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25화
‘저 녀석 결국 따라왔군.’
지금까지 오직 연구에만 흥미를 보이며 전념해 왔던 리스티였다. 헌데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웬일로 지구로 따라오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이유를 물으니 별 것 아닌 대답이 돌아왔다.
“한번 보고 싶어서. 아저씨가 태어난 고향이라며? 원시적인 행성이라도 볼만한 게 있지 않을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였지만, 이진운은 그러려니 했다. 애당초 리스티는 기분파였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성격인데, 이번에도 크게 다를 것 없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여러모로 편해졌다. 그녀가 몇 번 조작하는 것만으로도 지구의 전자 시스템을 해킹하는 게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일단 로키산맥에서 내려온 일행은 가장 먼저 신분증부터 만들었다. 비행기를 타든 뭘 하든 하려면 우선 미국의 시민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행의 손 위로 하나씩 떨어져 내렸다.
“시민증이 이렇게 간단하게?”
윤재민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자신의 사진이 들어간,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미국의 시민증이었다.
“만드는 거야 간단하죠. 그냥 원소전환기를 통해 조합만 하면 끝인 걸요? 이런 형태의 조잡한 시민증이야 얼마든지 바로 찍어낼 수 있어요.”
리스티는 놀랍게도 자신의 아공간 안에 개인용 원소전환기까지 넣어두고 있었다.
몇몇 레어 메탈을 비롯한 진귀한 재료들 빼고는 현존하는 대부분의 원소와 물질들을 조합해 제조할 수 있으며, 심지어 원하는 형태로 가공해 만들어내는 것까지 가능했다.
하물며 이런 간단한 신분증 따위야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신분증을 확인해본 엘레나가 찬탄과 함께 우려를 내비쳤다.
“신분증은 완벽하네요. 위조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어요. 하지만 정부나 기관의 행정 데이터 시스템에 우리의 신분이 등록되지 않으면 이것도 의미가 없어요.”
제아무리 지구의 문명이 연합에 뒤떨어져 보인다 해도 대부분의 행정이 21세기에 들어와선 전산화 처리되어 있다. 즉 손에 쥘 수 있는 신분증만 그럴 듯하게 만든다고 해서 그들의 신분이 확실하게 증명되는 건 아니란 의미였다.
하지만 리스티는 그 정도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거야 간단하죠.”
그녀는 즉시 밴더의 홀로그램 창을 열었다. 그리고는 뭔가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작업한다고해서 딱히 손으로 뭔가를 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수많은 홀로그램 창들이 리스티의 주변에 저절로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연합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모듈밴더는 소유자의 뇌파와 영력에 반응하게 되어 있어 일일이 손으로 터치하지 않아도 조작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홀로그램 창은 말끔히 사라졌다.
“다 끝났어요.”
“네? 끝나다니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엘레나. 리스티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전산화 처리까지 다 마쳤다는 소리죠. 이제 우린 어딜 가더라도 완벽한 미국 시민권자일걸요?”
“설마··· 해킹을? 그 짧은 사이에?”
이쯤 되면 엘레나도 리스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기가 막혔다.
그녀가 뭔가를 조작하는 듯 보였던 시간은 5초도 못 되는 짧은 순간. 그 사이에 미국 전역에 존재하는 모든 행정 데이터를 주물러 자신들을 시민권자로 등록시켜놨단 말인가?
그녀의 놀란 표정을 본 리스테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주 간단했어요. 이런 원시적인 방화벽 정도는 제겐 없는 거나 다름없거든요. 하긴 제대로 된 양자 컴퓨터조차 못 만드는 과학력이니 말 다했죠.”
지구에서도 시험 단계의 양자 컴퓨터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건 진정한 양자컴퓨터라고 하긴 어려웠다.
하물며 완성형 양자 컴퓨터를 훨씬 뛰어넘어, 근원자인 영자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리스티의 커스텀 모듈 밴더의 성능이 지구의 전산 시스템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슬슬 가볼까요?”
