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24화
달이 슬슬 가시권에 들어서자, 아르페인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본 함대는 달의 뒷면에서 대기 상태에 들어간다. 광학 스텔스를 비롯한 은폐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박한다.”
[예.]
잠시 뒤 인피니티 킹덤은 달의 뒷면에 자리를 잡았다. 전함의 수가 많긴 했지만 못 숨을 정도는 아니었다.
함대가 달의 뒷면에 정박하고 나자 아르페인이 넌지시 물음을 던져왔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일단은 지구로 내려가 봐야겠지. 내 제자들과 일행만 데려갈 생각이다.”
아르페인도 이진운이 말한 일행의 구성원이 누구인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구권 국가를 다스리는 수뇌부들을 만나기엔 너무도 단촐하기까지한 인원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호위나 수행원은 따로 필요 없으신지요?”
“내게 호위가 필요할 것 같나?”
되돌아온 이진운의 반문에 아르페인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애당초 이진운에게 호위 따윈 필요 없었다.
단독으로 함대도 상대할 수 있는 그가 무슨 호위가 필요하단 말인가.
거추장스러운 건 필요없다는 의미로 알아들은 아르페인은 질문을 바꾸었다.
“그럼 먼저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미국이란 곳이지. 그곳에 엘레나의 본가가 있다더군. 그들과 접촉할 생각이다. 그들을 이용해서 지구의 각국 정상들과 협상을 해야겠지.”
“그러시군요. 그럼 지금 즉시 지구로 강하할 수 있도록 셔틀을 준비해놓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지.”
아르페인은 그 즉시 셔틀을 준비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카멜롯 내에도 소형 전함 몇 척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형 전함이라고 해서 그렇게 작지도 않았다. 전장만 무려 50여 미터에 달하는 크기인 만큼 어지간한 지구의 우주선들보다도 훨씬 컸다.
전함이 준비되자마자 일행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 앞에는 소형 전함이 해치를 개방한 채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엘레나가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지구로 돌아가는 거네요.”
“그래. 아주 오래간만인 느낌이야. 2년이 아니라 한 10년 쯤 지난 느낌이군.”
이진운도 그 말에 동감하면서 생각했다. 연합에서 보낸 2년은 그냥 2년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동안 겪은 수많은 일들은 무려 수십 년을 압축해 놓은 만큼 밀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멀린이 만들어준 하루가 1년에 달하는 환상공간에서 수련한 시간까지 포함한다면, 그들이 겪은 주관시간으로만 해도 족히 수십 년은 넘어섰다.
그래서일까? 엘레나도 더 이상 어리지만은 않았다. 단지 겉모습만 그런 게 아니었다. 2년이란 시간 동안 무럭무럭 자란 그녀는 어린 소녀에서 사춘기 소녀의 모습으로 장성했지만, 정신적 연령은 그 이상이었으니까.
이진운은 그 점이 안타까웠다. 그 나이 대에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이렇게 성숙해버린 것 같아서였다.
“스승님, 준비 끝났어요.”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기던 아리엔과 클레브가 그렇게 말했다. 지구에서 통용되는 화폐나, 신분증, 거처도 없는 그들이 내려가서 한동안 머물려먼 그에 상응하는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준비를 마친 일행들과 달리, 이 상황에 대해 불만스러워 하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근데 나도 가야 하는 거야? 난 지구 출신도 아니잖아.”
레이첸이 귀찮다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로서는 자신까지 지구로 내려가야 하는 이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당초 지구는 그의 고향도 아니거니와, 연합에 비한다면 문명 수준 자체가 원시적인 레벨이라서 여러 모로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일행들이야 모르겠지만, 자신은 굳이 불편함을 감수해가며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진운 때문에 이 자리까지 거의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한 것이다.
이진운은 대답 대신 먼저 주먹을 휘둘렀다. 그것은 기척조차 없이 다가와 레이첸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쾅!
“크헉!”
꽤나 호된 타격음과 함께 레이첸의 고통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이스터 상위의 경지에 오른 레이첸이었지만, 이진운이 작정하고 휘두른 주먹은 피할 수가 없었다.
“요, 자를 붙여라! 스승에 대한 존대는 어디다 버린 거지?”
“······으윽. 죄송합니다요, 스승님.”
레이첸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사죄했다. 그리고 요자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 그랬다간 정말로 호된 꼴을 당할 것 같아서였다.
이진운은 그런 레이첸을 잠시 흘겨보다가 설명해주었다.
“널 굳이 데려가는 이유는 바로 무력시위 때문이다.”
“무력시위라면··· 그러니까 지구권 놈들이 말을 안 들으면 힘으로 해보겠다는?”
“아니, 그 반대지.”
“반대라면······.”
“솔직히 말해 우리가 먼저 무력을 쓸 일은 없을 거다. 애당초 엘레나의 가문과 접촉해서 각 국 수뇌들과의 협상 자리를 마련하는 것부터가 온건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한 절차니까. 하지만 이 좁은 행성에서 서로 아귀다툼을 하며 권력을 마음껏 누리고 있던 것들은 우리의 제안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여기까지 들은 이상 레이첸도 그 뒤에 벌어질 일에 대해선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음··· 둘 중 하나겠군요. 그냥 헛소리로 취급하든, 아니면 일단 수상쩍은 놈들이 있으니 잡아두고 심문이든 고문이든 해서 내막을 실토하게 하든가 그렇겠죠.”
