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의 검은 우주를 가르고-237화 (238/448)

10권-12화

* * *

바에서 나온 이진운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보육원을 향해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진운은 바텐더에게 들었던 정보를 다시금 떠올리기 시작했다.

“네가 실종되고 나면서 연락이 4개월 이상 두절되자 노을 보육원 원장은 재단을 찾아갔었다.”

“재단을?”

“그래. 너와 연락이 닿지 않자, 가장 먼저 생각난 게 사일 재단이었겠지. 네 녀석이 실종된 뒤에도 재단에서 보육원으로 계속 입금시켜주고 있었으니까.”

“그랬군.”

사일 재단은 이진운이 보육원을 위해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의 대부분을 쏟아부어 건립한 재단이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보육원 운영에 필요한 자금만큼은 정기적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해둔 보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난 2년간 본의 아니게 지구를 떠나 있으면서도 보육원에 대한 염려는 크게 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재단에서도 마찬가지였지. 너의 종적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래서 보육원 원장은 돈까지 걸어가며 전국적으로 널 수배했다. 네가 살던 집에서 칫솔과 머리카락을 찾아내 경찰서에 DNA 등록까지 시켜 실종자 명단에 올렸지.”

“······.”

그리고 그 뒤의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지구에 존재하지 않던 자신을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 원장이 저렇게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 몸이 피폐해진 건지가 문제였다.

“그런데 원장님은 왜 저렇게 되신 거지? 마음고생이 심하시긴 했겠지만, 그 정도만으로 사람이 저렇게 되진 않아.”

이진운이 던진 물음에, 바텐더는 한층 더 조심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여기엔 좀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어. 너도 세화란 기업은 알고 있지?”

“알다마다. 한국에서 한 손에 꼽히는 대기업이잖아.”

“너희 원장님이 저렇게 된 데엔 거기와 깊은 연관이 되어 있다.”

“뭐? 대기업하고?”

이진운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세화 같은 대기업하고, 노을 보육원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혹시나 자신이 그동안 청부업을 하면서 생긴 원한 관계 때문인가 생각도 해 봤지만, 세화와 연관된 의뢰는 단 한건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물었다.

“설마, 내가 그동안 받은 의뢰 중에서 그곳과 관련된 게 있었나?”

“아니 그렇지 않아. 세화하고는 연관도 없었고, 애당초 문제될만한 의뢰는 네게 주지도 않았다. 이건 전혀 다른 문제야.”

“다른 문제라면?”

바텐더는 잠시 주저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을 뗐다.

“어쩌면 네 핏줄과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어.”

“핏줄?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지?”

이진운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고아인 자신에게 무슨 핏줄 운운한단 말인가?

전생의 기억 덕분에 아기 때부터 성인의 정신연령을 갖추고 있긴 했지만, 갓 태어났을 적엔 시각이나 청각이 발달하지 못해서 자신을 버린 부모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핏줄이라고?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고아인 건 아니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태어난 뒤에 버려지는 거지, 부모나 가족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

“설마 그 말은······!?”

“그래, 네가 그 집안 혈통일 수도 있어. 나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아직은 가설에 불과했지만, 바텐더는 그 가능성을 확신하는 듯 보였다.

그렇기에 이진운의 머릿속은 더없이 복잡해졌다. 이제 와서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핏줄에 대해 미련이나 아쉬움이 생긴 건 아니었다. 단지 의문이 들 뿐이었다.

자신이 그런 대기업의 핏줄이라면 왜 갓난아기 때 버려졌고, 그것이 왜 이제 와서 보육원 일과 연관이 되고 있다는 것일까?

그리고 세화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동안 청부업을 하느라 바텐더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신분 노출을 완벽에 가깝게 막아 왔었다. 대체 어디서 문제가 된 것일까?

“지금 세화 그룹에서 노을 보육원을 보이지 않게 전 방위로 압박하고 있다. 그리고 네가 세운 사일 재단 또한 마찬가지지. 지금은 다 뿔뿔이 흩어져 잠적해 버렸어. 자세한 건 아직 조사 중이지만 내 짐작으로는 세화 그룹에서 음성적인 힘으로 압박을 가해서 공중분해 시켜버린 것 같다.”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만일 그 집안 핏줄이 맞다면, 어째서 이런 짓을······.”

납득할 수 없다는 투로 말을 이어나가던 이진운은 잠시 멈칫 하고 말았다. 그의 머릿속에 돌연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설마, 내가 그 집안 핏줄이란 이유 때문에 그룹 내의 권력 다툼에 휘말린 건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현재 세화 그룹은 두 개의 파벌이 존재하고 있지. 유문택 회장과, 서정필 부회장. 그 둘이 그룹의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중이니까. 지금까지 세화 그룹의 회장직은 유씨 가문의 핏줄이 대물림 해 왔는데,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어. 서정필 부회장의 세력에 회장직을 빼앗기기 직전이지.”

“왜지? 계속 대물림 할 정도면 기반이 꽤 단단하단 소릴 텐데.”

“더 이상 대물림해줄 자손이 없어졌으니까. 유문택 회장은 이제 나이도 많아서 골골하는 형편이고, 그의 3대 독자 아들과 며느리는 이미 26년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리고 그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던 손자도 실종되었지. 이쯤 되면 대충 짐작이 가지 않나?”

“···그때 실종된 손자가 나란 소린가?”

이진운은 자신의 입으로 되뇌면서도 기가 막혔다. 무슨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자신에게 이런 출생의 비밀이 존재했다고?