가볍게 산책을 가자는 투로 말하는 리스티의 모습에, 일행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우웅!
로키 산맥을 내려와 그들이 보게 된 것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모습이었다. 대도시인 덴버와 가까워서인지 도시 외부의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제법 많이 보였다.
지구 출신인 이진운이나 윤재민, 그리고 엘레나는 별 감흥 없이 계속 걸었지만, 태생이 연합 출신인 사람들은 달랐다.
“와, 아직도 이런 게 굴러다니다니 말이야.”
먼저 감탄사를 낸 것은 리스티였다. 그리고 아리엔이 그 말을 받았다.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화석연료를 쓰는 내연기관이라니.”
“심지어 차들이 다 바퀴를 굴려서 지면 위를 달리고 있어.”
“자기부상이나 반중력 같은 부양 기능은 아직 멀었나봐.”
이진운은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는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마침 일행 외에 듣는 사람이 없기에 망정이지, 자기부상이니 반중력이니 하는 이야기가 누군가의 귀에 들리면 주변에서 이상한 시선을 보내왔을 것이다.
“이건 또 언제 적 물건들이야? 박물관에서나 볼법한 고대유물 수준이네. 심지어 자동항행 AI도 없어. 지구인들은 저런 위험천만한 골동품들을 잘도 타고 다니는군.”
레이첸은 시큰둥한 얼굴로 그렇게 내뱉고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덴버 이전에 있는 마을에 들러 차량을 랜트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덴버의 국제공항으로 직행했다.
공항에 도착한 일행은 1시간 뒤 출발하게 될 LA행 비행기 티켓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게 다 리스티가 손을 쓴 덕분이었다.
일행은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서 간단히 식사를 해결했다. 레이첸은 햄버거를 입에 한 가득 씹으며 중얼거렸다.
“우물우물! 지구의 음식도 나쁘진 않은데?”
“괜찮다니 다행이군.”
혹시나 입에 맞지 않을까 우려했던 이진운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우주인이라 해도 입맛은 지구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연합에서 먹었던 음식들도 그랬지.’
만드는 방식이나 사용하는 향신료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먹는 것 자체는 지구나 연합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일행은 비행기에 탑승했다. 일행들은 여전히 신기하다는 표정들이었다.
“와, 제트 방식의 여객기라니.”
“이런 위험한 걸 타고 다니면서 무섭지도 않나? 조금만 삐끗하면 추락할 것 같잖아.”
“으, 좁고 갑갑해. 지구인들은 이런 걸 타고 다닌다고?”
감탄인지, 불평인지 모를 일행의 말을 뒤로한 채 이진운은 티켓에 적힌 자리를 찾아 앉았다. 리스티가 일행의 좌석을 한데 모아둔 덕분에 떨어지지 않고 앉을 수 있었다.
곧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응시하면서 이진운은 생각에 잠겼다.
‘여기까지는 별 탈 없이 왔지만, 앞으로가 문제군.’
지구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은 실종자들이었다. 제아무리 신분증을 만들고 전산망을 조작했다 하더라도, 신분이 명백한 엘레나의 존재까지 조작할 순 없었다.
아마 목적지인 로스차일드 가문에 도착하면 발칵 뒤집힐 게 뻔했다. 영영 사라졌을 줄 알았던 가문의 핏줄이 2년 만에 다시 돌아왔으니까.
일단 각 국의 정부와 접촉하기 전까지는 자신들로 인해 벌어질 소란을 최소화할 생각이었다.
몇 시간 뒤, 일행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본가에 도착했다.
“여기가 엘레나 너희 집 맞지?”
“네.”
아리엔의 물음에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둘러싼 크고 높은 담장과 금속제 문이 정면을 틀어막고 있었다.
이건 그냥 집이라기 보단 거대한 성에 가까웠다. 레이첸은 그것들을 한번 훑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흠, 제법 큰 편이군. 그래봐야 우리 가문만 못하지만.”
