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13화
* * *
보육원으로 돌아오니 식사가 한창이었다. 윤재민은 일행과 함께 다량의 식재료들을 사다가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었고, 그것들로 굶주려 있는 아이들을 먹이면서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요리사지망생이었던 윤재민은 어지간한 식당 요리사들보다 더 그럴듯한 요리를 할 줄 알았다.
“형, 왔구나. 형도 같이 식사하지 그래?”
돌아온 이진운을 발견한 윤재민이 식사를 권했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한 상황인지라 식욕이 있을 리 없었다.
이진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중에. 지금은 생각이 없다.”
“그래? 무슨 일 있었구나.”
윤재민은 그의 말투와 표정만으로도 외출했던 형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음을 알아챘다. 그래서 식사시간이 끝난 후 뒷정리까지 마무리한 다음에 이진운과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형, 무슨 일이 있었는데?”
윤재민의 물음에 이진운은 무겁게 한숨을 내쉰 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휴··· 재민아. 어쩌면 보육원이 이 꼴이 된 게 나 때문일지도 모르겠구나.”
“뭐? 그게 무슨 소린데? 형 때문이라니?”
이진운은 당황스런 표정을 짓는 윤재민에게 자신이 알게 된 사실들을 털어놓았다. 자신이 세화 그룹의 회장 일가 핏줄일 가능성이 높으며, 노을 보육원이 여러 방면으로 압박 받게 되면서 운영이 악화된 것도 다 자신 때문일 수 있다고.
다 듣고 난 윤재민은 조금 혼란스러워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볼 법한 일이 하필이면 이진운에게 벌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잠시 뒤, 마음을 가라앉힌 윤재민이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형은 어떻게 했으면 하는데?”
“솔직히 말해 핏줄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갓난아기 때라서 부모님에 대한 기억도 남아 있질 않고 말이야.”
돌아가신 부모님에겐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게 이진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사람에 대한 정은 함께 한 시간에 비례해 쌓이는 법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부모나 혈육에 대한 정이 갑자기 생길 리 만무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모를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참고 있을 순 없겠지. 더군다나 원장님까지 저렇게 만든 놈들인데 말이야.”
“우선은 확인부터 해 봐야겠지. 그 유문택 회장 일가가 정말로 내 혈육인지, 그리고 어떤 상황인지부터 내 눈으로 확인해 볼 생각이다.”
윤재민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신을 섬기는 성직자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착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하긴, 받은 게 있다면 되갚아 줘야죠.”
이진운을 남같이 생각하지 않는 윤재민의 눈도 덩달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 *
그로부터 이틀 뒤, 원장이 드디어 의식을 되찾았다. 그는 이진운과 윤재민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와··· 왔구나··· 네가 돌아 왔어. 그리고 재민이까지···.”
“···원장님. 저희 때문에 원장님이 이렇게···.”
“괜찮다. 괜찮아. 너희만 무사히 돌아왔으면 된다. 자 봐라, 이제 나도 자리 털고 일어나지 않았니.”
걱정하지 말라며 말은 그렇게 했어도 원장의 상태는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병세는 회복되긴 했지만, 워낙 기력이 쇠해서 말도 어눌했고 움직이는 것조차 힘에 부쳐 했다.
“대체 그동안 어디로 간 거야? 너도 그렇고, 재민이도.”
“이야기가 좀 복잡합니다.”
이진운은 자신을 자식처럼 키워준 원장에게까지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어,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놓기 시작했다.
다 듣고 난 원장은 믿기지 않는다며 중얼거렸다.
“허어··· 그런 일이. 세상은 널고 별의 별 일이 다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우주라니···. 이거 내가 무슨 꿈이라도 꾼 것 같구나.”
“저희도 처음엔 그랬죠. 하지만 다 현실이었습니다. 인베이더라는 괴물들도 그랬고요.”
“그리고 그 괴물들이 이젠 지구까지 쳐들어온다고?”
“예.”
“이 무슨 영화도 아니고, 이런 일이 다 있다더냐? 너희들이 내게 거짓말을 할 리도 없으니 전부 다 사실이란 건데··· 곧 세상이 발칵 뒤집히겠구나.”
혀를 내두르는 원장에게 이진운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원장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보육원도 엉망이고 아이들도 말이 아니더군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정부와 기부단체에서 지금까지 지급되던 운영지원금이 모두 끊겼어. 그리고 그걸 어떻게 해결하려다 보니 빚을 지게 되었지. 그런데 그 빚이 나도 모르는 새에 사체업자에게 넘어가 있더구나. 담보 설정했던 보육원 건물과 땅도 어느새 그놈들 손에 넘어갔고.”
“그랬군요.”
이진운은 담담한 척 말을 받았지만, 속은 천불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그 작자들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가만 둘 수가 없군.’
로스차일드 가에서 제공해준 정보 덕분에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원장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니 더욱 분기가 치솟았다.
“이제 어쩌면 좋으냐? 보육원이 넘어가게 생겼다. 이제 며칠 뒤면 아이들이 여기서 쫓겨나게 생겼어.”
이제 막 회복된 상태면서도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원장의 모습에 이진운이 다가가 그를 안정시켰다.
“원장님, 침착하세요. 이제 막 회복된 상태인데 그렇게 흥분하시면 해롭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가만있을 순 없잖니? 아이들까지 거리에 나앉게 할 수는 없으니 말이야.”