“난 충분이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네 나이와 유문택 회장의 손자와 나이도 일치하고 네가 노을 보육원에 들어가게 된 시기도 거의 비슷해. 게다가 이번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것도 네 DNA가 경찰서에 등록되면서부터였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 유전자 정보가 세화 그룹에 들어갔고, 그 이후부터 압박이 시작되었어.”

“그러면 우리 보육원을 압박하는 것도 바로 그 서정필 부회장의 짓이겠군.”

이제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짐작이 갔다. 유문택 회장의 혈통인 자신의 존재가 껄끄러워서 주변을 압박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난 2년씩이나 실종되었었는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아마도 여러 가질 염두에 두고 압박하고 있었던 거겠지. 네가 재단까지 세워 가면서 아끼는 보육원을 압박해보면 종적을 감춘 네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을 거고,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화풀이는 된다는 계산이었을 테지. 난 그렇게 판단하고 있어.”

“이것들이···.”

이진운은 화가 치밀었다. 자신이 손을 쓰기만 하면 벌레보다 더 손쉽게 죽어나갈 것들이, 자신이 사라진 2년 동안 친인들에게 그런 고통을 주고 있었다고?

‘가만 둬선 안 되겠군.’

어쨌든 대략적인 자초지종을 파악한 이진운은 곧바로 바를 나섰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쳐들어가서 서정필인지 뭔지 하는 놈을 쳐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당장 죽여 봐야 놈에겐 가벼운 처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죽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처절한 아픔을 새겨주고 싶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이진운에게 접근해왔다. 이미 아까 전부터 따라붙던 자였다.

하지만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대충 누군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양복을 잘 갖춰 입은 동양과 서양의 혼혈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사내였다. 그 자는 품속에서 배지 하나를 슬며시 꺼내 보이며 말을 걸어왔다.

“이진운 님, 맞으시죠? 본가에서 나왔습니다.”

배지에는 이진운도 잘 아는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로스차일드 가의 문장이었다.

“무슨 일이지?”

“바텐더와 접촉하신 사실을 확인하고 이렇게 서둘러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필요하신 정보가 있으신 듯 보여서 말이지요.”

“벌써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었나?”

“예, 본가에서는 현재 이진운 님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를 취합해 둔 상태입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로 바텐더와 접촉하게 되셨는지도 대충 짐작하고 있지요.”

역시 세계를 주름잡는 가문다웠다. 이 먼 한국에 있는 자신의 개인 정보까지 벌써 확인해 뒀단 말인가.

“그렇다면 사정을 다 안다는 거군. 내 핏줄이 어떤 핏줄인지, 그리고 노을 보육원이 왜 이렇게 됐는지 말이야.”

“···예.”

“그럼 내가 알고 싶은 정보를 다 갖고 있겠군.”

“물론입니다.”

사내는 그 즉시 손톱보다도 더 작은 칩 하나를 꺼냈다. 흔히 사용되는USB보다 더 첨단화 된 데이터 기록 장치였다.

이진운은 그 데이터 칩의 내용을 모듈밴더에 연동시켜서 읽어들였다. 연합의 모듈밴더는 어떠한 단자나 단말기가 없어도 기록장치로부터 곧바로 데이터를 읽어 들일 수 있었다.

“역시 그랬군.”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해 이진운은 홀로그램 창 대신 망막투영 형태로 창을 띄워 그 자리에서 데이터의 내용을 확인했다.

그리고 알고 싶었던 사실들을 전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군. 내 할아버지인 유문택 회장이 먼저 경찰서에 등록된 내 DNA를 알게 되었고, 그게 하필이면 서정필 부회장에게까지 전해진 거군.’

그리고 그 뒤의 내용은 별 것 없었다. 유문택 회장은 여전히 이진운을 수소문하며 찾고 있었고, 서정필 부회장은 이진운을 존재 자체를 없애고자 했다.

그 일환 중 하나가 바로 노을 보육원에 대한 압박이었다.

유문택 회장도 서정필 부회장이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긴 했지만, 그는 이미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미 연로하여 오래 버틸 수 없는 몸인데다, 대를 물려줄 후계자도 없어서 회사의 중역들 대부분이 서정필 부회장에게 붙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헌데 이게 전부가 아니란 말이지?”

이진운의 눈동자 위에 살기가 맺혔다.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건네준 자료에는 26년 전에 발생한 교통사고에 대한 진실도 담겨 있었다.

그것은 서정필 부회장과 그 일가가 의도적으로 벌인 살인교사였으며, 그것을 통해 유문택 회장의 후계자를 제거함으로서 서씨 일가가 세화 그룹을 차지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통사고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이진운은, 교통사고를 사주 받은 자에 의해 보육원에 버려졌다. 본래 대로라면 이진운도 자신의 부모와 함께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지만, 사주를 받은 자도 살아남은 아기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긴 꺼려져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몰랐다면 모를까, 가만 둘 순 없지. 게다가 감히 보육원까지 손을 대다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새삼 핏줄에 대한 애정이나 애착을 느낀 건 아니었다.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부모나 할아버지에 대해 갑자기 애정이 생길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부모가 자신을 의도적으로 버린 게 아니라는 것이다. 더 이상 부모나 핏줄을 원망할 이유가 없었다.

이진운은 일단 보육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가서 원장의 상태를 확인한 후, 그 벌레 같은 작자들을 어떻게 처분할지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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