하긴 레이첸의 바이우드 가문은 우주에서도 손꼽는 거대 세력이었다. 그들의 본가는 무려 거대행성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을 정도니, 그 거대함이란 이곳 로스차일드 따위와 비교할 바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저택의 크기를 비교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진운은 엘레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려면 연락부터 해야겠지. 엘레나.”
“예. 지금 해볼게요.”
엘레나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곧 안에서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저예요.”
[누구냐? 넌! 누군데 나한테 전화를 걸고 아버지라고 하는 거냐?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저예요. 엘레나. 아버지 딸이요.”
[지··· 진짠가!? 엘레나, 엘레나 맞니?]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2년 동안이나 실종되어서 찾을 길이 없었던 딸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으니까.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왜 이제 와서 연락을 했어?]
“어쩔 수 없었어요. 연락을 할 수 없는 곳에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어딘데? 어디서 전화를 하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라 곧 위치 추적을 해서 찾아낼 테니까. 꼼짝 말고 있어!]
“아버지, 저 바로 집 앞이에요. 대문 앞에 있다고요.”
[뭐!? 뭐라고!?]
사라졌던 딸이 난데없이 집 앞에 도착했다고 하자, 엘레나의 아버지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는 잠시간 침묵하다가 곧 입을 열었다.
[그··· 그래, 곧 나가마!]
그것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엘레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전화를 귀에서 떼더니 곧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아무래도 좀 일이 복잡해질 것 같네요.”
“왜 그래? 그 표정은? 2년 만에 돌아왔는데 반기질 않디? 너 혹시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이었어?”
레이첸이 그렇게 묻자, 엘레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런 게 아니고요. 여러분들에 비한다면 별 거 아니겠지만, 저희 가문은 이곳에서 꽤 행세를 하는 집안이거든요. 아무래도 제가 진짜 딸인지 의심하는 것 같아요.”
“뭐?”
다들 무슨 소린가 싶어 쳐다보자, 엘레나는 자신이 짐작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그렇잖아요. 실종되었던 딸이 아무런 조짐도, 이유도 없이 대문 앞까지 찾아왔어요. 그리고 스스로 전화까지 걸어서 도착했다고 알리기까지 했죠. 한번쯤 의심할 만하잖아요.”
“하긴, 돈 많고 권세 있는 가문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는 무리들도 있으니······.”
클레브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지구뿐만 아니라 연합에서도 간혹 벌어지는 일이었다. 잘 사는 가문이 자식을 잃어버렸을 경우, 누군가가 가짜를 내세워 재산을 갈취하는 사례도 제법 존재했으니까.
“만일 제가 진짜라 하더라도, 여러분들을 납치범쯤으로 여길 수도 있겠죠.”
“흐음, 그럼 저쪽에서는 우리에게 절대 친절하게 나오진 않겠는데?”
아마도 로스차일드 가에서는 자신들을 무력으로 제압해올 가능성이 컸다. 일단 진짜든 아니든, 제압해서 진실을 실토하게 만들면 된다는 생각일 테니까.
이진운은 피식 웃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무력으로 제압하기엔, 자신을 비롯한 일행들이 너무도 강해서였다.
“그러니까··· 좀 무례하게 굴어도 제발 적당히만 해 주세요.”
엘레나는 그렇게 간곡한 목소리로 부탁해왔다. 일행이 제대로 손을 썼다간 로스차일드 가 전체가 그날로 초상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탁에 대답할 새도 없이 거대한 대문이 열렸다. 철제 대문이 활짝 젖혀지는 순간, 총기로 무장한 인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바로 로스차일드 가를 지키는 호위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경호 인력이라고 하기엔 무장들이 너무나도 충실했다. 손에 들고 있는 것도 권총 수준이 아니라, 전쟁용병들이나 사용할 법한 기관단총을 비롯해서 대물저격총까지 들고 있었다.
그들이 이진운 일행을 향해 일제히 총구를 겨누며 외쳤다.
“손들어! 그리고 움직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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