“바로 그렇지. 아마도 난 후자라고 생각한다. 일단 몇 가지 증거로 이능을 보여줄 생각이지만, 그냥 좀 신기한 초능력 정도로 받아들이겠지. 그리고 우릴 붙잡아서 힘의 원리를 캐내려고 할 테고.”
“그리고 우린 놈들을 무력으로 응징하게 되겠군요.”
“뭐 그런 셈이지.”
레이첸은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았다. 지구인의 문명이라고 해 봐야 아직도 화석 연료에 의존한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수준이었다.
원자력이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곤 하지만 고작 그런 게 위협이 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오히려 이진운을 제압하겠다고 덤벼들 그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지구인들이 자랑하는 핵무기 수천 발로도 타격을 입지 않는 인베이더의 함대를 단독으로도 쓸어버릴 수 있는 게 이진운이었다.
그런 그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될 자들을 생각하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긴 무지가 죄죠. 무식한 놈들이 뭘 알겠습니까? 지들이 호랑이 아가리에 머릴 들이밀었다고는 상상도 못하겠죠.”
“아무튼 우린 그런 상황이 되면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면 된다. 사태가 좀 악화되면 그들 국가하고도 싸워야 할 수도 있으니 널 데러가려는 것이고.”
레이첸의 무력은 일행 중 이진운 다음으로 강했다. 그의 무력이라면 지구의 최강국이라는 미국이라 하더라도 제압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레이첸의 불만을 무시하고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 막 전함에 오르려던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진운에게 다가왔다. 바로 지구인 출신의 소환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이진운 일행도 익히 아는 사람이 있었다.
“마틴. 무슨 일이지?”
“지구에 내려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마틴의 말에 이진운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혹시 저희는 언제쯤 내려갈 수 있는 겁니까?”
“음, 지금 당장은 어려운 것 같군.”
“그러면······.”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이진운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곳을 찾아온 자들은 하나같이 지구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진운은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일단 지구 입장에서 보면 우린 실종자들이다. 어디론가 수년 동안 사라졌던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났는데 어떤 소란이 벌어질 것 같나?”
“으음······.”
다들 침음성을 흘렸다. 이진운의 말만으로도 그 뒤에 어떻게 될지 대충 상상이 되어서였다.
“조사한다고 난리가 나겠지. 최악의 경우 국가기관에서 너흴 잡아다가 심문할 테고. 물론 너희가 가만히 앉아 당해주진 않겠지만, 그렇게 되면 전쟁이 된다. 각 국에서도 군대를 파견해 너흴 공격하겠지.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내려가고 싶나?”
고향이 그리워서, 친인들이 보고 싶어서 지구로 내려가려 했을 뿐, 세상에 혼란을 불러일으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틴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곧 힘없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우리가 먼저 내려가는 것도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함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이진운은 일행과 함께 전함에 올라탔다. 그러자 해치가 닫히더니 전함이 저절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에 의한 자동항법 시스템이었다.
잠시 뒤, 전함은 카멜롯을 벗어났다. 그리곤 광학 스텔스를 유지한 채 빠르게 지구로 날아갔다.
* * *
카멜롯을 떠난 지 한 시간 뒤. 이진운 일행은 지구로 내려와 있었다. 사실 속도를 제대로 낸다면 불과 몇 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지구인들에게 관측되지 않기 위해 천천히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대기권과 마찰이라도 일으키면 제아무리 원시적인 과학력을 가진 지구인들이라 해도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으니까.
덕분에 이진운 일행은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지상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이제야 겨우 돌아왔군.”
“그러게 말이야. 일년 반 만인가? 엄청 오래된 것 같은데 말이야.”
전함에서 막 내린 이진운의 중얼거림에 윤재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먼저 주변을 살폈다. 꽤나 낯선 풍경이 그들을 맞이해주고 있었다.
“여긴 어디야? 우리가 살던 한국은 아닌 게 분명한데 말이야.”
“로키산맥.”
이진운이 그렇게 대답하자, 윤재민은 더욱 새삼스런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로키산맥이라 TV에서 몇 번 봤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해외에 올 줄은 정말 몰랐어. 해외여행 같은 건 상상도 못해봤었는데 말이야.”
“저 먼 우주까지 나가본 녀석이 해외여행 운운은 무슨.”
한 차례 피식 웃은 이진운은 엘레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미국 출신인 만큼 그녀가 이곳의 지리나 사정에 더 밝기 때문이었다.
“그럼 너희 가문까지 가야 할 텐데 말이야. 어떻게 하면 되겠니, 엘레나.”
“일단은 덴버로 가야 해요.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대도시거든요. 거기서 국제공항을 통해 LA로 가는 게 좋겠어요.”
“흠, 멀진 않군. 그러자면 돈이 필요한데 말이야. 미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넓어서 그냥 보도로 가긴 좀 그렇지.”
이진운 일행이라면 날든 달리든 자동차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문제였다. 일단 그들이 가진 개인용 장비는 대부분 전투용이라서 인베이더와의 전투에 큰 도움이 안 되는 광학스텔스 같은 건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일단 출발부터 하자. 그리고 전함은 대기 모드로 전환.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광학 스텔스 상태로 해둬라.”
“알았어요.”
이진운의 그 말에 리스티는 함의 외장갑 일부를 열어 패널을 조작했다. 그러자 전함의 모습이 순식간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게 바로 광학 스텔스 모드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지구의 어떠한 레이더나 관측 장비로도 전함의 모습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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