다. 유문택의 간은 멀쩡한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엉망이었다. 이건 간이 아니라 암세포 자체가 덩어리를 이룬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유태진은 신중하게 진기를 흘려 넣어, 정상 세포와 암세포를 구분해 나갔다. 그리고 정상 세포들과 암세포를 서로 격리시켰다.

그 과정 중에 간과 암세포가 떨어져 나가면서 출혈이 생겼지만, 유태진은 그것마저 내공으로 감싸 막았다. 그가 평범한 무인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유태진은 땅을 뒤집고 하늘마저 가를 수 있는 현경의 고수였다. 진기를 이렇게 세밀하게 제어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정상 세포와 암세포를 격리한 뒤 암세포만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삼매 진화로 암세포들을 말끔하게 소멸시켜버린 것이다.

그 다음엔 윤재민 차려였다. 암세포를 제거하면서 너덜너덜해진 간을 완벽하게 재생시켰다. 솔직히 말해 암세포를 제거하고 난 뒤 남은 간의 비율이 정상적인 간의 5%도 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결과였다.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낸 윤재민이 완치를 선언했다.

“자, 치료는 완벽하게 끝났어. 이제 곧 의식을 되찾으실 거야.”

유태진은 할아버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숨소리도 고르고, 얼굴에도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이젠 병색이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간세포를 갑자기 재생시키느라 조금 마른 듯한 느낌이긴 했지만, 그건 당분간 식사를 잘 하면 금세 회복될 것이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제 할아버지는 더 이상 시한부 인생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할아버지를 성심을 다해 치료해준 윤재민에게 더없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맙다. 재민아.”

조용히 건넨 그 말에, 윤재민은 픽 웃고 말았다.

“형도 별 말을 다하네. 우리 사이에.”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윤재민도 유태진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서로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피는 이어지지 않았어도 그들은 친형제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드디어 병세에서 완치된 유문택이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뜨자마자 내뱉은 첫 말은 경악성이었다.

“이럴 수가!”

하루가 다르게 커져만 가던 고통은 완전히 사라지고, 온 몸은 날아갈 듯 가뿐했다. 그동안 자신을 좀먹어온 병세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건 유문택에게 있어 하나의 기적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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