자신의 몸이 망가져 가면서도 여전히 아이들의 앞날만 걱정하는 그 모습에, 이진운은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다 알아서 해결할 겁니다. 이제 아시잖아요. 제가 어떤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고작 사채업자 따위는 문제가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거야 알지만··· 그렇다고 사체업자들을 죽일 수는 없잖니? 잘못하면 진운이 네가 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도 있어.”
이젠 원장도 이진운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잘 알았다. 아니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일반인에 불과한 사채없자들 따위가 어찌할 수 없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존재감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아니 2년 전에도 그런 분위기는 느꼈었지만, 이젠 그런 차원을 넘어섰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려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진운은 그런 원장의 염려에 픽 웃으며 말했다.
“처벌이요? 이 나라의 법이 과연 우주까지 효력을 미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그는 원장의 우려를 불식시키듯 분명하게 단언했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지구 같은 행성 쯤 하루아침에 멸망할 정돕니다. 고작 이 나라의 법 따위가 절 제제할 수 있을 리가 없지요.”
“······.”
너무도 광오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원장은 그 말이 사실임을 실감했다. 어려서부터 결코 허튼 소리를 한 적이 없는 이진운이었다.
그가 그렇게 단언한다면 그건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휴··· 네 뜻은 알겠다. 하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벗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물론이죠. 적어도 인간의 도리 정도는 지키고 살고 싶으니까요.”
이진운은 그렇게 말하면서 원장의 방을 나섰다. 아직 기력이 다 회복되지 않은 만큼 좀 더 휴식을 취하실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재민아, 넌 원장님과 아이들을 돌보고 있어. 난 좀 나가 봐야겠다.”
“알았어.”
왜 나가려 하는지 이유를 잘 아는 윤재민은 이진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리고 사채업자들이 찾아오면 붙잡아서 전부 실토하게 만들어. 원장님과 보육원을 건든 놈들이다. 결국 배후에 있는 놈들과 한패거리나 다름없으니 혹독하게 다뤄.”
“물론이야. 나도 참을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윤재민의 입가에 어린 차가운 미소에, 이진운은 별 염려 없이 보육원을 나설 수 있었다.
보육원의 정문을 나서기 직전, 레이첸이 불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또 혼자 가시는 겁니까?”
“그래. 좀 볼일이 있어서.”
“볼 일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아이들하고도 좀 놀아 주시죠? 아이들이 서운해 하던데요.”
“따로 시간을 내 보마. 지금은 어렵구나.”
“아무튼 잘 다녀오십쇼. 아이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으니 너무 늦진 마시고.”
레이첸은 그렇게 내뱉고는 이쪽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퉁명스런 표정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좀 뜻밖이란 말이야.’
레이첸은 툴툴거리면서도 아이들과 제법 잘 놀아주었다. 입과 표정으론 불만스런 기색을 보이면서도, 은근히 아이들의 요구대로 잘 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 다가가지 못했던 아이들조차, 이젠 다른 이들보다 레이첸과 더 가깝게 지냈다.
오히려 가깝게 지내지 못하는 건 리스티나 아리엔 같은 사회성 없는 녀석들이었다.
‘저런 걸 츤데레라고 하던가?’
문득 떠오른 실없는 생각에 이진운은 피식 웃고는 그 자리를 떠나갔다.
* * *
보육원을 나서자, 어제 만났던 사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사내는 한 장의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유전자검사서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 집안 친자가 맞다 이거군.”
“예. 확실합니다.”
역시 로스차일드 가문은 대단했다. 불과 며칠 지나기도 전에, 이미 사망한지 수십 년도 더 지난 이진운의 친부모의 유전자를 찾아내, 이진운과 비교 검사까지 해놓은 것이다.
덕분에 이진운은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어느 정도 확신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증거까지 나오니 자신이 정말로 유씨 가문의 핏줄임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유태진이라··· 이게 부모님이 지어주신 내 진짜 이름이라 이거지?”
이진운은 만감이 교차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십 년 만에 되찾은 자신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진운이란 이름으로 산 세월이 길어서인지,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성함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유진영이었고, 어머니는 김화란이었다.
부모님의 성함을 한동안 곱씹던 이진운은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일단 내 조부 되시는 분부터 찾아뵈어야겠군.”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서울의 00종합병원에 유문택 회장이 현재 입원 중이었다.
입원하게 된 병명은 간암 2기. 아직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지만 연로한 탓에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쇠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외부까지 널리 알려져 세화 그룹의 주가를 폭락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것도 그놈의 서씨 일가의 작품이라 이거지?’
놈들은 유문택 회장을 회장 자리에서 쫓아내기 위해 온갖 수작을 다 부렸다. 그토록 함구시켰던 유문택 회장의 병명이 외부로 퍼져나간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후계자조차 없는 유문택 회장으로 인해 주가가 폭락한 만큼 회장 자리에서 내쳐야 한다고 주주들을 설득해서 주주총회에서 결판을 지을 생각인 것이다.
“유회장 님께 가보실 겁니까?”
로스차일드 가의 정보원은 그렇게 물었다. 솔직히 로스차일드 가에겐 안중에도 없는 세화그룹의 회장인 유문택에게 유회장 님이라 존대해준 건 이진운을 존중해서였다.
이진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 기다란 차가 그의 앞에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보육원에 올 때 타고 왔던 그 리무진이었다.
“혹시나 해서 미리 차량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타시지요.”
이진운은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차에 탑승했다.
애당초 조부를 남들 몰래 만날 생각은 없었다. 이왕 만날 거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기억될 만큼 확실하게 새겨두고 싶었다.
난생 처음 만나는 조부에게 초라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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